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인터내셔널

제1인터내셔널

다른 표기 언어 First International

요약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내부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인 노동 세력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노동자연합.
정식 명칭은 국제노동자연합(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1864년 9월 28일 런던의 세인트 마틴 홀에서 '국제노동자연합'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창립자들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집회를 준비하는 데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32명의 임시 총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곧바로 총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제1인터내셔널은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조직은 개별회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개별회원들은 전국연합에 통합되어 있는 여러 지방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의 노동조합과 조직은 단체별로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기도 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최고기관은 대회(Congress)였으며, 대회는 매년 다른 도시에서 소집되어 원칙과 정책을 공식화했다. 대회에서 선출된 총회는 런던에 있으면서 집행위원회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것은 각 국가연합에 담당 서기를 임명하고, 각국과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인터내셔널의 일반적인 목적들을 추진했다.

처음부터 제1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 사상의 여러 유파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제1인터내셔널의 사상적 경향은 마르크스주의, 단지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만을 주장한 프루동주의, 급진적인 방법과 전면적인 혁명을 주장한 블랑키주의,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스위스 인터내셔널 연합의 지도 이념으로 작용한 바쿠닌의 무정부주의 등이 뒤섞인 양상을 보였다.

제1인터내셔널은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의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와 바쿠닌의 무정부주의가 충돌함으로써 분열되었다. 바쿠닌주의자들의 제1인터내셔널 장악을 방지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암시를 받은 총회는 본부를 뉴욕 시로 이전하고, 1876년 7월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총회가 정식으로 해체될 때까지 뉴욕에 머물렀다. 1873~77년 바쿠닌주의자들은 인터내셔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연례적으로 인터내셔널 대회를 개최했다.

1877년의 헨트 사회주의자 세계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의 통일을 회복하자는 그들의 제의가 다수파인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되자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을 소생시킬 수 없었으며, 1881년 무정부주의자들이 개체한 런던 대회가 폐회된 후 제1인터내셔널은 더이상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대표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제1인터내셔널은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스페인 등의 나라에서는 보호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국가들이 협력하여 제1인터내셔널을 불법화하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제의는 무산되었는데, 그것은 영국이 런던에서 열리는 인터내셔널 총회에 대한 탄압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제1인터내셔널이 수백만 명의 회원과 거의 무제한의 재력을 가진 무서운 세력이었다는 당시의 세평은 제1인터내셔널의 실세와 부합되지 않는 과대평가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제1인터내셔널을 구성하고 있던 개인 회원은 아마 2만 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제1인터내셔널이 파업을 주동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1868년 프랑스·벨기에·스위스를 휩쓴 연쇄파업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러한 파업에 대한 제1인터내셔널의 지지에 대한 풍문이 파업의 경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