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다른 표기 언어 Nationalsozialismus

요약 독일에서 생겨나 히틀러의 독특한 성격을 통하여 구체화된 국가사회주의는 19세기의 과학정신에 의해 보강되었고 콩트 드 고비노 , 리하르트 바그너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같은 19세기 지성인들에 의해 더욱 굳건해졌다. 이들은 북방민족(게르만족)이 다른 모든 민족에 비해 인종적·문화적으로 우수하다는 주장으로 초기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국가사회주의는 보수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급진주의 사이에서 조화를 모색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나쁜 의미에서이지만 철저한 혁명운동이 되었다. 대중운동으로서의 국가사회주의는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사실상 파국을 맞이했고 제3제국의 폐허 위에 분단독일이 생겨났다.

열광적인 민족주의, 대중선동, 독재적 지배 등 이탈리아 파시즘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그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훨씬 더 극단적이었다.

독일에서 생겨나 히틀러의 독특한 성격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독일사).

히틀러(Adolf Hitler)
히틀러(Adolf Hitler)

국가사회주의는 독일 특유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의 일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대제, 오토 폰 비스마르크밑에서 발전된 프로이센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전통은 프로이센 군대의 호전성과 규율을 공사(公私)의 본보기로 삼았는데, 여기에 정치적 낭만주의의 전통이 가미되면서 합리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원칙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본능과 과거를 강조하며 특출한 개인이 모든 보편적 원칙과 규범을 지배할 수도 있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 두 전통은 선악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19세기의 과학정신에 의해 보강되었으며, 콩트 드 고비노, 리하르트 바그너,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같은 19세기 지성인들에 의해 더욱 굳건해졌다.

이들은 북방민족(게르만족)이 다른 모든 민족에 비해 인종적·문화적으로 우수하다는 주장으로 초기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독일 전통의 흐름에 덧붙여 지적되어야 할 것은 히틀러 자신의 지적 관점이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운동, 특히 범게르만 팽창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히틀러의 열광적인 민족주의, 슬라브족에 대한 경멸, 유대인에 대한 혐오 등은 여러 인종이 한데 뒤섞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거리에서 실패한 예술가로 힘들게 살아가던 젊은 시절의 경험에서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그로 인해 특히 하류층에서 일어난 환멸과 빈곤, 좌절이 없었던들 그의 지적 준비만으로 결코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베르사유 조약(1919)은 독일의 참여없이 작성된 것으로서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의 포기를 강요하여 독일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히틀러는 이들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당시 항간에는 1918년 11월 11일의 휴전은 전투중지에 관한 동의일 뿐 무조건 항복의 수락이 아니며 독일의 패전은 베르사유에서 외교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히틀러의 재무장요구와 배신행위에 대한 복수의 선동은 처음부터 군부의 호응을 얻었고, 독일 군부는 평화를 단지 영토확장계획의 일시적인 후퇴로 간주했다.

1923년의 치명적이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은 많은 중산층의 저축을 폐지더미로 만들었고 대중의 소외감과 불만을 가중시켰다. 히틀러는 범게르만적 열망에다 게르만 민족의 사명에 대한 거의 신비적인 광신과 열렬한 사회혁명의 복음을 덧붙였다. 이 복음은 히틀러의 개인적 성서와도 같은 〈나의 투쟁 Mein Kampt〉(1925~27)에 전모가 드러나 있으며, 그는 이 책에서 인종과 선동에 관한 이론 및 실천을 개관하고 있다.

히틀러는 러시아의 볼셰비즘에 대한 보편적인 공포심을 이용해 처음에는 독일에서 그리고 나아가 세계적인 규모로 볼셰비즘에 대항할 동맹세력을 형성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사회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많은 보수세력의 지지를 확보했다.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심리와 대중선동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선동은 대상으로 삼는 대중들 가운데 가장 지적 수준이 낮은 집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성공이라는 기준에 비출 때 내용의 진실성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질적인 적대자들을 하나의 범주로 통합시키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의 천재성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유는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은 적(敵)이 여럿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쉽게 자기들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에게서 이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그는 유대인을 볼셰비즘과 동일시하여 일종의 우주의 악(惡)으로 규정했다. 유대인들은 그 종교 때문이 아니라 인종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에 차별되어야 한다. 국가사회주의는 유대인이 교육적 수준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게르만족과 다르며, 영원히 게르만족에 해롭다고 선언했다.

국가사회주의는 보수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급진주의 사이에서 조화를 모색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로 나쁜 의미에서이지만 철저한 혁명운동이 되었다.

