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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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9. 9. 26, 독일 슈바르츠발트 메스키르히
사망 1976. 5. 26, 메스키르히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철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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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이데거의 초기생애
  2. 하이데거의 중기생애
  3. 하이데거의 후기생애
  4.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꼽히는 독창적인 사상가이며 기술사회 비판가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존재론자였으며 유럽 대륙 문화계의 신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이데거의 초기생애

가톨릭 교회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종교에 관심을 보였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 예수회 수련수도자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과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실제로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술' 심리학의 창시자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 Von der mannigfachen Bedeutung des Seienden nach Aristoteles〉(1862)를 쓴 19세기말의 가톨릭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를 중학교시절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평생 동안 하이데거는 다양하게 쓰이는 '있다'라는 동사의 바탕에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가 깔려 있을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또 일찍이 브렌타노를 연구하면서 그리스인들, 특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사유가 아직 시·철학·과학으로 갈라지기 이전에 이루어진 통찰력 있는 성찰이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그노시스파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게 각별한 영향을 준 인물들은 19~20세기초의 철학자들, 예를 들어 덴마크의 신학사상가 쇠렌 키에르케고르, 실존주의를 세운 디오니소스적 생기론자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자들의 관심을 인문과학과 역사과학으로 돌린 역사 생기론자 빌헬름 딜타이, 현상학의 창시자 에트문트 후설 등 이었다.

20대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나중에 가치론적 칸트주의의 서남학파를 창시한 하인리히 리케르트와 당시에 이미 유명해져 있던 후설과 함께 공부했다. 청년 하이데거의 박사학위 논문(1914)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 연구 속으로 심리학이 침투하는 데 맞선 그의 투쟁(그는 철학적 수준에서 이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음)과 후설의 현상학을 배경으로 씌어졌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나중에 불안·사유·망각·호기심·염려·공포 등에 대해 말하고 쓴 것들은 심리학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또 그가 인간·공공성·타자지향성 등에 대해 말한 것도 사회학·인간학·정치학 따위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존재의 방식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하이데거의 중기생애

하이데거는 1915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3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영국의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에 대한 연구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후설의 동료였기 때문에 전임자인 후설의 정신에 따라 현상학 운동을 더 진척하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종교 쪽으로 기운 이 청년은 자기 나름의 길을 갔고 1927년에는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을 펴내어 독일 철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저작은 매우 읽기 힘든 글이었고 후설과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았지만 즉시 대단한 저작으로 여겨졌다.

놀랄 만큼 어려운 문체였는데도, 이 책은 독일어권 나라들만이 아니라 현상학이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라틴계 나라들에서도 깊이 있고 중요한 저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여러 실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하이데거는 본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책 때문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의 반응은 상당히 차가워서 몇 십 년 동안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시간〉의 목표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이 물음은 더 근본적인 물음, 즉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물음은 명백한 일상생활 뒤에, 따라서 자연과학의 경험적인 문제들 뒤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이 물음을 대개 지나치고 마는데, 그 까닭은 이 물음이 일상생활에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예언자적 소명은 모든 사람이 각자 가장 진지한 태도로 그 물음을 던지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확정적인 대답을 얻으려 했는지 아닌지는 당시 인류가 처한 위기에 비추어볼 때 2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위기는 기술일변도의 발전, 즉 소외 또는 하이데거 사상에서 더 중심이 되는 용어를 쓰면, '매우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낳은 발전으로 말미암아 서양 사상이 겪은 심각한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락상태 또는 비본래성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 방식이다. 타락상태는 실존적·본질적 가능성이지만, 시대와 개인에 따라 그 정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에서는 다소 엄격한 견해가 누그러졌다. 후기 저작에서 그는 '존재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구원받고 따라서 다시 존재에게 다가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과정을 동양이나 서양의 모든 나라들이 아닌 유럽 대륙에 있는 나라에서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다(진정한 실존).

〈존재와 시간〉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의 풍성함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taphysik?〉(1929)라는 짤막한 글에서 전개된 사상과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존재와 시간〉을 출판할 당시 하이데거는 1923년부터 몇 년째 마르부르크대학교의 정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그 직위를 사임하고 1928년 후설의 후임자로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 돌아갔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는 하이데거의 교수 취임 강연이었다. 이 강연은 그가 좋아하는 주제들 중 하나인 (無)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가 후설에게 배운 바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 방식의 비밀을 벗기는 길은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현상학적 방법이다. 하이데거는 이 방법을 따름으로써 인식하는 자로서 인간이 자기와 대면하고 있는 환경 내의 어떤 존재라는 내용을 가진 전래의 주체-객체 관계의 이분법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체-객체 관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가장 심오한 앎은 파이네스타이(phainesthai : 그리스어로 '자신을 보여주다' 또는 '밝은 곳에 있다'라는 뜻)의 문제이다. 하나의 방법으로서 현상학(Phänomenologie)은 이 말에서 파생한 것이다. 어떤 것(etwas)이 밝은 곳에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처럼 개념화를 거친 이후 비로소 등장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한 방편이자 그것의 구원적 효과로 하이데거는 언어학적·해석학적 기법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만의 독일어, 자신만의 그리스어, 자신만의 독특한 어원 설명을 개발했다. 예컨대 그는 '존재'(Sein)로 끝나는 새로운 복합어를 100여 개나 새로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읽으려면, 많은 주요 어휘를 그리스어로 옮긴 다음 자유롭고 때로는 매우 독특한, 그렇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그의 해석과 어원 설명을 고려해야만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은 사물들로부터 벗어나 있으면서(단순히 exist하지 않고 exsist함), 결코 그 사물들에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지만 그것들과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세계 속에 던져져 죽을 때까지 그 속에서 살아간다. 사물들 속에 던져진 채, 사람은 현존(Dasein)하면서 추락하며(Verfall) 사물들 속으로 빠져드는 지점에 처해 있다. 그는 끊임없이 기투(Entwurf)되지만, 주기적으로 또는 언제나 그는 잠시 몰입(Aufgehen in)되는 정도로 사물들 속에 침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사람은 특정한 그 누구도 아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세인'(世人)이라고 부르는 구조가 드러난다. 세인은 동료들을 통해 자신을 재보려는 경향인 인간의 '타자지향성'을 강조하는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앵글로-아메리카 사회학의 비판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인 은유는 가능하면 사회과학의 용어를 피하고 존재론의 용어를 택한다. '세인'의 특징은 잡담과 호기심이다. 잡담의 경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조금도 진정한 인격적 관계에 있지 않거나 이야기되는 내용과 전혀 깊은 관계에 있지 않다.

