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

분석철학

다른 표기 언어 analytic philosophy , 分析哲學

요약 분석철학 전통은 전체적으로 볼 때 같은 관점과 공통된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흐름과 철학자 개인에 따라 때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표와 방법론을 제시해왔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서로 구별되는 분석철학의 두 시기 모두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분석철학자들은 언어에 관한 철학적 탐구의 목적도 서로 다르게 제시했다. 버트런드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 등은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주며, 철학자는 언어분석을 통해 실재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분석철학자들은 귀납과 같은 특수한 철학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웅장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짜맞추려 하기보다는 기억이나 인격의 동일성과 같은 개념을 검토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몇몇 나라가 이 경향에 동조했으나 그밖의 지역에서는 추종세력이 매우 미약하다.

이 철학 전통은 전체적으로 볼 때 같은 관점과 공통된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흐름과 철학자 개인에 따라 때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표와 방법론을 제시해왔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서로 구별되는 분석철학의 두 시기 모두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로 대표되는 초기와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1953)로 대표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모두 분석철학의 중심 본보기이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분석철학자들은 언어에 관한 철학적 탐구의 목적도 서로 다르게 제시했다.

버트런드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 등은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주며, 철학자는 언어분석을 통해 실재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최근의 분석철학자들은 이른바 언어그림이론이라고 불리는 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은 일상언어가 결함이 있고 모호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모순적이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몇몇 분석철학자들은 일상언어 대신 정확하고 모호하지 않으며 구조가 분명한 언어, 즉 '이상(理想)언어'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상언어의 일반 모델이 기호논리학이었기 때문에, 20세기의 기호논리학의 발전은 분석철학에서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언어는 자연언어의 구조를 잘못 인식함으로써 생겨난 전통철학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다른 견해를 가진 철학자들은 우리가 다양한 상황에 관해 일상언어로 말하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철학적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자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분석철학자들은 귀납과 같은 특수한 철학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웅장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짜맞추려 하기보다는 기억이나 인격의 동일성과 같은 개념을 검토했다.

이상적으로 보면 철학의 분석은 중요한 개념을 설명하고 그 개념을 포함하는 철학문제에 대답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분석의 유명한 예는 버트런드 러셀의 '확정기술구론'(theory of definite descriptions)이다. 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와 같이 단순한 주어-술어 명제에는 지시되는 것(소크라테스)과 그것에 대해 말해지는 것(현명하다)이 있다. 만일 "미국의 대통령은 현명하다"라는 명제처럼 고유명사 대신 '확정기술구'를 사용하면 지시되는 것과 그것에 관해 말해지는 것이 아주 명백하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프랑스 왕은 현명하다"라는 명제처럼 기술구에 해당하는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경우를 고려하여 알렉시우스 마이농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위의 명제도 존재하는 무엇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셀의 견해에 따르면, 마이농과 같은 철학자들은 표층문법형식만 보고 이런 명제가 단순한 주어-술어 명제라고 잘못 생각했다.

이런 명제들은 복합적이며 이에 대한 분석은 "현재의 프랑스 왕"이라는 확정기술구가 그 명제에서 결코 독립적인 단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프랑스 왕은 현명하다"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은 3개 명제의 복합적 연언(連言)이다. ① "현재 프랑스 왕이 있다." ② "현재 프랑스 왕이 기껏해야 1명 있다." ③ "어떤 사람이 현재의 프랑스 왕이라면 그는 현명하다." 그러나 이 3개의 구성요소 각각이 일반적 진술이며 특수하게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현재의 프랑스 왕"과 동등한 구(句)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구는 고유명사처럼 무언가를 지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마이농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이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관점

분석의 성격·역할·방법

분석철학의 정신과 스타일은 감각에 주어진 자료를 강조하는 경험론 전통과 강한 유대를 갖고 있다.

경험론 전통은 수세기 동안 영국 철학을 지배했고 대륙의 합리론 전통과 쌍벽을 이루었다. 따라서 분석철학이 주로 앵글로색슨계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상 현대 분석철학은 케임브리지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과 G.E. 무어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영국 철학계를 일시적으로 사로잡은 반(反)경험론적 관념론에 반발했다.

