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게

프레게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요약 테이블
출생 1848. 11. 8,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비스마르
사망 1925. 7. 26, 독일 바트 클라이넨
국적 독일

요약 프레게는 근대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철학과 수학의 경계선(수학의 철학과 수학논리)을 연구하여 근대 논리학 전체를 발달시킨 기초개념을 알아냈다.
예나대학교와 괴팅겐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 화학, 철학을 공부한 후 예나대학교에서 논리체계를 비롯한 수학의 모든 분야를 강의했다. 1879년 <개념기호법>을 출판하여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수학논리체계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철학자나 수학자들이 그의 연구를 명백히 이해하지 못했고, 수십 년 뒤 페아노, 러셀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논리학과 수학의 철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한 뒤 이를 <산술기초개념>(1884)에서 설명했다. 철학저서의 걸작이었음에도 동료 학자들의 인정은 얻지 못했다. 1893년에 펴낸 <연산의 기본법칙> 제1권에서 <개념기호법>의 기호체계를 수정해 <산술기초개념>의 이론을 명확하게 발전시켰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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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수학논리체계
  3. 프레게 이론의 모순
  4. 프레게 연구의 영향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개요

근대 수학논리의 기초를 세웠다.

철학과 수학의 경계선(수학의 철학과 수학논리)을 연구하여 근대 논리학 전체를 발달시킨 기초개념을 혼자서 알아냈고 그것으로 한 분야 전체를 창조했다.

프레게는 비스마르의 여자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알렉산더 프레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아우구스테 프레게는 결혼 전 성이 비알로블로츠키로 폴란드 태생인 듯하며 1866년에 남편이 죽자 홀로 살았다. 프레게는 1869년 예나대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은 괴팅겐대학교에서 수학·물리·화학·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전생애 중 일하는 시기를 모두 예나대학교에서 수학교사로 보냈다. 1871년 5월에 무급 대학강사, 1879년 7월에 조교수, 1896년 5월에 수학 법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논리체계를 비롯해 수학의 모든 분야를 강의했다(논리학 외의 수학분야는 출판물이 거의 없음). 그러나 그의 많은 출판물은 철학적 표현이 특징이다. 그는 "훌륭한 모든 수학자는 적어도 반은 철학자이고, 훌륭한 모든 철학자는 적어도 반은 수학자다"라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관심했으며 동료들에게는 더욱 무관심했다.

그의 아내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죽었고 자식은 없었으나 알프레드라는 공학도가 된 양자가 있었다.

프레게는 종교에서는 자유주의 루터파이며 정치에서는 반동주의자였다. 그는 군주제와 메클렌부르크 왕가에 애착을 가졌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감정적인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전쟁의 패배와 바르사유 조약의 수치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탓으로 돌렸다. 생애 말기의 일기에서 프랑스인과 로마가톨릭에 대한 강한 혐오와 유대인을 독일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발전한 반(反)유대주의가 나타나있다. 프레게는 자신의 비범한 재능이 언젠가는 인정받을 거라는 신념이 매우 컸으나, 그의 일생 동안 학자들이 이를 알아주지 못해 괴로워했다.

논쟁과 반론을 좋아했으며, 그의 연구는 과거나 그당시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았고 독창성이 매우 뛰어나 놀랄 만했다.

