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름홀츠

헬름홀츠

다른 표기 언어 Hermann von Helmholtz
요약 테이블
출생 1821. 8. 31, 프로이센 포츠담
사망 1894. 9. 8,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국적 독일

요약 헬름홀츠는 생리학, 광학, 전기역학, 수학, 기상학 등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에너지 보존법칙에 대한 이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의학에서 시작하여 생리학으로 옮겨갔고 그 뒤 수학과 물리학에 몰두했다. 그의 이런 학습과정은 이 분야들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통합할 수 있었고, 이를 자신이 조사한 모든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었다. 헬름홀츠의 저서인 <생리학적 광학 편람>은 예리한 철학적 통찰력을 특징으로 정확한 생리학적 탐구로 만들어졌으며, 수학적 엄밀함과 적절한 물리적 원리들로 설명되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열역학 이론 정립에 기여했으며, 전기역학 및 열화학, 유체역학 등에 업적을 남겼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후기 생애

개요

생리학·광학·전기역학·수학·기상학 등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에너지 보존법칙에 대한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실험을 통한 연구 결과를 19세기 과학의 많은 부분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철학적 가정들을 이용해 분석할 수 있게 했다.

초기생애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난 헬름홀츠는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처음 7년 동안은 집에서만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포츠담 김나지움의 철학 및 문학 교사였는데 그에게 프랑스어·영어·이탈리아어는 물론 고전어를 가르쳤으며, 또한 I.칸트와 J. G.피히테의 철학을 소개했고 그들의 철학적 통찰력으로부터 나온 자연을 접하게 했다. 이 '자연철학'은 19세기 초기의 탐구자들에 의해 과학적 결론들이 자연세계에 대한 관찰에서보다는 철학적 관념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사변적 과학이 되었다. 헬름홀츠의 많은 후기 저작들은 이 견해를 논박하는 데 바쳐졌다.

그러나 그의 경험론은 항상 아버지로부터 전달된 미적 감수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음악과 회화는 그의 과학에서 큰 역할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그는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빌헬름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군의관으로서 8년간 복무하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의학교육을 받았다. 이 대학에서 당시 가장 위대한 독일의 생리학자였던 J. 뮐러 밑에서 연구했다.

그는 물리학 강의에 출석했고 고등수학에 대한 표준 교과서를 통해 자신의 방식으로 연구했으며 피아노 연주법을 배워 후에 감각에 관한 연구에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1843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헬름홀츠는 포츠담에 있는 연대에 배치되었는데 임무가 적었기 때문에 막사에 임시변통의 실험실을 설치하고 실험을 했다. 이때 군외과의사의 딸이었던 O. 폰 벨텐과 결혼했고 얼마 안 되어 그는 과학적 재능으로 인해 군복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48년 해부박물관 조교로 임명되었고 베를린에 있는 예술학회 강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칼리닌그라드에 있는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사하여 생리학연구소의 조교수 및 소장으로 일했다. 1855년 본대학교 해부학 및 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날씨가 혹독했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건강을 해쳐 1858년 하이델베르크로 옮겼다. 이 몇 년 동안 그의 과학적 능력은 1871년 베를린대학교의 물리학교수직을 제의받고 1882년 귀족의 지위로 승격되었을 때, 그리고 1888년 베를린 물리공과대학교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더욱 입증되었는데, 소장직에는 평생토록 있다.

헬름홀츠가 보였던 다양한 입장은 그의 관심과 능력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의 정신이 작용했던 방식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는 의학에서 시작하여 생리학으로 옮겨갔고 그뒤 수학과 물리학에 몰두했다. 그래서 이 분야들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통합할 수 있었고, 이를 자신이 조사한 모든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었다. 헬름홀츠의 위대한 저서인 〈생리학적 광학 편람 Handbook of Physiological Optics〉(1867)은 그의 모든 과학저서처럼 예리한 철학적 통찰력이 특징이고 정확한 생리학적 탐구로 만들어졌으며 수학적 엄밀함과 적절한 물리적 원리들로 설명되었다.