대부분의 경험론자들은 감각이 인식에 완벽한 확실성을 제공해줄 수는 없으나 세계에 관한 정당한 믿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은 관찰과 실험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이분법적 과학관에서 나왔다. 경험론자들은 과학의 범주를 2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궁극적으로 관찰에 의해 물리과학이고, 둘째는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주어진 공리로부터 정리를 연역하는 연역또는 선험과학이다(선험적 지식, 과학철학). 이러한 견해는 분석철학 내부의 2가지 중요한 흐름, 즉 논리적 원자론과 논리실증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분석철학의 전통 안에 있는 철학자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은 철학의 역할이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고 개념의 분석은 치유적 기능을 가진다고 보았다.

개념을 분석하는 작업은 이른바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해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관련개념에 관한 오류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관은 철학의 역할을 단순히 다른 철학자들의 혼동을 청소하는 것이라고 보고 적극적·생산적인 작업으로 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형식언어와 일상언어

분석철학자들의 핵심관심사인 언어의 역할은 방법론에 관한 논쟁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분석철학자가 아닌 철학자들은 언어에 몰두하고 집착하는 것을 철학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중세철학자·경험론자 등 대부분의 주요 철학자들은 언어에 관한 논의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큰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의 하나는 기호논리학적 의미에서 형식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논리학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주로 수학자의 업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다.'불(Boole 代數)'의 창시자인 영국의 조지 과 집합론의 창시자인 러시아 태생의 게오르크 칸토어가 특히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들은 논리학과 수학을 서로 밀접하게 결합시키려 했다. 독일 예나대학교의 수학자·철학자인 고틀로프 프레게는 철학의 분과인 논리학을 수학적 기법과 훌륭하게 결합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프레게는 버트런드 러셀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러셀이 동료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공동저술한 기념비적 저작 〈수학 원리 Principia Mathmatica〉(1910~13)와 그전에 나온 러셀의 저서 〈수학의 원리 Principles of Mathematics〉(1903)는 논리학에 수학적 기법을 적용하는 것이 철학의 발전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일상언어는 정확하고 명료한 규칙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이외에도 많은 점에서 기호논리학의 인공언어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일상언어는 때때로 기호논리학의 규칙들을 위반한다. 예를 들어 "이것이 금이라면 이것은 왕수(王水)에 용해될 것이다"라는 명제는 기호논리학에서 실질조건문 pq(여기서 ⊃은 '만약~이라면'을 나타냄)로 표현되는데, 기호논리학의 규칙에 따르면 이 명제는 전건(前件), 즉 "이것은 금이다"가 거짓일 때는 언제나 참이다.

반대로 일상언어에서는 명제의 참이 단순히 형식논리적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이라는 것과 왕수에 용해된다는 것 사이에 형성되는 화학반응의 세계에서 실제적 연관(기호논리학에서 이러한 실제적 연관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함)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참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논리학과 일상언어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호논리학을 완전히 불신한 분석철학자도 있으며 일상언어가 과학적으로 참인 엄밀한 진술일 때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고 보는 분석철학자도 있다.

초기 분석철학의 역사

관념론에 대한 반발

1880, 1890년대 영국 철학계는 독일 철학자 G.W.F. 헤겔의 영향으로 절대적 관념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경험론의 견고한 전통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했다. 현대 분석철학의 씨앗은 러셀과 G.E. 무어가 뿌렸다. 이들은 20세기로의 전환기에 관념론과 결별했다.

절대적 관념론은 과학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의 근본진리를 탐구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다. 절대적 관념론자에 따르면, 실재가 다양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며 결국 전체, 즉 절대자만이 실재성을 갖는다. 이와 반대로 영국 경험론은 상식적 직관을 중시한다.

영국 경험론은 상식을 하나의 동맹자로, 과학을 전형적인 세계 탐구방식으로 생각했다. 분석철학 운동의 역사에는 강력한 반(反)형이상학적 흐름이 놓여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운동의 대표자들은 과학의 방법과 일상생활의 방식이 진리를 밝혀내는 참된 길이라고 가정했다.

창시자 무어·러셀

무어와 러셀은 분석철학의 전통에 서 있었지만 문제를 취급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러셀은 형식논리학을 통해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물리과학을 세계에 관한 인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고 철학은 수학과 같은 연역적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달리 무어는 전문적 도구를 도입하거나 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변형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았다. 무어의 핵심논제는 ① 회의론적·형이상학적 견해에 맞서 세계에 대한 상식적 견해를 옹호하고, ② '철학적 수수께끼'에 올바르게 접근하는 길은 그 수수께끼를 풀기에 앞서 무엇이 그와 같은 수수께끼를 낳았는가를 묻는 것임을 확신하는 데 있다(회의주의). 그가 보기에 철학적 문제란 철학자들이 정확하게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식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하기 힘든 것이었다.