합리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법치주의·기본적 인권 및 국제협력과 평화에 관한 모든 노력을 거부했으며, 그대신 본능과 국가에 대한 개인의 종속, 위로부터 임명된 지도자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복종 들을 강조했다. 또한 개인이나 종족은 원래가 불평등하며, 따라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사회주의는 엄격하고 잔인한 정책들을 추진하여 경쟁상대가 되는 정치적·종교적·사회적 조직들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려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부적격자와 낙오자들을 운동에 끌어들임으로써 부분적으로 계급적 차이를 없애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뮌헨의 한 지하 맥주홀에서 보잘것없이 출발한 나치당을 20년 뒤에는 세계정치를 좌우하는 주도적 정당으로 부상시켰다. 나치당은 1919년에 설립되어 1920년 이후 줄곧 히틀러가 주도했으며, 1933년 집권당이 된 이래 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국가사회주의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1934~39년에는 나치당이 독일 전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대다수의 독일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시기이다. 독일국민은 당파 싸움과 경제적·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무질서한 자유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결단력을 가진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환영했다. 1934년 이후 대규모 공공사업과 갑자기 늘어난 군수공장으로 실업자들이 흡수되면서 끝없이 치솟아가던 실업률이 급격히 떨어졌고, 독일인들은 위대한 독일을 지향한 이 질서정연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대중운동에 휩쓸려들어갔다.

대공황으로부터의 경제회복과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은 국가사회주의가 커다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다. 히틀러는 193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초반까지 외교적인 승리를 거듭하고 주변지역을 점령해감으로써 반대세력을 포함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국가사회주의의 이면에는 대중조작과 강압정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치 정부는 모든 문화·정보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선동을 계속했으며 군중집회와 휘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복을 입은 요원들로 그 절대권력을 내보이려 했다. 선전기구 밑에는 비밀경찰과 집단수용소를 핵심으로 하는 테러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국민의 반유대 감정을 부채질하여 유대인을 공포와 혐오의 상징으로 만들었고 기만적인 선전으로 모든 사회계급의 적으로 내몰았다(→ 반유대주의).

주요 통제기구는 하인리히 히믈러와 그의 선임부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휘하에 통합된 비밀경찰, 보안대 그리고 친위대(SS) 조직 들이었다.

반정부 세력은 철저한 폭력에 의해서, 또는 많은 경우 탄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으로부터 거세되어갔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와 국민의 적으로 몰렸고 종종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밀고자가 되기도 하는 잘 짜여진 감시망 때문에 시민들은 표현과 행동을 매우 조심해야만 했다.

정의는 더이상 목적이 되지 못하고 이른바 국민의 요구와 이익이라고 하는 것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정상적인 사법절차는 무시되고 특별수용소가 세워졌으며, SS는 법을 뛰어넘는 권한을 휘두르며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공산 러시아를 능가하는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무단독재였다.

1938~45년은 국가사회주의가 대외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시기였다.

영토확장은 1938년까지 독일어권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이듬해부터는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들도 나치 경찰국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계획에 따른 논리적인 결과였다. 히틀러는 집권 초기에 장래의 세계지배를 위한 군사력 및 공업력 강화에 주력했고, 외교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듭하면서 신속하게 목표를 성취해갔다.

첫번째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게르만의 후손을 조국으로 결집시키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폴란드와 슬라브 국가들을 정복하여 생존권(Lebensraum) 혹은 대경제권(Grosswirtschaftsraum)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게르만족은 경제자립을 이루며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충분한 터전을 확보한다는 목표였다. 독일인은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는 지배민족으로서 예속민족을 조직, 그 자원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행한 1939~41년의 군사작전이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자 히틀러의 계획은 유럽·서아시아·아프리카를 포함하게 되었고 마침내 전세계적인 지배체제를 꿈꾸게 되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희망은 거의 6년간의 전쟁 끝에 1945년 독일의 패전으로 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의미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되풀이한 것이었다. 즉 전쟁 초기에 독일은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대규모의 대(對)독일연합전선이 만들어졌고, 독일은 무절제한 행위와 욕심 때문에 결국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대중운동으로서의 국가사회주의는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 전에 자살함으로써 사실상 파국을 맞이했고 제3제국의 폐허 위에 분단독일이 생겨났다.

히틀러가 죽은 뒤에도 국가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독일인들이 몇 차례 조직의 재건을 시도한 바 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이미 호의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치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