헬름홀츠의 업적 대부분을 통해 나타나는 일반주제는 그가 자연철학을 부인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며 그의 이 유혹적인 세계관에 대한 강렬한 부인은 초기에 그것에 매력을 느꼈음을 잘 나타내준다. 자연철학은 칸트로부터 유래하는데, 칸트는 1780년대에 시간·공간·인과성의 개념들은 감각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를 인지하게 해주는 정신적 속성들이라고 제안했다.

따라서 정신은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연의 질서를 단지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지의 세계를 조직하고 따라서 신성한 이성의 반영을 통해 몇 가지 기본적 원리들로부터 세계의 체계를 연역할 수 있다. 헬름홀츠는 모든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견해에 반대했다. 더 나아가 모든 과학은 고전역학의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고 환원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의 견해에서 이 법칙들은 실재성의 전체로서 물질, 힘, 후에는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헬름홀츠의 접근은 뮐러의 연구실에서 박사학위과정 동안 연구하면서 했던 첫번째 과학연구에서 명백하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생물학자처럼 뮐러는 생명과정을 물리학과 화학의 일상적인 역학적 법칙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던 생기론자였다. 그는 전체로서의 유기체가 그것의 생리학적 부분들의 총합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다. 유기체에는 살아 있는 피조물의 특징인 조화로운 유기적 행동을 만들어내는 기관들의 생리학적 작용들을 통합하는 몇몇 생기력이 존재해야 했다. 그러한 생기력은 실험적 조사로는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뮐러는 진정한 실험생리학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생기론). 뮐러의 실험실에서 헬름홀츠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실험신경생리학의 창시자였던 E.H.뒤 부아 레몽과 E. W.폰 브뤼케가 있었는데, 브뤼케는 후에 인간의 눈 수술 전문가가 되었다. 뒤 부아 레몽은 헬름홀츠의 입장을 완전하게 표현했던 한 진술에서 그들이 뮐러의 견해에 반대한다고 표현했다.

뒤 부아 레몽은 "브뤼케와 나는 한 유기체가 끼치는 어떤 힘도 일상적인 생리화학적 힘 이상의 효과를 가질 수 없다는 기본적 진리를 정당화하는 데 서로 맹세했다"라고 썼다.

헬름홀츠가 1842년 신경섬유와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와 일치한다. 이는 곧 그를 더 폭넓은 연구, 즉 동물의 체내에서 발생되는 열의 근원에 대한 탐구분야로 이끌었다. 그당시 프랑스의 출판물들은 동물의 체내에서 발생되는 모든 열이 특히 탄소·수소·산소 등이 포함된 다양한 화학원소의 결합열의 결과라는 확신에 찬 단언에 회의를 던져주었다.

1842년 J. 폰 리비히는 그의 책 〈동물화학:또는 생리학과 병리학에 응용되는 유기화학 Animal Chemistry;or Organic Chemistry in Its Application to Physiology and Pathology〉에서 동물 열에 대한 역학적 이론을 새로이 수립하려 했다. 리비히는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해보려 시도했지만 헬름홀츠는 훨씬 더 일반적인 경로를 취했다.

수학과 물리학을 숙달한 헬름홀츠는 당시의 어떤 생리학자도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낼 수 있었는데, 그 문제를 수학적·물리적 분석에 복속시켰던 것이다. 그는 만일 생기력이 유기체 내의 화학반응과 관계된 물질들의 열의 합이 아니라면 물리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어떤 다른 열원이 존재해야 한다고 가정했다. 헬름홀츠는 계속해서 그러한 열원은 어쨌든 열을 이용할 수 있으면 영구운동기관의 창조를 허용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일찍이 1775년 파리 과학 아카데미는 영구운동기관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 물리학에서의 영구운동기관은 불가능하다고 공표했다. 따라서 헬름홀츠는 생기적 열은 유기체 내의 역학적 힘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영구운동). 거기서부터 그는 계속 자신의 결과를 일반화하여 모든 열은 보통의 힘과 연관되고, 결국 힘 자체는 파괴될 수 없다는 것에 이르렀다.

