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

에드문트 후설

다른 표기 언어 Edmund Husserl
요약 테이블
출생 1859. 4. 8, 오스트리아령(지금의 체크 프로스테요프) 모라비아 프로스니츠
사망 1938. 4. 27, 독일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국적 독일

요약 의식의 분석과 기술을 통해 엄격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얻기 위한 방법인 현상학을 창시했다. 이 방법은 체험생활의 구조와 관심 속에서 모든 철학 체계와 과학 체계가 생겨나고 이론이 발달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관찰을 강조하는 경험론과 이성·이론을 강조하는 합리론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에드문트 후설은 평생을 현상학 연구에 몰두했는데, 외국에서도 현상학에 대한 후설의 기여를 인정했다. 후설이 은퇴한 뒤, 철학자이며 지도적 실존주의자로 성장한 마르틴 하이데거가 후설의 후임자가 되었다. 후설은 하이데거를 자신의 적절한 계승자로 생각했다. 얼마 안 되어 후설은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1927)이 현상학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의 관계는 1930년 이후 냉각되고 말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및 교육
  3. 할레대학교 강사시절
  4. 교수로서 후설의 영향
  5. 보편학으로서 현상학
  6. 현상학과 정신생활의 재건
  7. 말년
후설(Edmund Husserl)
후설(Edmund Husserl)

개요

에드문트 후설은 의식의 분석과 기술을 통해 엄격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얻기 위한 방법인 현상학을 창시했다.

이 방법은 체험생활의 구조와 관심 속에서 모든 철학 체계와 과학 체계가 생겨나고 이론이 발달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관찰을 강조하는 경험론과 이성·이론을 강조하는 합리론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초기생애 및 교육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에드문트 후설은 올뮈츠 주교시에 있는 독일의 공립 김나지움에서 1876년 6월 30일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른 뒤 라이프치히·베를린·빈 대학교 등에서 물리학·수학·천문학·철학 등을 배웠다.

에드문트 후설은 1882년 11월 22일 빈대학교에서 〈변수 계산 이론에 관하여 Beiträge zur Theorie der Variations-rechnung〉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수학자이며 산술 분석으로 유명한 스승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의 조교로 베를린대학교에서 일한 뒤, 1883년 가을 후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에게 배우기 위해 빈대학교로 돌아왔다.

가톨릭 사제였던 브렌타노는 교황의 무오류성이 독단이라는 글을 발표한 일로 교회를 떠난 후, 빈대학교에서 철학교수로 일했다. 1874년에 브렌타노의 주저 〈경험적 관점에서 본 심리학 Psychologie vom empirischen Standpunkte〉이 나왔다. 과학적·심리물리적 경향으로만 치우친 심리학에 대한 브렌타노의 비판과 새로운 기술적 심리학에 철학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에드문트 후설은 브렌타노와 그를 따르는 학생 집단(그중에는 뒤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토마슈 마사릭도 있었음)으로부터 결정적인 자극을 받았다.

이 집단 속에는 18세기 말엽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의 계몽주의 정신과 이 계몽주의의 종교적 관용과 이성적 철학에 대한 탐구 정신이 생생하게 넘쳐흐르고 있었다. 더욱 엄격한 이성적 기초를 얻으려는 에드문트 후설의 노력은 이 집단 속에서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후설에게는 처음부터 그러한 기초가 이론적 행위를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자율적인 윤리로서 책임이라는 도덕적 의미도 지녔다.

훗날 에드문트 후설은 이때 생각이 명료해지지 않으면 앓아눕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후설의 친구들은 이미 그가 독창적 사상을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빈에서 에드문트 후설은 복음주의 루터교로 개종했으며, 1년 뒤인 1887년 프로스니츠 출신 중등학교 교수의 딸인 말비네 슈타인슈나이더와 결혼했다. 정력적이고 다재다능한 아내는 후설이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모든 일상사에 없어서는 안 될 내조자였다. 그들은 결혼 생활을 통해 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딸 엘리자베트는 네덜란드 미술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유명한 야코프 로젠버그와 결혼했다.

로젠버그는 카이저-프리드리히 박물관의 관리자로 일했으며 나중에 하버드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둘째 아들인 게르하르트는 법률가이자 법학교수로 성장했으며, 막내 아들 볼프강은 제1차 세계대전중에 전사했다.

