조지 버클리

조지 버클리

다른 표기 언어 George Berkeley
요약 테이블
출생 1685. 3. 12
사망 1753. 1. 14, 옥스퍼드
국적 영국

요약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경험론 철학으로 유명하다.
저서 <신시각론을 위한 시론>(1709)에서 버클리는 시각의 거리, 크기, 위치와 시각과 촉각의 문제 등을 검토했으며, "시각의 고유한 대상"은 마음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만질 수 있는 대상은 그와 반대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인간지식의 원리에 관하여>(제1부, 1710)에서 만질 수 있는 것을 포함한 모든 감각 대상을 마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물질적 실체, 물질적 원인, 추상적 일반관념 등을 거부하고 정신적 실체를 승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을 겨냥한 많은 반론에 대답했다. 또 다른 저작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1713)에서는 전문 용어를 피하고 매혹적인 문학 형식을 빌어 〈인간지식의 원리에 관하여>의 주요논증을 보강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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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저작
  3. 주요저작의 시기
  4. 아메리카 모험과 그 이후
  5. 클로인 주교 시절
버클리(George Berkeley)
버클리(George Berkeley)

개요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경험론 철학으로 유명하다(형이상학).

초기생애와 저작

윌리엄 버클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대학 입학서류에 아버지는 '젠틀맨'으로 기입되어 있고 남동생의 서류에는 기병대 기수, 장교로 기입되어 있다. 다이저트 성에서 자란 버클리는 1696년에 킬케니 칼리지에 들어갔으며, 1700년에는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로 옮겨 1704년에 문학사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에서 펠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면서 물질적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과 시간·시각 등을 비판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사고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가 대표하는 경험론과, 니콜라 말브랑슈와 피에르 벨이 대표하는 대륙 회의주의였다.

그의 최초의 출판물 〈대수학 Arithmetica〉(1707)·〈수학논문집 Miscellanea Mathematica〉(1707)은 펠로 자격 논문으로 추측된다.

버클리는 1707년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로 선출된 뒤 자신의 '최초의 논증들'을 검토·수정하기 시작했다. 수정은 철저히 이루어졌고 그결과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의 과거의 원리는 대부분 새로운 원리로 바뀌었다. 즉 색·맛, 그밖의 감각적 성질이 주관적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비유물론(非唯物論)을 논증하던 원래의 노선은 '있다' 또는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단순하고도 심오한 분석으로 바뀌었다.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각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주관이 지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인식론, 관념론, 실재론, 물리적 대상, 있다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 버클리는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지각하거나 상상할 때 존재하는 전체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어떤 사람이 나무나 책을 상상하면서 '그것들을 곁에서 지각하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전체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지각하는 자를 '빠뜨리고' 있다. 왜냐하면 상상된 나무나 책은 지각될 수 있어야만 반드시 상상되기 때문이다." 버클리에게 전체 상황은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 사이의 2항관계이다.

제3항은 없다. 다시 말해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 사이에 나타나는 대상의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수정은 점진적 발전을 거쳐 이루어졌다. 처음에 버클리는 '의식적 사물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버클리는 '다시 생각하고 나서' 물체의 존재를 확신했으며 '우리 이외의 다른 사물들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알게 되었다. '마음 안에', '마음없이'와 같은 그의 표현도 적절히 이해해야만 한다.

버클리가 자신의 노트에 썼듯이, 열과 색(철학자들은 이것들이 주관성을 갖는다고 해서 제2성질로 분류했음)은 형태나 운동(제1성질로 분류) 또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마음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제1성질이나 제2성질 모두 사물 안에 '있듯이' 마음 안에 있으며, 마음 안에 '있듯이' 사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질들이 마음 안에 있더라도 마음이 붉어지거나 파래지는 것은 아니며, 연장(延長 extension)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런 성질들은 마음의 양태도 속성도 아니다. 버클리에게 색과 연장은 정신적 성질이 아니다. 색은 볼 수 있고 연장은 만질 수 있다. 이것들은 '감각될 수 있는 관념' 또는 감각자료, 즉 지각하는 마음의 직접적 대상이다.