1847년 그의 논문 〈힘의 보존에 대하여 On the Conservation of Force〉가 출판되었는데, 생리학사와 물리학사 모두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다. 생리학에 있어서는 생리학자들로 하여금 물리학자·화학자들처럼 물질적 균형과 에너지 균형을 이루는 유기적 특성에 대한 의견을 제공했다. 물리과학에 있어서는 에너지 보존원리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명료한 것 중 하나를 제공했다(에너지 보존, 체열). 1850년 헬름홀츠는 생기론에 대해 또다른 반박을 했다.

뮐러는 신경충격을 결코 실험적 측정에 따르지 않는 생기적 기능의 예로 이용했다. 헬름홀츠는 이 충격은 완전하게 측정할 수 있고 약 27㎧라는 현저하게 느린 속력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냈다(이 측정은 근운동기록의 발명으로 얻어졌고 헬름홀츠의 능력을 설명해주었음). 신경충격의 느림은 생기력의 신비한 이동이 아니라, 무게를 잴 수 있는 분자들의 재배치와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론을 뒷받침해주었다.

헬름홀츠의 가장 귀중한 발명품 중에는 검안경과 검안계(1851)가 있다.

눈이 신성한 정신이라는 생기적 관념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불완전한 조각임을 보여주면서, 헬름홀츠는 망막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조직에 선명한 상을 만들어내도록 초점을 맞출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만든 검안경은 내과의사의 가장 중요한 기구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데, 내과의사는 이를 이용하여 망막혈관을 조사함으로써 고혈압과 동맥질환을 관찰할 수 있다. 검안계는 광학적 상황의 변화에 대한 눈의 순응을 측정해주며 이중에서도 특히 안경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해준다.

헬름홀츠의 눈에 대한 연구는 〈생리학적 광학 편람〉으로 합병되었는데, 이 책의 제1권은 1856년에 출판되었다.

제2권(1867)에서 그는 더 나아가 광학현상을 탐구했고 그가 몇 년 동안 고심해왔던 철학적 문제, 즉 시간과 공간 같은 기본적 관념들은 경험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인지한 것을 의미있게 해주는 정신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라는 칸트의 주장을 파악했다. 뮐러는 감각기관은 어떻게 자극받든 항상 그들 자신의 감각을 '보고'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눈에 일격을 가하면 광학적 현상과 어떤 관계도 없는 '별을 보게 하는' 수용성을 일으킨다.

이 경우 눈은 외계를 정확히 보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실재는 타격이지 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각들이 외계에 대해서 해주는 보고가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헬름홀츠는 광학에 대한 연구와 자신의 훌륭한 저서 〈음악이론의 생리학적 기초로서의 음조 감각에 대하여 On the Sensation of Tone As a Physiological Basis for the Theory of Music〉(1863)에서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는 감각작용의 완전한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희망에서 감각신경들과 해부학적 구조들(내이와 같은)을 통해 뇌에 이르는 감각작용을 추적했다.

이 과업은 완전하지 못했고 생리학자들은 아직도 정신이 어떻게 외부 세계에 있는 어떤 것을 알게 되는지의 신비를 푸는 데 몰두하고 있다.

헬름홀츠는 시각에 대한 자세한 탐구를 통해 어떻게 시각이라는 감각이 공간관념을 창조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칸트의 공간이론을 논박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고유관념이 아니라 학습된 관념이었다.