수학논리체계

1879년 프레게는 〈개념기호법 Begriffsschrift〉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 처음 근대적 의미의 수학논리체계가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에는 철학자나 수학자 중 그 누구도 프레게가 한 일을 명백히 이해하지 못했다. 수십 년 뒤 이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을 때 개념의 대부분은 페아노 같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통해 여과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일생 동안 러셀 외에는 그에게 명예를 돌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개념기호법〉은 낯선 개념을 복잡하고 낯선 기호를 사용해 표현했으며 독자에게 실망을 주어 학문세계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으나 낙담하지 않았고, 다음에 출판한 책에서는 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논리학과 수학의 철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한 뒤 이를 〈산술기초개념 Die Grundlagen der Arithmetik〉(1884)에서 설명했다. 이 책은 철학저서의 걸작임에 틀림없으나 칸토어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칸토어는 프레게와 가장 가까운 개념을 가진 수학자였으나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섣불리 비난했다. 프레게는 2번째 책의 출판 기념회에서 큰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10년간 연구해 훌륭한 철학논문을 썼고 이 논문에 그의 논리철학을 자세히 설명했다. 프레게가 자신의 이론에 체계를 이루어나갈수록 스콜라 철학에 대한 경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논문들에는 깊은 통찰력이 담겨졌다. 그뒤 수리철학으로 돌아와 〈연산의 기본법칙 Grundgesetze der Arithmetik〉(1893) 제1권을 썼으며 이 책에서 〈개념기호법〉의 기호체계를 수정해 〈산술기초개념〉의 이론을 명확하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것 역시 페아노의 비판을 받았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책이 무시당하자 화가 난 프레게는 이 책 서문에서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프레게 이론의 모순

그러나 무시보다도 더 나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본법칙〉 2권이 출판되고 있는 동안인 1902년 6월 16일에 그의 논문을 읽고 격려해온 극히 적은 동료 중 하나인 러셀로부터 편지 1통을 받았다. 러셀은 겸손히, 그러나 정확하게 프레게 논리체계에서 모순이 일어날 가능성(유명한 러셀 패러독스)을 지적했다. 둘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책이 출판되기 전에 프레게는 논리의 일관성을 위해 공리 중 하나를 수정하고 이것을 부록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프레게가 죽은 뒤 폴란드의 논리학자 레시니에프스키가 프레게의 수정된 공리도 여전히 모순을 일으킨다고 공박했다.

아마 프레게는 이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제1권에 있는 정리들의 증명을 조금만 보아도 여러 증명이 옳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고 프레게는 이를 발견했어야 했다.

1903년 프레게의 창작 생활은 끝이 났다. 그는 〈기본법칙〉 제3권을 출판하지 못했고 그가 창설한 수리논리학 발전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전쟁 뒤에 논리철학에 대한 3편의 수필이 전쟁 뒤에 출판한 이후 더이상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다. 1912년 러셀의 케임브리지 수학회의 강연 초청을 의기소침하여 거절했다.

프레게는 말년에 다시 수학철학 연구를 시작했고 논리연산을 세우려고 시도했던 앞의 연구 중 기초개념의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이 연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고 출판되지 못했다.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매년 여름마다 고향 메클렌부르크로 도보여행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마침내 은퇴하고 메클렌부르크에 있는 바트클라이넨으로 가서 살았다.

프레게 연구의 영향

프레게의 연구는 양화기호와 변항 표기의 창안으로 근대 논리학의 시초가 되었다(보통의 언어에서는 술어의 논술위치에 '모든 것'이나 '어떤 것' 같은 표현을 넣어 일반성을 표현하지만 프레게 이래 논리학에서는 논술위치에 변항 'x'를 넣고 양화기호 '모든 x에 대해'나 '어떤 x에 대해'를 접두사로 가진, 변항 x를 '구속'하는 표현이 따름). 이 표현을 이용해 그는 중세 논리학자들을 좌절시켜 논리학의 진전을 막아온 문제, 즉 다각적 일반성을 띤 문장 해석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또 처음으로 논리법칙들의 형식적인 규정화와 그것들의 의미론적 정당성을 명백히 구별했다.

그의 철학연구의 중요성은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연구만큼 심오한 변혁에 해당된다. 데카르트는 인식론을 모든 철학의 출발점으로 한 반면, 프레게는 이것을 의미론이나 언어철학에 두었다.

그는 나머지 모든 것에 기초가 되는 철학의 제한 부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영향력은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1914년에 그를 방문했고 그를 공경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오스틴이 〈산술기초개념〉을 영어로 번역한 이래 영어권 철학자들 사이에 프레게의 저서는 직접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 프레게가 어떤 주제에 대해 결정적·결론적인 말을 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언어철학의 모든 연구에서 프레게의 견해가 적어도 가장 훌륭한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