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인디언 전쟁

프렌치-인디언 전쟁

다른 표기 언어 French and Indian War

요약 프랑스와 영국이 전세계에 걸쳐 9년 동안 벌인 전쟁(1754~63) 중에서 아메리카를 무대로 한 전쟁.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이 전쟁은 7년전쟁(1756~63)의 한 국면이었고 방대한 북아메리카 영토의 통제권을 결정했다. 이 전쟁으로 확대되기 이전에 해외 영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영국과 프랑스 간의 3차례 전쟁은 각각 윌리엄 왕의 전쟁(1689~97), 앤 여왕의 전쟁(1702~13), 조지 왕의 전쟁(1744~48)으로 구분해 다루어진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오하이오 강 상류 지역 버지니아인과 펜실베이니아인에게 교역과 정착의 기회를 열어줄 대영제국의 영토인지, 아니면 프랑스의 영토인지를 결정하는 국지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 문제의 이면에는 어떤 민족 문화가 북아메리카의 심장부를 장악하게 될 것인가라는 훨씬 더 큰 쟁점이 숨어 있었다. 서로 탐내고 있던 이 지역에서 수적으로는 영국계 정착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탐험과 무역, 인디언과의 유대면에서는 프랑스가 우세했다. 이미 1749년부터 뉴프랑스(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영토)의 총독은 영국인들의 정착지를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 영토로 국한시킬 목적으로 그 지역의 모든 영국인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1754년 봄 프랑스군은 오하이오 강 여러 지류에서 버지니아군을 몰아냈고 이에 조지 워싱턴 대령이 응전하여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워싱턴의 부대는 개전 직후 펜실베이니아 주의 니세서티 요새에서 포위되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두 나라 중 어느 한쪽이 지배권을 갖고 있는 전세계 모든 지역으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신대륙에서는 프랑스의 육군이 월등히 우세했기 때문에 개전 이후 4년 동안 영국 정규군과 아메리카 식민지군은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식민지인들의 전쟁 지원 능력이 부족하여 영국의 고충은 배가되었다. 그러나 1757년말경부터 3가지 요인으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의 활기찬 지휘력이었다. 또한 실제로 그는 '제국의 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았다. 이어 영국이 재정 및 산업 자원, 식량 공급, 해군 장비 등에서 계속 우위를 보인 반면, 프랑스는 전국적 파산과 경제의 마비상태로 치닫고 있었다는 점과 영국군과 아메리카군은 점차 야전 전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1758~59년 영국군은 프랑스 해안과 세인트로렌스 만의 효과적인 봉쇄에 힘입어 루이스버그, 프롱트나크 요새, 카리용 요새, 크라운포인트, 뒤켄(지금의 피츠버그), 나이애가라 요새 등지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의 승리는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1759. 9. 13)에서 절정에 달해 퀘벡은 결국 항복할 수 없었으며, 양국의 사령관인 제임스 울프와 몽칼름 후작이 치명상을 입었다(→ 퀘벡전투).

1년 후에 몬트리올과 캐나다의 전지역이 함락되었고, 파리 조약(1763. 2. 10)에 따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모든 군사적·정치적 기득권을 포기했다.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의 부채, 확장된 식민지 제국의 행정 및 정착과 같이 승리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안게 되었는데, 이러한 부담으로 인해 10년 후에 치른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