논리적 원자론(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

분석철학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단계는 러셀이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1918~19) 시작되었다.

여기서 그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빚지고 있음을 밝혔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러셀과 함께 연구한 적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도 논리적 원자론을 표방했으며, 분석철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또 이 저서는 매우 심오하고 난해해 그 해석을 둘러싸고 광범위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러셀이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이유를 알아보면, '논리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러셀은 이를 기호논리학의 도움으로 분석을 통해 언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명료하게 밝혀낼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언어가 기술하는 세계의 근본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려 했다.

그리고 '원자론'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자신과 비트겐슈타인의 분석 결과물이 입자적 성격을 가짐을 부각시키려 했다. 언어의 수준에서 '원자'는 세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진술인 원자명제이며, 언어가 말해지는 수준에서 '원자'는 원자명제로 표현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원자사실이다. 분자명제라고 불리는 더 복잡한 명제도 '또는', '그리고', '아니다'와 같은 논리적 연결사를 통해 원자명제들로 구성할 수 있다.

분자명제의 진리값은 그 구성요소인 원자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러셀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원자론은 형이상학적이면서 동시에 반형이상학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는 그 자체가 하나의 형이상학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기 이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경험론의 역사에 있어서 특이한 성격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이와 같은 역설을 해결하는 길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단지 보여질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다.

〈논리철학 논고〉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형이상학이 정합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논리실증주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는 고도로 함축적인 형이상학을 포함하고 있지만 분석철학자들이 반형이상학적인 태도를 갖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빈 학파로 알려진 이들의 사상이 바로 논리실증주의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무엇보다도 반(反)형이상학적이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경험과학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에 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세계에 관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이론이 실제로는 형이상학적임을 밝혀주면서 그와 같은 이론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줄 방법을 찾고자 했는데, 이것이 '검증원리'이다.

검증원리에 따르면 세계에 관한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의 참·거짓을 검증하는 방법에 의해 부여된다. 이때 허용할 수 있는 방법은 궁극적으로 관찰과 실험의 방법이다. 한편 검증원리에 따르면 어떤 명제가 세계에 관한 명제가 되려면 반드시 그 검증방법이 있어야 한다. 검증원리의 소극적 측면은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무기이자 과학을 세계에 관한 유일한 인식원천으로 신뢰하게 하는 무기가 되었다.

후기 분석철학의 역사

후기 비트겐슈타인

1936년부터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939년 무어의 후임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는데 그때의 견해는 전기와 크게 달랐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더이상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말놀이'와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언어를 새롭게 조명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놀이(게임)와 마찬가지로 어떤 규칙에 의해 작동하며, 언어행위가 이러한 규칙에 따르는 행위라는 사실은 '사적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성격은 사용자인 인간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의 연관 속에서 규정된다.

영국과 미국의 흐름

비트겐슈타인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은 주로 전통적 철학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특수개념들을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후 저서의 출판 편집장이자 〈지향 Intention〉(1957)의 저자인 G. E. M. 앤스쿰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하려고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지향과 행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영국의 이와 같은 연구는 미국에도 영향을 주어,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인 코넬대학교의 노먼 맬컴은 인식·확실성·기억·꿈 등의 개념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옥스퍼드대학교는 철학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 철학자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주의자라고 부르기 힘들다. 이들 철학자가 갖고 있는 방법의 특징은 한마디로 '일상언어에 대한 호소'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보통 '일상언어학파'라 불린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철학교수 W.V.O. 콰인은 논리적 원자론과 논리실증주의에서 뚜렷하게 벗어났다.

우선 그는 해당 언어의 의미에 따라 진위가 결정되는 분석명제와 경험적·관찰적 사실에 따라 진위가 결정되는 종합명제를 구별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구별은 논리실증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부분의 경험론자들에게는 연역과학과 경험과학을 구분하는 기초로 생각되었다. 콰인은 〈경험론의 2가지 독단 Two Dogmas of Empiricism〉(1951) 등의 저술에서 두 명제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논증했다.

콰인의 공격은 분석철학 전통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핵심적 논제와 분석철학이 주로 경험과학과의 대비를 통해 제시한 철학관에 대해서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언어학과 분석철학 사이에 상호교류가 활발해졌다. 이런 상호교류는 분석철학자들이 항상 언어에 대한 연구를 개별언어에 대한 경험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엄 촘스키의 〈통사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는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문법이론을 제시했다. 언어학자와 철학자의 교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분석철학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무어와 러셀에서 유래하는 2가지 관점이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