버클리는 현실적 지각뿐 아니라 가능한 지각도 인정했다. 즉 어떤 사람이 실제로 지각하고 있지 않지만 적절한 단계를 밟을 경우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유물론자를 포함한 일부 철학자들은 이와 대립하는 견해를 주장했다.

버클리의 말에 따르면 유물론자들은 "그들 자신의 원리 때문에" 그런 견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실제로 보고 만진 대상이 간헐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며 지각될 때는 존재했다가, 지각되지 않을 때는 소멸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버클리는 이런 견해를 주의깊게 다루었다. 그는 이런 견해가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거부했지만, 이런 견해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버클리는 이들 견해가 자신의 원리에서 뒤따라나온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부정했다. 버클리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굳이 원하면, 감각의 대상은 오직 '간헐적' 존재를 가질 뿐이며 사람의 주의가 바뀔 때마다 창조되었다가 사라졌다가 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견해를 내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나는 그런 견해를 주장하지 않았다." 버클리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썼다. "존재는 지각되는 것(percipi)이거나 지각함(percipere)이다. 여전히 말은 마굿간에 있으며 성서는 서재에 있다." 말과 성서는 설사 사람에 의해 실제로 지각되고 있지 않더라도 여전히 거기에 있으며, '여전히 지각과 관련하여' 여전히 지각될 수 있다.

철학과 무관한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클리는 "나는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어떤 것의 존재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버클리의 비유물론은 스스로 자신의 책 서문에서 말했듯이 '크게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올바로 이해할 경우 그의 생각은 상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버클리도 '2항', 즉 '전혀 다르고 이질적인 2종류'를 받아들였고 그것에 의존했다. 첫째, 지각하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능동적 마음 또는 정신, 둘째, 마음의 수동적 대상, 즉 감각할 수 있는 관념(감각자료) 또는 상상할 수 있는 관념이다.

주요저작의 시기

버클리 저술의 황금기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 뒤부터였다.

〈신시각론을 위한 시론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1709)에서 버클리는 시각의 거리·크기·위치와 시각과 촉각의 문제 등을 검토했으며, "시각의 고유한(또는 진정한) 대상"은 마음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만질 수 있는 대상은 그와 반대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버클리는 〈인간지식의 원리에 관하여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제1부, 1710)에서 만질 수 있는 것을 포함한 모든 감각 대상을 마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물질적 실체, 물질적 원인, 추상적 일반관념 등을 거부하고 정신적 실체를 승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을 겨냥한 많은 반론에 대답했으며 신학적·인식론적 결론들을 끌어냈다. 또다른 저작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 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1713)에서 버클리는 전문 용어를 피하고 매혹적인 문학 형식을 빌어 〈인간지식의 원리에 관하여〉의 주요논증을 보강했다. 이 두 저서는 비유물론을 한 목소리로 말한다.

버클리는 1709년에는 부제가 되었고 1710년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17년 동안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있으면서 사서(1709), 부학생감(1710~11), 신학·그리스어·히브리어 등의 튜터와 강사로 활동했다. 정치적으로 버클리는 하노버 시대의 토리 당원이었으며, 3번에 걸친 설교를 통해 토리당의 윤리적 견해를 옹호하기도 했다. 이 설교들은 〈수동적 복종 Passive Obedience〉(1712)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렇게 5년 동안 4권의 주저를 냄으로써 버클리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13년 휴가기간에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떠났을 때 이미 그는 학계에서 유명인사였다. 그의 저서들은 대륙에서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유명한 〈단자론 Monadology〉의 저자 라이프니츠는 버클리의 비유물론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에 관해 논평하기도 했다.

버클리는 런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즉시 성공을 거두었다.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 대성당의 사제장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그를 궁정에 소개했다. 평론가인 리처드 스틸을 위해 버클리는 자유사상가를 비판하는 평론들을 〈가디언 The Guardian〉지에 기고했다. 또 버클리는 〈카토 Cato〉라는 연극이 초연된 날 밤에 평론가이자 시인인 조지프 애디슨과 함께 극장에 갔으며 이 경험을 활기 넘치게 표현한 글을 남겼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버클리를 '지상의 모든 덕'을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1713~14년에 버클리는 피터버러 백작 3세 찰스 모든트와 함께 교회사절로 시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버클리는 모든트를 '특명 대사'라고 불렀다. 추방당한 스튜어트 왕가를 위한 1715년의 제임스 2세파의 반란 기간 동안 버클리는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충성을 맹세한 토리 당원들에게 보내는 충언 Advice to the Tories Who Have Taken the Oaths〉을 출간했다.