할레대학교 강사시절

1886년 에드문트 후설은 브렌타노의 추천장을 가지고 그의 제자들 중 가장 연장자이자 할레대학교 철학·심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자신의 심리학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던 카를 슈툼프에게 갔다.

에드문트 후설은 그곳에서 1887년 7월 26일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슈툼프와 가까운 친구가 된 후설은 그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기술적 개념들을 형성하는 데 많은 암시를 받았다. 후설의 교수자격 논문 〈수 개념에 관하여 : 심리학적 분석 Uber den Begriff der Zahl : Psychologische Analysen〉의 제목만 보아도 이미 후설이 수학 연구에서 수학의 기본 개념들의 심리학적 원천에 관한 반성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드문트 후설은 이 연구 논문을 초안으로 삼아 1891년에 〈산술의 철학 : 심리학적·논리적 연구 Philosophie der Arithmetik : Psychologische und logische Untersuchungen〉 제1권을 출간했다. 후설이 할레대학교에서 강연한 교수 취임 공개 강의의 제목은 〈형이상학의 목표와 과제에 관하여 Über die Ziele und Aufgaben der Metaphysik〉였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존재에 관한 연구이다. 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후설은 자신의 의식분석방법이야말로 이전의 모든 형이상학 도식을 잠재울 새로운 보편철학과 형이상학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할레대학교에서 가르친(1887~1901) 때가 가장 곤혹스러운 시절이었다고 에드문트 후설은 나중에 실토했다.

에드문트 후설은 자주 철학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했으며, 이 직업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식의 심리학적 분석과 형식적 수학·논리학의 철학적 기초 작업을 결합하는 일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속에서 논리학과 수학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은 모든 형식적 사고에 앞서 있는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는 통찰이 떠올랐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는 영국의 경험론자(로크, 버클리, 흄, J. S. 밀 등)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이 전통에서 나온 논리학과 의미론, 특히 의 논리학과 그때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논리학의 '심리-논리적' 기초 마련 작업을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이 열매를 맺어 나온 저서가 바로 에드문트 후설이 '현상학적'이라고 이름붙인 분석방법을 사용한 〈논리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1900~01)이다. 이 작품이 갖는 혁명적 의미는 아주 서서히 인정받았는데, 그 이유는 〈논리 연구〉가 취한 방법이 당시 유명한 어떤 철학 흐름에도 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러셀은 〈논리 연구〉를 돌이켜보면서 이 책이 현대 철학 시대의 기념비적 작품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교수로서 후설의 영향

〈논리 연구〉를 출판한 뒤, 에드문트 후설은 형식주의 수학자인 다비트 힐베르트의 권유로 괴팅겐대학교의 부교수가 되었다.

에드문트 후설이 괴팅겐대학교에서 가르친 시기(1901~16)는 현상학운동이 일어난 때로,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고 많은 방향으로 가지쳐 나간 한 학파가 형성된 기간이었다. 경험이 의식에 직접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경험의 실제성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당시 독일에 유행하던 신칸트주의에 만족하지 않은 독일 학생들뿐만 아니라, 경험론과 실용주의의 전통 속에 있던 다른 나라의 많은 젊은 철학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한때 에드문트 후설의 세미나에는 12개국의 학생들이 모여든 적도 있었다. 1905년경부터 후설의 제자들은 똑같은 생활양식과 연구방식을 가진 집단을 형성했다. 선생님과의 친밀한 인간적 유대 관계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후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며, 자주 후설과 함께 산책하면서 사색하기도 했다. 그들은 현상학이 정신생활을 개혁하는 길이라고 이해했다.

이 집단은 세기의 전환기인 빌헬름 시대에 나타난 천박한 생활을 거부하고, 독일 청년 운동의 많은 특성을 공유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도 스승의 모든 말에 맹종하는 학파는 아니었다. 에드문트 후설은 제자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착상들을 추구해나가도록 했다. 후설은 자신의 가르침이 완성된 결론의 전수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는 문제제기를 위한 예비작업이기를 원했다. 따라서 후설은 현상학을 다가오는 세대들이 계속 작업해야 할 분야로 이해했으며, 자신의 역할은 '시작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에드문트 후설의 이러한 자유로운 가르침으로 비추어볼 때, 현상학이 곧 많은 방향으로 가지쳐나가고 급속히 국제적으로 퍼진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후설은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방식을 개발했다. 후설의 모든 사상은 글을 쓸 때, 즉 그의 사고가 움직이는 순간에 떠올랐다. 후설은 일생 동안 가벨베르거 속기체로 쓴 4만장 이상의 수고를 남겼다.

