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다른 표기 언어 James Clerk Maxwell
요약 테이블
출생 1831. 6. 13,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879. 11. 5,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국적 영국, 스코틀랜드

요약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법칙에서 출발해 유전체에 '변위전류'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이 파동의 속력을 계산하던 중 빛의 속력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빛은 전자기현상이 일어나는 매체와 같은 매체 안에서 일어나는 횡파'라고 주장했다. 1831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4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고, 에버딘의 매리셜 칼리지 자연철학교수를 거쳐 킹스 칼리지 자연철학교수가 되었다. 킹스 칼리지의 교수로 있었던 5년은 맥스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다. 맥스웰은 이 기간 동안에 전자기학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 2개를 발표했고, 1861년에 왕립학회 펠로로 선출되었다. 1865년 은퇴한 이후 〈전자기론〉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1871년에는 새로 설립된 케번디시 실험물리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19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로서 종종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비교된다.

1931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책에서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이 "뉴턴 이래 가장 심오하고 충실한 물리학 업적"을 이룩했다고 극찬했다. 맥스웰은 1831년 6월 13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부유한 중류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맥스웰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가족이 미들비 지방의 글렌레어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맥스웰의 어머니는 그가 8세 되던 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1841년 숙모의 도움으로 에든버러 아카데미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평생친구가 될 루이스 캠블(후에 맥스웰 전기를 씀)과 피터 거스리 테이트를 만났다. 과학에 관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관심은 이미 이 시기부터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4세 되던 해에 출판된 첫번째 논문은 핀과 실을 이용해서 타원형 곡선의 일반적인 성질을 기술해낸 것이었는데, 기하학과 기계적 모형에 대한 맥스웰의 끝없는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16세가 되자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해서 모든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고, 과학논문을 2개 더 발표했다. 1850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했고 맥스웰의 탁월한 능력은 곧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학 지도교사였던 윌리엄 홉킨스(당시 가장 유명했던 수학 교사로 테이트, 조지 게이브리얼 스토크, 윌리엄 톰슨(켈빈 경) 등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음)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가 만난 학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 맥스웰은 물리적 감각이 매우 훌륭하지만 분석능력이 떨어진다고 평했다.

185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캐임브리지대학교 수학 트라이포스(우등졸업시험)를 2등으로 졸업했고, 같은 해 독창적인 연구결과에 따라 수여하는 스미스상(The Smith's Prize)을 수상했다.

그후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로 선출되었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856년 에버딘의 매리셜 칼리지 자연철학교수로 부임했다. 1858년 메리셜 칼리지 학장의 딸이었던 캐서린 메어리 듀어와 결혼했다. 비록 결혼생활 동안에 자식은 없었지만,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전기에서 볼 수 있듯이 보기 드문 열애였다. 1860년 메리셜 칼리지가 킹스 칼리지와 합쳐서 에버딘대학교가 되자 맥스웰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공석이 된 에든버러대학교 자연철학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친구였던 테이트가 대신 임명되었다. 그후 런던의 킹스 칼리지 자연철학교수로 선출되었다. 킹스 칼리지의 교수로 있었던 5년은 맥스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다. 맥스웰은 이 기간 동안에 전자기학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 2개를 발표했고, 컬러 사진법에 관한 시범을 수행했으며, 1861년에는 왕립학회 펠로로 선출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연구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폭넓어졌는데 1866년 왕립학회 강연에서 발표하게 되었던 유명한 점성에 관한 연구도 계속했다. 또 영국과학진흥협회의 의뢰로 전기의 단위를 측정하는 실험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 연구과제는 후에 국립물리연구소에서 계속했다.

1865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글렌레어의 영지로 은퇴했다.

비록 매년 봄마다 런던을 방문했고 케임브리지대학교 수학시험 시험관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유명한 〈전자기론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을 집필하는 데 바쳤다. 맥스웰은 책 서문에서 자신의 작업이 패러데이의 물리적 생각을 수학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법칙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기계적인 모형을 설정했는데, 그로부터 유전체에 '변위전류'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파동의 속력을 계산하던 중 빛의 속력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빛은 전자기현상이 일어나는 매체와 같은 매체 안에서 일어나는 횡파(橫波)'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이러한 주장은 전자기파가 실험실 안에서도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에 의해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된 무선통신사업은 맥스웰의 이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전자기학 이외에도 많은 다른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20대에 제시한 토성의 테에 관한 이론은 100년 뒤에 보이저 위성 탐사선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또한 최초로 통계적인 방법을 열역학에 도입했고, 실험에도 조예가 깊어 컬러 사진법, 효과적인 조속기(調速機) 등을 고안했다. 1871년 맥스웰은 새로 설립된 케번디시 실험물리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맥스웰은 케번디시 연구소를 설계하고 건축하는 데 깊이 관여했고, 존 앰브로즈 플레밍, 리처드 테틀리, 글레이즈부루크, 존 헨리 포인팅, 아서 슈스터와 같이 의욕있고 재능있는 소수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1879년 봄학기중 병세가 악화되자 6월에 고향의 영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11월 5일 사망했다. 병명은 어머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암이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생전에도 그랬듯이 사후에도 아무런 공적인 예우를 받지 못했으며 조용히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