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 레시니예프스키

스타니슬라프 레시니예프스키

다른 표기 언어 레시니에프스키 , Stanisław Leśniewski
요약 테이블
출생 1886. 3. 30, 러시아 세르푸호프
사망 1939. 5. 13, 바르샤바
국적 폴란드

요약 폴란드의 논리학자·수학자.

바르샤바 논리학파의 공동창시자이자 대표자이다.

아버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과 감독을 맡았던 민간 기술자였다.

러시아에서 교육받고 시베리아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뒤 당시 관례대로 유럽 대륙의 여러 대학을 다녔으며, 1912년 당시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던 폴란드 르비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논문은 현대 폴란드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시미에슈 트바르도프스키에게 인정을 받았다. 트바르도프스키는 폴란드 지성계에 폭넓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현상학의 창시자 에트문트 후설과 같이 빈에서 프란츠 브렌타노의 제자로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스콜라주의 철학자였던 브렌타노는 형식논리학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철학문제를 정확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승 트바르도프스키의 영향을 받으면서 레시니에프스키가 처음 학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과 후설 그리고 다른 오스트리아 학파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논리철학의 문제들이었다. 191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도 존재명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지적 활동은 3시기로 나뉜다.

첫번째 시기는 박사학위논문을 쓴 때부터 비주연 집합(非周延集合 collective sets) 이론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 나온 1916년까지이다. 그는 자신이 학자로서 소명의식을 갖게 된 것은 얀 우카시에비치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했다. 레시니에프스키와 마찬가지로 트바르도프스키의 제자였던 우카시에비치는 당시 르비우대학교의 사강사(私講師)로 있었다. 이미 논리학사에 정통해 있었고 뒷날 그 분야에 탁월한 공헌을 한 우카시에비치는 당시 독일의 논리학자들인 고틀로프 프레게와 에른스트 슈뢰더의 저작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주로 이 저작의 중요성을 폴란드 논리학계에 알리고 수리논리학의 기초과정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 레시니에프스키를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바로 우카시에비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관하여 O Zasadzie Sprzeczności u Arystotelesa〉(1910)였다. 이때부터 레시니에프스키는 논리학과 수학에서 모든 연역적 학문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이율배반 또는 역설을 발견함으로써 제기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레게와 버트런드 러셀이 씨름하고 있던 이율배반의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마침내 위대한 발견으로 이어졌고, 그는 이 발견으로 유명해졌다.

레시니에프스키가 논리학을 위해서 철학에 등을 돌린 것은 분명하지만(그는 뒷날 자신을 철학의 배신자라고 말함) 수리논리학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논리학의 전문적·형식적 표기법, 일상언어와의 관계에 대한 주의 부족, 집합·함축·참 등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할 때 생기는 다의성(多義性)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러셀의 작업 속에 들어 있는 다의성들을 없애려고 하면서 그는 곧 수리논리학의 형식·인공 언어가 자신의 일에 필수적이고 일상언어는 지나치게 서투르고 부정확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저작들은 그가 수리논리학의 엄격한 방법들을 채택하기 전에 쓴 것으로 나중에 그는 이 책들을 모두 거부했다.

1916~27년은 2번째 시기로 집중적이고 창조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양의 연구성과를 거두었지만 발표는 미루었다. 1915년 다시 문을 연 바르샤바대학교는 르비우대학교에 있던 우카시에비치를 철학교수로 초빙했다. 레시니에프스키는 바르샤바 김나지움에서 2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고 모스크바에서 전시(戰時)를 보낸 다음, 1919년 친구이자 동료인 우카시에비치를 따라 바르샤바대학교 수리철학교수로 부임했다. 그들은 곧바로 연구 센터를 설립했고, 이 센터는 각 분야의 재능있는 학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마침내 레시니에프스키는 3번째 시기에 바라던 만큼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자신의 독창적 탐구성과 가운데 몇 가지를 발표하게 되었다.

1927년 수학의 기초에 관한 저작을 출간한 이래 1939년 죽을 때까지 논리학과 수학에 관한 자기 이론의 핵심경향을 설명하는 일련의 논문을 출간했다. 이 발간물들은 바르샤바 논리학파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유명세가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 시기에 갑자기 죽었다. 그날은 뜻밖에도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으로 잠시나마 바르샤바 학파를 조국 폴란드와 똑같은 운명 속에 빠뜨렸다.

레시니에프스키의 많은 연구성과는 죽을 때까지 발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의 원고는 모두 전쟁으로 없어졌지만 발표되지 않은 연구결과들은 제자들, 특히 볼레수아프 소보친스키와 알프레트 타르스키의 작업을 통해 알려졌다.

레시니에프스키의 업적

레시니에프스키가 논리학 분야에 남긴 특유의 독창적인 공헌은 서로 연관된 3가지 논리체계를 구성한 점이다. 그는 이 각각의 체계마다 그리스어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 원리론·존재론·부분전체론이라 불렀다. 전체이론의 논리적 기초와 그 이름은 원리론(protothetic:prōtos는 '첫번째'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제시된다.

원리론은 지금까지 명제 사이의 관계를 다룬 이론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이론이다. 다른 두 체계는 주연적 집합과 비주연적 집합 사이의 구분(레시니에프스키에 따르면 러셀은 이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율배반의 어려움에 빠졌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연적으로 사용될 경우 집합표현은 일반 이름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폴란드인의 집합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사람의 폴란드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존재론(ontology:on은 '존재'를 뜻하는 그리스어)은 이름들의 논리학이며, 원리론과 결합해 집합논리와 관계논리의 정리(定理)뿐만 아니라 삼단논법(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정리와 논리적 대수의 정리도 만들어낸다. 부분전체론(mereology:meros는 '부분'을 뜻하는 그리스어)은 부분들에 의해 물리적으로 구성되는 듯이 보이는 전체의 논리학이다. 예를 들어 시카고에 있는 모든 자동차의 집합은 그 자동차들의 '전체모임'이듯이 이것은 비주연적 집합에 관한 논리학이다.

따라서 부분전체론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일반이론이다. 이러한 이론들을 발전시키면서 그는 이 이론들의 메타 논리학을 진술하는 데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를 위해 의미론적 범주들에 대한 일반이론을 세웠다. 이 일반이론은 담화를 이루는 부분들에 대한 전통학설 및 후설의 '의미범주들'과 비슷하다.

레시니에프스키는 수학적 엄밀성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한 명료하고 정확한 체계들을 발전시켰다. 이 체계들은 모든 고전수학에 논리적 기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며 자신의 주장처럼 이율배반의 문제를 다른 어떤 해결책보다도 더 올바르게 극복했다. 그는 현대 수학자와 논리학자가 사물의 존재방식에 관한 인간의 소박하고 기본적인 직관을 경멸하지는 않더라도 흔히 지나치게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제자였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타르스키는 레시니에프스키의 관점을 '직관적 형식주의'라고 규정했다. 레시니에프스키는 논리학과 수학이 '기호들의 게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수형식주의를 공공연히 비판했다. 그가 엄밀성과 정확성 때문에 형식주의 방법을 옹호하고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론이란 궁극적으로는 실재와의 일치 여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논리체계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정도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하면서 서로 상충하기도 하는 철학적 해석들에 똑같이 잘 들어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