1716~20년에는 이탈리아에서 클로거(나중에는 데리) 주교의 아들인 조지 애시의 가정교사로 있었다. 버클리의 4개의 여행 일기는 로마 관광과 남부 이탈리아 여행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버클리는 〈운동에 관하여 De motu〉(1721)를 출간했다.

여기서 그는 아이작 뉴턴의 절대공간·시간·운동 등을 거부하고 자신의 비유물론을 은근히 암시했다. 이 책 덕분에 최근에 버클리는 '마흐와 아인슈타인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더블린에서 계속 일하면서 버클리는 3년 동안 교육과 행정에 전념했다. 1724년 데리의 사제장으로 임명되어 마침내 트리티니 칼리지와의 24년에 걸친 인연은 끝나게 되었다.

아메리카 모험과 그 이후

버클리는 헤스터 밴 홈라이(스위프트의 바네사)에게서 사제장의 지위 및 유산을 계승하게 된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신세계에서의 '버뮤다 계획'을 추진했다.

'남해회사 포말사건'으로 폭발적으로 일어난 광란적 투기는 유럽에 대한 버클리의 신념을 뒤흔들었으며, 그는 신대륙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의 〈대영제국의 몰락을 막기 위한 시론 Essay Towards preventing the Ruin of GreatBritain〉(1721)에 곧이어 "제국의 진로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와 같은 예언적 시구가 나왔다.

버클리는 이미 1722년에 젊은 아메리카인들(인디언들)의 교육을 위해 버뮤다에 대학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이 계획을 〈더 많은 교회를 보급하기 위한 제안…… A Proposal For the better Supplying of Churches…….〉(1724)에 발표했다. 그의 계획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왕은 대학지부 설립을 허가했고 캔터베리 대주교는 수탁자를 자임했다. 기부금이 쇄도했고 의회도 2만 파운드에 달하는 임시지원금을 인준했다.

그러나 그 돈을 조지아 지방을 위한 지원비로 쓰자는 반대의견이 의회에 제기되어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월폴은 이 문제를 보류했다.

1728년에 버클리는 앤과 결혼했다. 앤은 대법원장 포스터의 딸로서 매우 재능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자였다. 그녀는 버클리가 죽은 뒤 남편의 철학을 옹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결혼하자마자 아메리카로 가서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정착했다. 거기서 버클리는 땅을 사서 집(화이트 홀)을 짓고 본국에서 지원금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때때로 뉴포트와 인근 지역에서 설교를 했으며, 화이트 홀에서 철학연구모임을 가졌다. 결국 버클리는 지원금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1731. 10). 그는 미국의 여러 대학, 특히 예일대학교를 방문했고 훗날 킹스대학(컬럼비아대학교) 학장이 된 새뮤얼 존슨과 버클리의 서신 왕래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알키프론:세심한 철학자 Alciphron;or, The Minute Philosopher〉(1732)는 버클리가 뉴포트에서 쓴 책으로, 대화의 배경인 그 지방의 경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버클리는 유신론과 그리스도교를 당당하게 옹호하고 이신론자(理神論者)와 자유 사상가를 공격했으며 시각적 언어, 유추적 지식, 종교적 논증에서 말의 기능 등을 논의했다.

1731년 런던으로 돌아온 버클리는 더욱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데일리 포스트 보이 Daily Post-boy〉의 한 저자가 〈알키프론:세심한 철학자〉는 칭찬했지만 부록으로 붙은 〈신시각론〉을 공격했다. 이에 대해 버클리는 〈시각론 또는 시각언어……변호와 설명 The Theory of Vision, or Visual Language…… Vindicated and Explained〉(1733)으로 응수했다.

