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다른 표기 언어 Werner (Karl) Heis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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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1. 12. 5, 독일 뷔르츠부르크
사망 1976. 2. 1, 뮌헨
국적 독일

요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라는 현대과학을 수립하는 데 공헌했으며 이 양자역학에서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가 유래되었다. 또한 난류의 유체역학,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 소립자 이론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32년에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역학 창시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카를스루에에 최초의 원자로를 설계했으며,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을 적극 추진했다. 1957년 서독 육군이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독일 과학자들을 이끌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54년 제네바에서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를 조직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76년에 사망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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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후기생애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개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라는 현대과학을 수립하는 데 공헌했으며 이 양자역학에서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가 유래되었다.

또한 난류(亂流)의 유체역학,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宇宙線), 소립자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카를스루에에 최초의 원자로를 설계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철학적·방법론적인 저술을 하는 데 있어 N. 보어와 A.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보어로부터 과학적 발명의 사회적·대화적 특성이라는 개념을 유도했는데, 이것은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 사이의 대응원리(실용적·모형이론적인 연속성), 고전물리학의 보편성이 아닌 영속성, 미시물리학에 있어 관찰자의 수동적이 아닌 상호작용자로서의 역할, 미시물리학적 이론들의 맥락적인 특성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으로부터는 자연의 중심 질서의 표준으로서의 단순성, 과학적 사실주의(단순히 자연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자연자체를 기술하는 과학), 과학적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이끌어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 함께 상보성의 철학을 공동 집필했다.

후기 연구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의 중심질서에 대해 생각했는데, 이는 특정한 물질로 이루어진 모든 계(系)들을 단일한 수학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군의 보편적인 대칭성들로 구성된다. 대중적 인물로서 하이젠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을 적극 추진했고 1957년 서독 육군이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독일 과학자들을 이끌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54년 제네바에서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를 조직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초기생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뮌헨대학교에서 그의 평생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W. 파울리와 함께 A. 조머펠트 아래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유체 흐름 속의 난류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했다(1923). 하이젠베르크는 파울리를 따라서 괴팅겐대학교로 가 M. 보른 밑에서 연구했으며 그뒤 1924년 가을 코펜하겐의 이론물리학연구소의 보어 밑에서 연구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원자의 행성계모형에 대한 관심과 그 모형의 한계에 관한 이해를 통해 새로운 모형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얻을 수 있었다(보어 원자모형). 보어의 개념(1913년 이후 구양자론으로 불리게 된 부분)은 핵주위의 잘 정의된 궤도에 있는 전자들의 고전적인 운동에 기초하고 있었고, 양자적 제한들은 모형의 결과와 실험 결과가 일치하도록 인위적으로 부가되었다.

기존의 지식을 요약함으로써, 그리고 더 발전한 연구에 대한 자극으로 보어 원자는 칭송을 받았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들은 점점 더 그것과 화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1925년 6월 북해의 섬인 헬골란트에서 걸렸던 고초열에서 회복되면서 그는 비조화(非調和)진동자의 정상(불연속적) 에너지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물리적 문제를 풀었다. 그의 해답은 단순한 행성 원자의 것과 유사했기 때문에 원자계에 대한 양자역학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해주었다(양자역학은 원자 스펙트럼의 관점에서 불연속 에너지 상태, 양자화된 에너지의 다른 형태들, 원자계들에 의해 나타나는 안정성 현상 등에 대해 설명해주는 과학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연구 결과들을 몇 개월 후 〈운동학적·역학적 관계에 대한 양자이론적 재해석에 대하여 Über quantentheoretische Umdeutung kinematischer und mechanischer Beziehungen〉라는 제목으로 〈물리학시보 Zeitschrift für Physik〉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역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한 재해석을 제안했다.

그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19세기의 기조들에서 이탈했던 것만큼이나 보어에서 이탈해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규정된 경로(입자들이나 경로들 모두 관찰 불가능했음)를 움직이는 불연속적 입자들이라는 관념을 기꺼이 버리려 했고 대신 실험적 사실을 직접 다룰 수 있고, 인위적인 규정들이라기보다는 그 이론의 귀결로서 저절로 양자적 조건들로 유도되는 이론들을 제기했다.

물리변수들은 수의 배열로 표현되는 것이었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1905)의 영향으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숨겨진 또는 접근불가능한 구조가 아닌 '관찰 가능한', 즉 측정할 수 있는 양들로 나타나는 변수들을 취했다. 보른은 행렬대수의 규칙들을 따르는 배열을 알게 되었으며, 보른, P. 요르단, 하이젠베르크는 새로운 이론을 그러한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었고 그 새로운 양자론은 행렬역학이 되었다.

