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론

합리론

다른 표기 언어 rationalism , 合理論

요약 이성을 지식의 중요한 근원 및 검증 수단으로 보는 철학 견해.

합리론자들은 실재 자체가 논리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식은 감각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에 맞서 이성이 감각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합리론은 경험론과 모든 비합리주의에 대립한다.

합리론의 모든 유형에서 공통된 점은 다음과 같은 신념이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조직된 하나의 전체이며, 세계의 구성부분들은 논리적 필연성으로 연계되어 있어서 인식할 수 있다. 결국 합리론자들에 의하면 논리학·수학 등의 지식은 정신이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식이다. 이러한 선천적 지식은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연적·보편적이다. 인간 정신이 경험에 생득적인 범주와 형식을 부여한다고 한 비판철학은 인식론적 합리론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윤리학에서 합리론은 감각·권위·관습보다는 이성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장소라고 주장한다. 이성적 윤리를 대변한 유명한 인물인 이마누엘 칸트는 어떤 행동에 대한 판단방법은 그것의 자기통일성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따르면 그 방법은 우선 그 행동이 본질적 또는 원칙적으로 무엇인가를 검토한 뒤 인간이 그 원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뜻을 일관되게 가질 수 있느냐를 물어보는 것이다.

종교의 측면에서 합리론은 인간 지식이 초자연적인 계시의 도움 없이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의 사용을 통해 얻어진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성'은 초자연적인 은총이나 신앙과 대립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는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합리론자에게 이성은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세계의 많은 종교와 대립적인 관점을 갖게 한다. 종교적 합리론은 종교를 이성으로 추론하려고 할 경우에는 전통적 신앙을 반영하고, 이성으로 종교를 대체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권위주의적 성격을 반영한다(→ 종교철학).

역사

고대철학에서의 인식론적 합리론

서양철학사에서 최초로 이성의 통찰을 강조한 사람은 BC 6세기의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모든 것은 수(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는 수학적 법칙이 지배한다는 합리론적 관점을 가졌다. 지각을 초월한 이성적 통찰에 대한 찬양은 플라톤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플라톤의 유명한 '이데아'는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가 감각 사물들과 어떻게 관련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는 이상적인 것으로서 감각적인 것이 접근해가는 비감각적 목표라고 주장했다.

즉 기하학자의 완전한 3각형은 '결코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감각적 사물보다 더 실재적이며, 감각 사물은 이데아의 그림자로서 철학자가 그것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록 이데아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견해를 같이했다. 그는 이성적 설명의 주요수단으로 삼단논법을 개발함으로써 합리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12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의 합리론과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하나의 조화로운 체계 속에서 결합하려고 했다.

동양사상에서 합리론에 가장 근접한 견해는 8세기의 인도 철학자 상카라와 중국 송대 주희(朱熹)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나라의 고대 경전에 주석을 다는 형식으로 합리론을 설명했다.

상카라의 경우, 이성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에 대응하지만 이성조차도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며 완전한 이해는 오직 신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주자는 공자의 학을 이었으나 훨씬 더 사변적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 정신 속에서 오직 이성만이 작용하는데 이를 '도'(道)라고 했다. 모든 사물은 어느 정도 '도'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와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근세철학에서의 인식론적 합리론

근세 최초의 합리론자는 르네 데카르트이다.

그는 철학 속에 수학의 엄밀성과 명증성을 도입하려고 한 독창적인 수학자였다.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방법을 통해 그가 얻은 진리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이다(코기토 에르고 숨).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베네딕트 스피노자(1632~77)와 G. W. 라이프니츠(1646~1716)가 계승했다.

그들은 사물의 구조는 선천적 사유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에게 사물의 구조는 우주라는 실체였다. 이성은 어떻게 작동하고 또 이성은 어떻게 경험을 초월한 지식을 획득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이성적인 인간은 자신의 논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경험의 구조는 인간 자신의 정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험적 통찰은 정신의 반영이지 밖에 있는 세계의 반영은 아니다.

따라서 이성적 질서가 물자체 속의 질서를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합리론 사상의 최고봉인 G. W. F. 헤겔은 칸트의 이러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범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왜'라는 의문은 지성적인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고, 일정한 체계로서의 우주는 하나의 전체로 구성되어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신이다. 철학자가 이러한 정신을 구현하는 정도에 따라 진리와 실재성을 알게 된다.