당시 예나대학교의 사강사(Privatdozent)로 있던 막스 셸러가 에드문트 후설과 접촉하던 시기(1910~11)는 후설이 아직 괴팅겐대학교에 있을 때였다.

나중에 중요한 현상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셸러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사변적 형이상학에 몰두했다. 이런 사실과 몇 가지 개인적 이유로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말았다. 인간 과학의 선구적 이론가인 빌헬름 딜타이와의 교분도 괴팅겐 시절에 이루어졌다. 딜타이는 〈논리 연구〉의 출판을 인간 과학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새로운 촉진제로 생각했다.

에드문트 후설 스스로도 딜타이와의 만남 덕분에 모든 과학의 근원인 역사적 삶으로 주의를 돌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모든 인식 이론의 기초를 정립하는 '역사'의 차원이 자신에게 열렸다고 인정했다.

보편학으로서 현상학

괴팅겐 시절에 에드문트 후설은 현상학을 보편적인 철학적 학문으로 기획했다.

이 현상학의 방법론적 기본원리는 에드문트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른 것이다. 현상학적 환원은 해석되지 않은 원초적 경험과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철학자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런 의미의 환원을 '형상적'(eidetic) 환원이라고 한다. 한편 현상학적 환원은 본질을 의식하는 기능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원은 자아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경험론과 합리론에 대한 칸트의 중재를 현대적인 방법으로 되풀이하고 개선한 새로운 양식의 선험 철학이라는 성격을 띤다.

에드문트 후설은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1913)에서 선험 철학의 계획과 그 체계적 개요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후설은 이 저서의 첫번째 부분만 완성할 수 있었으며, 2번째 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마무리지을 수 없었다. 후설은 제자들에게 입문서를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후설이 선험 철학으로 전환하는 것을 낡은 사고 체계로 되돌아간 중대한 착오로 여기고 이 체계를 거부했다.

이러한 전환과 전쟁 때문에 현상학 학파는 흩어지고 말았다.

에드문트 후설은 제자들에게서 받은 존경과는 대조적으로, 괴팅겐대학교의 동료 교수들 사이에서는 항상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는 했다. 1906년의 정교수 임명도 교수진의 뜻에 맞서 교육장관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인문 과학부를 대표하는 교수들은 주로 문헌학·역사학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철학의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자연과학자들은 철학 교수진의 분할과 함께 신설된 자연과학부로 에드문트 후설이 옮겨오지 않은 데 실망했다.

현상학과 정신생활의 재건

1916년 에드문트 후설이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정교수로 초청된 것은 모든 면에서 그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교수 취임 공개 강의인 〈순수 현상학, 그 탐구 영역과 방법 Die reine Phänomenologie, ihr Forschungsgebiet und ihre Methode〉은 자신의 작업 계획을 밝힌 것이었다. 에드문트 후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정신문화·과학·철학이 의심할 여지 없는 지위를 고수하고 있던 구시대 유럽 세계의 붕괴로 이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설은 자신이 이전에 현상학을 위해 제공한 인식론적 기초 정립으로는 더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그뒤 후설의 생각은 삶의 재건에서 철학의 임무를 특별히 강조하는 쪽으로 향했다.

이런 의미로 에드문트 후설은 〈제일 철학 Erste Philosophie〉(1923~24)에 관한 강의에서, 현상학은 그 환원 방법을 가지고 삶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길, 즉 인간의 윤리적 자율성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명제를 발표했다. 이 명제를 기초로 후설은 의식의 현상학적·심리학적 분석 사이의 관계를 해명해나갔으며, 논리학의 기초도 연구했다. 그결과 〈형식 논리학과 선험 논리학 : 논리적 이성의 비판을 위한 시론 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 Versuch einer Kritik der logischen Vernunft〉(1929)이 나왔다.

에드문트 후설의 생애 말기인 이 시기에 그의 가르침은 괴팅겐 시절과는 방식이 달랐다.

에드문트 후설은 새로운 학파를 주도적으로 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후설의 사고와 가르침은 점점 더 독백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후설의 강의를 듣거나 세미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한 후설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사람에게 후설의 지성은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다. 후설의 세미나에는 언제나 많은 외국인이 참석했다. 논리 실증주의를 창안한 '빈 서클'의 주도적 인물인 루돌프 카르나프도 한때 후설 밑에서 연구했다.