이 이론의 각(보통 무한차원의) 행렬은 한 물리변수에 대한 가능한 값들의 집합을 규정했고, 한 행렬의 개별항들은 상태들의 출현과 각 상태 사이의 전이의 확률을 유도했다. 그는 행렬역학을 헬륨 원자의 이중 스펙트럼(즉 2가지 형태의 중첩된 스펙트럼인데, 이 스펙트럼에서 두 전자의 스핀은 평행이거나 반평행임)을 해석하는 데 이용했고, 이 행렬역학으로 수소원자도 이와 유사한 이중 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예측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많은 원자 및 분자 스펙트럼, 강자성 현상, 전자기적 작용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양자론의 중요한 대안적 형태들이 1926년 E. 슈뢰딩거(파동역학)와 P. A. M. 디랙(변환이론)에 의해 제기되었다.

1927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유도한 형태는 어떻게 행렬역학이 직관적으로 친근한 고전역학의 개념들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 한 논문에서 나타났다. 만일 q가 한 전자의(어떤 특정한 상태에서) 위치좌표이고, p는 그 전자의 운동량이라면, 많은 전자에(모두 특정 상태에서) 대해 qp를 각각 독립적으로 측정했다고 가정했을 때,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관계식

Δq·Δp > h

가 성립한다고 증명했다.

여기서 Δqq에 대한 측정의 표준편차, Δpp에 대한 측정의 표준편차이며, h는 플랑크 상수(6.626176×10erg·s)이다. 불확정성원리들은 양자역학의 특징인데, 이 원리들은 위치와 운동량의 행렬 표현들과 같은 비교환적인(공액적인) 변수들의 어떠한 쌍에 부과된 이론적인 한계들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경우 하나에 대한 측정은 다른 것에 대한 측정에 영향을 준다.

불확정성원리의 광대한 의미는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즉 이 원리가 양자체계의 직관적인('상보적') 상황의 사용에 의존하는지의 여부, 또는 이것이 새로운 종류의 양자 통계학의 원리인가의 여부, 또는 수학적 모형의 특별한 성질을 통해 볼 때 그것 역시 개별 양자계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는지의 여부 등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보어는 이 원리를 고전적으로 직관된 공간에 있는 한 입자나 파의 묶음으로서의 양자계의 상보적인 구도에 적용시키기 위한 원리로 받아들였으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원래 이를 고전적인 계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비직관적인 양자계들에 적용되는 원리로 받아들였다(상보성원리).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새로운 물리변수들과 각 변수들이 종속되는 고유한 측정과정들을 고려하기 위해 상보성의 철학을 정교화했다.

물리학에서 측정과정에 대한 이 새로운 관념은 과학자들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는데, 과학자는 측정을 하는 데 있어 관찰된 대상과 상호작용하고 따라서 대상 자체로서가 아니라 측정 함수로서 나타나게 한다.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드 브로이를 포함한 많은 물리학자들은 상보성의 철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후기생애

1927~41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대학교 교수였으며, 이어서 4년 동안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공공연하게 나치 정권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정책들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핵분열 발견자 중 한 사람인 오토 한과 함께 원자로 개발에 관해 연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핵무기에 대한 효과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는데, 아마도 기술적 자원과 그렇게 하려는 의지의 결핍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문학 연구소를 조직하고 소장이 되었으며, 1954년 이 연구소와 함께 뮌헨으로 이사했다.

또한 독일의 대표로서 CERN을 조직하는 일에 참여했다. 전후 기간 동안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기본 스피너 방정식(물질의 모든 가능한 특수한 상태들을 복소수 벡터와 같은 존재인 스피너로 표현할 수 있는 비선형 방정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의 직관은 그러한 방정식들은 자연의 보편적인 대칭(이 대칭은 정준 시공간 및 표상적인 요소들의 변화 아래서 불변인 수학적 형태임)의 기본적인 집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가정하게 되었고, 고에너지 충돌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소립자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인식한 '플라톤적' 특성을 갖는 이 연구에서 그는 H.-P. 뒤르와 C. F. 폰 바이츠제커를 지지·협력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초기에 간접적으로 E. 마흐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양자역학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저술 속에서 빈 학파의 과학철학자들이 발전시킨 논리실증주의에 열렬히 반대했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적극적인 관찰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절대적인 자료가 아니라 이론의존적인 자료, 즉 이론에 의해 상대화되고 관찰적 상황에 의해 맥락을 부여받은 자료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시공간에서 물체의 객관적 운동을 서로 관련지은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양자역학적 체계에는 적용시킬 수 없다고 보았는데, 입자작용은 확률에 기초해서만 예측될 수 있기 때문에 인과성은 일반적으로 개별적인 양자역학적 체계에 적용할 수는 없고 수학적 표현들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37년 엘리자베트 슈마허와 결혼했고 7명의 아이를 두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과 더불어 음악을 사랑했고 이들 두 관심사 사이의 깊은 친화성을 이해했다. 또한 철학적 저서를 썼는데, 부분과 전체 및 하나와 여러 개 같은 고대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미시물리학적 발견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20세기의 독창성이 풍부했던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았던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막스 플랑크 메달, 마테우치 메달, 컬럼비아대학교 버나드 칼리지 메달을 받았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2월 1일 뮌헨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