또한 헬름홀츠는 공간은 정신이 그것을 개념화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3차원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공격했다. 자신의 상당한 수학적 재능을 이용해서 그는 비(非)유클리드 공간의 속성들을 탐구했으며 이 속성들은 개념화될 수 있고 3차원 기하학만큼 쉽게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헬름홀츠의 수학적 재능은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이론적 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물리학자·수학자 들을 좌절시켰던 방정식에 매달려 그것들을 풀어냈다. 1858년 그는 〈소용돌이 운동에 맞는 유체역학방정식들의 적분에 대하여 On the Integrals of Hydrodynamic Equations to Which Vortex Motions Conform〉라는 논문을 출판했다. 이는 수학적 대걸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 물질의 근본적인 구조에 대한 열쇠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헬름홀츠의 수학적 분석으로부터 나온 귀결들 가운데 하나는 이상유체(理想流體)의 소용돌이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하다는 것이었는데, 소용돌이들은 서로 탄성적으로 충돌하고 서로 얽혀서 복잡한 매듭과 같은 구조를 형성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장력과 압축하에 놓여 있다.

1866년 W. 톰슨(후의 켈빈 경)은 만일 이들 소용돌이들이 광학적·전기적·자기적 현상의 기초로 여겨졌던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면 고체물질의 초기 원자들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따라서 에테르는 우주 안의 유일한 물질이 되었고 모든 물리현상들은 에테르의 정적·동적 특성에 기초하여 해명될 수 있었다.

후기 생애

헬름홀츠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연구는 고전역학이 아마도 과학적 추론의 결과일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드러내준다.

그는 영국의 과학자 M.패러데이와 제임스 C.맥스웰의 전기역학에서의 업적을 인정한 최초의 독일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패러데이는 원격작용, 즉 매개의 변화가 없는 공간에서 두 물체 사이의 작용에 대한 뉴턴의 물리학을 공격했다. 그러나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뉴턴 물리학과 고전역학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헬름홀츠는 전기역학을 수학적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말년에는 여러 해 동안 전기역학의 모든 것을 수학적 원리들의 극소한의 집합으로 환원시키려 노력했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모든 공간에 퍼져 있다고 생각되었던 에테르의 역학적 속성들에 점점 더 의존해야 했다.

그는 전기의 성질에 대해서 맥스웰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맥스웰과 달리 헬름홀츠는 전기화학, 특히 갈바니 전지의 성질에 흥미가 있었고 이를 연구했다. 맥스웰은 전류를 에테르의 편광 또는 전류가 통해서 흐르는 어떤 매질의 결과로 생각했다. 한편 헬름홀츠는 패러데이의 전기분해 법칙에 완전히 정통했는데, 그 법칙은 전지를 통해 흐르는 전류량과 전극에서 침전되는 원소들의 당량을 관련짓는 것이었다. 1881년 런던에서 행한 패러데이를 기리는 한 강연에서, 헬름홀츠는 과학자들이 그당시 대부분의 화학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화학 원소들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패러데이의 법칙들은 필연적으로 전기의 특별한 성질을 함축하게 된다고 논의했다.

이러한 가설적 입자는 곧 전자라고 명명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자의 존재에 대한 물리학적 규명은 헬름홀츠의 전기역학이론이 그릇됨을 증명했다. 헬름홀츠는 전기역학을 공식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에테르의 가정된 성질로부터 모든 전자기 효과들을 거의 다 추론할 수 있었다. 1888년 그의 제자였던 H.헤르츠에 의한 전파발견은 패러데이·맥스웰·헬름홀츠의 이론들에 대한 실험적 확증으로 보였다.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에테르를 제거해버림으로써 헬름홀츠의 이론들을 파괴해버렸다.

헬름홀츠는 음파와 음악에 대한 초기 연구를 통해 파동에 대해 연구할 수 있었다. 에너지 보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에너지 보존과 에너지 전달 문제를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이 두 영역은 후에 그의 기상학 연구에서 합체되었지만 그 현상은 너무 복잡하여 그는 미래의 연구방향을 지적하는 것 이상을 할 수는 없었다.

헬름홀츠는 고전역학의 최종산물이었다. 그가 죽을 무렵 물리학계는 혁명에 처해 있었다. X선·방사능·상대성이론의 발견은 새로운 종류의 물리학을 유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