에드문트 후설에 대한 외국에서의 인정도 계속되었다. 1919년 본대학교 법학부는 후설에게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후설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런던대학교에 초청되어 강연한 최초의 독일인 학자였다(1922). 명예롭게도 베를린대학교가 에른스트 트뢸치의 후임으로 후설을 초빙했지만 오로지 현상학에만 자신의 정력을 쏟기 위해 거절하기도 했다.

에드문트 후설은 암스테르담대학교와 소르본대학교(1930)에 초청받아 강연했다. 이 강연들은 현상학의 새로운 체계적 제시를 준비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며, 그결과 〈데카르트적 성찰 Méditations cartèsiennes〉(1931)이라는 제목의 프랑스어판 저술이 나왔다.

에드문트 후설이 1928년 은퇴하자 뒤에 철학자이며 지도적 실존주의자로 성장한 마르틴 하이데거가 후설의 후임자가 되었다.

에드문트 후설은 하이데거를 자신의 적절한 계승자로 생각했다. 얼마 안 되어 후설은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1927)이 현상학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의 관계는 1930년 이후 냉각되고 말았다.

말년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도 에드문트 후설의 연구 의욕을 꺽지 못했다.

오히려 에드문트 후설은 이러한 대격변의 경험을 정신 자유의 보존이라는 현상학의 임무에 더욱 집중하는 기회로 삼았다. 대학에서 추방당했지만, 후설의 개인 연구 조교였던 오이겐 핑크와 날마다 함께 한 철학적 산책, 저항 운동 단체와 'Denominational Church'에 가입한 몇 안 되는 동료들과의 우정, 다른 나라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수많은 방문 등은 후설의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독일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후설은 1935년 봄에 '빈 문화 협회'의 초청 연설을 수락했다.

그곳에서 에드문트 후설은 2시간 30분 동안 〈유럽 인류의 위기 속에서 철학 Die Philosophie in der Krisis der #128päischen Menschheit〉에 관해 자유롭게 연설했으며, 2일 뒤 그 강연을 되풀이했다.

이 시기에 '프라하 철학회'가 에드문트 후설의 조교이자 프라하의 독일대학교에서 강사(Dozent)로 있는 루트비히 란트그레베에게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를 주선함으로써, 후설의 미간행 수고들을 옮겨 쓰고 분류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철학회의 초청으로 후설은 1935년말에 프라하의 독일대학교와 체코슬로바키아대학교에서 강연했으며, 그뒤에도 많은 소규모 학회의 토론에 응했다.

이처럼 이미 히틀러의 위협을 받고 있던 곳에서 자유로운 철학의 목소리가 에드문트 후설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울려퍼졌다. 그 시대의 모든 혼란 위에 우뚝 선 후설의 절대적 자주성이 청중들의 마음을 압도했다. 이 강연들을 바탕으로 후설의 마지막 저서인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 현상학적 철학 입문 Die Krisis der #128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 Eine Einleit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1936)이 나왔다.

이 책은 제1부만 이민자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에 실릴 수 있었다. 이 잡지는 1937년 여름호까지 이 저술의 연재에만 전적으로 지면을 할애했는데, 여기에서 에드문트 후설은 '생활 세계'라는 자신의 개념을 최초로 전개했다.

1937년 여름부터 에드문트 후설은 병 때문에 더이상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38년초부터 후설은 자신에게 닥친 유일한 과제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철학자로서 훌륭하게 생을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특정 교회의 신도는 아니었지만, 후설은 마치 자신의 철학이 모든 진정한 경험을 그 자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 것처럼 모든 진정한 종교적 믿음을 존중했다.

에드문트 후설의 절대적인 철학적 자기 책임 개념은 신과의 직접적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의 자유라는 프로테스탄트적 개념과 아주 비슷하다. 사실 후설은 분명히 현상학적 환원을 하나의 방법뿐만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개종으로 주장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죽을 때 "나는 철학자로 살아왔으며, 철학자로 죽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면서 정신적 도움을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 "은혜로운 신이 나를 받아들여 편히 죽게 허락하셨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에드문트 후설은 1938년 4월에 죽었으며 프라이부르크 근처 귄터스탈에 있는 공동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