이 훌륭한 저작에서 버클리는 〈신시각론〉의 형이상학(존재론)을 〈인간지식의 원리에 관하여〉와 접목하고 원인론을 추가하는 한편 원래의 〈신시각론〉의 전제들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했다. 〈알키프론:세심한 철학자〉는 풍자가 버나드 드 맨드빌, 익워스 남작 존 허비, 정치가 볼링브룩 자작 1세 헨리 세인트 존, 과거 스승이자 학장인 피터 브라운 등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버클리는 브라운에게 유비(類比)에 관해서 장문의 사신(私信)을 보냈다. 이것은 버클리의 4번째 대화에 대한 중요한 보충으로서, 최근에 발견되었으며 〈마인드 Mind〉(1969. 7)에 최초로 실렸다.

1734년에 버클리는 〈분석가:신을 믿지 않는 수학자에게 보내는 글 The Analyst:or, a Discourse Addressed to an Infidel Mathematician〉을 출간했다. 수학사가 플로리언 카조리는 이것을 "영국 수학사에서 18세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저서는 수학에 대한 기고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사람에의 논증'이기도 했다. 버클리는 "2번째 또는 3번째 미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내 생각에는 신성(神性)의 어떤 점에 대해서도 까다롭게 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유익한 논쟁의 참가자는 케임브리지의 의사이자 과학자 제임스 주린, 더블린의 존 월턴,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콜린 매클로린이었다.

버클리는 〈수학에서 자유 사상에 대한 옹호 A Defence of Free-Thinking in Mathematics〉(1735)라는 생생한 풍자를 통해 주린에게 대답했고 이 책의 부록과 〈대답하지 않는 이유…… Reasons For not Replying……〉(1735)를 통해 월턴에게 대답했다.

클로인 주교 시절

버클리는 1734년에 더블린에 있는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발전을 지켜볼 수 있었다. 새 도서관이 완성되었고 존 스턴의 도리아식 인쇄소가 건립되는 중이었다. 버클리는 이 인쇄소에 그리스어 활자 1벌을 기증했으며 그리스어 분야의 버클리 금메달상을 제정했다. 그가 감독주교로 임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737년에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이 되었다. 더블린에 있는 동안 〈행정관리와 당국자에게 보내는 글 A Discourse Addressed to Magistrate and Men in Authority〉(1738)을 발표해 블래스터(파괴자)를 비난했다.

블래스터들의 헬파이어(지옥불) 클럽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더블린 근처에 아직 남아 있다. 클로인의 접견실은 세련된 집으로 사교의 중심지였고 전염병이 돌 때는 진료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클로인에 왔을 때 그의 가족은 아내와 두 아들이었지만, 클로인에서 아들 둘과 딸 둘이 더 태어났다. 가족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은 아들 조지는 훗날 캔터베리 대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745년에 그는 자신의 사제들과 그의 관구에 거주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자신 또는 친구의 이름으로 출간된 서한들에서 버클리는 정치·사회·과학 등의 공적인 문제들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 가운데 〈질문자 The Querist〉·〈시리스 Siris〉가 두드러진다. 이 두 저술은 주위의 빈곤·고통·병 등을 다루었지만 이런 주제들을 훨씬 뛰어넘었다.

〈질문자〉는 1735~37년 3부분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는데, 경제학 기초(신용·수요·산업, '참된 화폐 관념' 등)와 예금·시세·사치, 양모무역 등과 같은 특수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질문은 "가난한 아일랜드가 아직도 가난하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핵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시리스〉(1744)는 6개월 동안 6판이 나왔다. 타르 수용액의 의학적 기능, 조제법, 복용법에 관한 논문이면서 동시에 감각의 세계로부터 '마음과 그 행위 및 능력'을 거쳐 초자연적인 것, 신, 삼위일체 등에 이르는 '점진적 진화 내지 상승' 또는 존재의 사슬에 대한 철학자의 전망이기도 하다.

1752년에 버클리는 동생 로버트 버클리 박사를 주교 대리에 위임하여 코크의 주교와 함께 자신의 직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그뒤 아내와 아들 조지, 딸 줄리아와 함께 옥스퍼드로 가서 홀리웰가의 집에서 머물면서 생을 마쳤다. 크라이스트처치 예배당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