따라서 잡담은 천박함을 낳는다. 호기심은 진정한 관심도 놀랄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기분전환의 한 형식이다.

그러나 가능성으로서의 진정한 존재와 자유를 드러내게 하는 기능을 가진 기분·불안·두려움 등이 있다. 이것은 자신을 선택하고 자신을 지배할 자유가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간의 관련, 인간 존재의 유한성의 관련은 자신의 죽음과 만날 자유(das Freisein für den Tod), 즉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그 죽음과 지속적인 관련을 맺는 것으로 체험된다.

불안 속에서 모든 존재자는 '무(無)와 무처(無處)'로 빠져들고, 인간은 자신의 실존 속에서 방황하면서 어디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무와 대면한다. 이제 평범하고 명백한 일상성은 모조리 사라져버린다. 사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과 대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경우, '맑은 정신의'(nüchtern) 불안과 그 속에 함축된 죽음과 대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으로 중요하다.

즉 근본적인 것들이 드러난 것이다. 드러난 구조들 중에 기꺼이 행동할 가능성들도 있다("…아는 즐거움[die wissende Heiterkeit]은 영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불안은 사람에게 존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두려움의 어두운 측면과 연루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존재는 빛과 즐거운 일(das Heitere)과 어우러져 있다.

존재는 "자기 마음대로 방침을 정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자신의 (참된) 집에 이르는 것이다. 하이데거 연구자들은 존재와 사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자주 골머리를 앓지만, 분명한 것은 하이데거가 인간 숭배를 거부하고 좀더 큰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려 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하이데거의 후기생애

1930년대초 하이데거의 사상에는 학자들이 '전환'이라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전환을 몇몇 전문가들은 〈존재와 시간〉의 문제에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부인하고 자기가 젊은시절부터 똑같은 질문을 던져왔다고 주장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말년에는 이렇게 주장하기를 점점 더 꺼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길을 넌지시 암시한 적도 없었다. '전환'이 일어났을 무렵, 그는 잠시 동안 제3제국의 문화정책에 관여했는데, 이는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1933년 11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에도 독일 대학들은 심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독일 대학들은 '민족 혁명'을 지지하고 유대인 학자와 학설(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을 제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이던 반나치 과학자가 항의 사직을 하자, 교수진은 만장일치로 하이데거를 후임자로 선출했다.

그의 총장 취임 연설인 〈독일 대학의 자기 확인〉은 나치즘에 대한 긍정으로 널리 공표되었다. 그는 대학생들의 과제를 노력봉사와 군사봉사와 학문봉사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의 권위주의적 교육정책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그 연설은 '하일 히틀러'가 아니라 플라톤의 〈국가 Republic〉에서 인용한 문장, 즉 "위대한 것들이 모두 위험에 빠져 있다"로 끝맺었다.

그 연설은 과학적 전문화에 반대하면서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것을 촉구했으며 '존재자들'(Seiendes : 존재[das Sein]의 대립어) 속에서 자아를 상실할 위험을 경고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분명히 친(親)히틀러적인 발언을 한 경우도 있다. 그는 "지도자 자신이, 그리고 오직 그만이 독일의 실체이고 현재이자 미래이며 법이다"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하이데거는 히틀러주의에는 굴복했지만 나치의 문화정책이나 철학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상당한 압력을 받아서 나치와 결탁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과 친나치 분위기와의 관계는 빠르게 나빠져갔다. 그는 1934년초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하이데거는 히틀러주의란 인류 전체 속에 있던 구조적 질병이 역사적으로 폭발한 것이라면서, 그 독을 없애는 데에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1944년 11월 하이데거는 고별 강의를 했으며, 1945년 점령군은 그가 일체의 공식 강연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조사'를 받았지만, 1933~34년 사이의 히틀러 지지가 심각하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교수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교수 자격은 1959년 사임할 때까지 계속 논란거리였다. 그는 1951~58년에 걸쳐 영향력 있는 정규 강의를 했다. 1933~34년 동안의 그의 처신은 국제 현상학 운동에서 그의 강력한 위치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

현상학적 방법에 대한 하이데거의 특별한 자부심은 엄청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며, 존재에 대한 사유 탐구는 일종의 신앙을 위한 위장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난해한 용어법은 전통적인 접근법을 덮어 신비화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무례한 평가는 하이데거가 쓴 글을 통해 그가 걸었던 길을 제대로 따라가면서 검증하지 않는 한, 하이데거에 대해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대답을 들으라고 요구하는 대신 '질문'을 하라고 요구하고 약을 올린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은유는 그가 거부한대로, 평범한 철학 용어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