윤리적 합리론

도덕주의자들은 칸트의 윤리적 합리론과는 달리 행동의 주요규범을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리처럼 자명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17세기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이러한 행동규범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도덕적 원리는 실재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리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결과보다는 의무를 중요시하는 의무론으로 나타났다(의무론적 윤리학). 이들은 행동의 특수한 규범이 아니라 행동의 어떤 유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자명한 의무를 명증한 것으로 여겼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윤리적 합리론자는 G.E. 무어 등 영국의 이상적 공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행동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은 실재하는 선과 악의 결과(또는 목적)라고 주장함으로써 목적론을 내세웠다(목적론적 윤리학).

종교적 합리론

종교적 합리론은 중세에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대두되었다.

종교적 합리론자인 아벨라르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각 교의 속에 모순이 존재하며 계시된 진리는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적 합리론은 16, 17세기에 들어서 과학적·철학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갈릴레오는 자연이 수학적 엄밀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천동설과 충돌했다. 뉴턴 등이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확인한 것은 합리론의 역사상 이성의 승리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데카르트는 신학으로부터 철학적 의심의 산물인 합리론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작했다. 그는 진리를 계시가 아닌 인간 이성의 판단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합리론자들의 견해는 4차례의 소동을 거치면서 대중적인 흥미와 영향력을 확산시켜갔다. 첫번째 소동은 영국에서 이신론의 형태로, 2번째 소동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이때 이신론은 결국 유물론적 무신론에 흡수되었다.

볼테르·디드로 등의 합리론은 당시 종교적·정치적 전통체제를 공격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3번째 소동은 헤겔의 영향 아래 독일에서 일어났다. 헤겔에 따르면 종교적 신앙은 이성이 감각과 상상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슈트라우스(1808~74)는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에서 복음서는 계시도 아니며 역사서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슈트라우스의 영향은 종교에서는 에른스트 르낭(1823~92), 철학에서는 헤겔 좌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72)가 계승했다. 포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에서 "인간은 자신의 상상에 의해 신을 창조했다"라고 주장했다. 4번째 소동은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기인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출간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책은 인간이 낮은 형태의 생명체에서 서서히 출현했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성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현황

종교

종교에서 합리론은 초기의 흥분과 신선함을 잃어버렸다. 이성과 계시가 갈등관계에 있다면 진리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양자 모두 진리의 궁극적 원천일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따라서 합리론은 인식론적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새로운 종교적 진리의 관점을 통해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학

그동안 윤리학에서는 비인식론적 이론과 상대주의가 풍미한 시대가 오래 계속되어왔다. 따라서 윤리학에서 합리론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도덕적 규범이 다양한 민족이나 개인의 태도에 달려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합리론적 관점은 20세기에 들어 새로운 관심을 모았다. 이중 다양한 도덕적 상황을 검토하고 각자에게 알맞는 정당성의 종류를 탐색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형이상학

형이상학의 원리인 내적 연관에 관한 논리적·인과적 논증은 합리론의 전형적 추론방법이다. 모든 사물은 적어도 'A는 B와 다르다'는 관계에 의해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다. 스피노자와 같은 합리론자들은 인과관계는 실재하는 논리적 관계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참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실은 단 하나의 이성적이고 지각 가능한 질서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합리론은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 원리에 따르면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확률적 법칙만이 존재하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인과성과 이성적 인식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막스 플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은 불확정성 원리가 세계의 인과성이 아닌 단지 그에 대한 정확한 지식만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현대 일부 과학자들은 물리학의 새로운 발전이 합리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존재론적 합리론에 대한 도전

경험론에 대한 기여는 19세기에는 존 스튜어트 (1806~73), 20세기에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밀은 선천적 명제들을 매우 고도의 일반성을 지닌 경험적 진술일 뿐이라고 했다. A. J. 에어(1910~89), 루돌프 카르나프(1891~1970) 등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밀과는 달리 선천적 지식의 명증성은 인정하지만 이 지식의 철학적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써 합리론에 도전한다.

그들에 따르면 선천적 명제들은 언어적·관습적·분석적인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합리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첫째, 실증주의자들은 실재적 정의와 언어적 정의를 혼동하고 있다. 언어적 정의는 어떤 용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술하지만, 실재적 정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진술한다. 둘째, 실증주의는 사유에서의 관습과 언어에서의 관습을 혼동하고 있다. 셋째, 어떤 선천적 명제는 분석적이지만 대부분 그렇지는 않다.

현재의 합리론자들은 이를 부정하려는 경험론자들의 노력과 선천성을 왜소화하려고 한 실증주의자들의 시도 속에서 '선천성'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