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피트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Pitt the Elder 동의어 1st Earl of Chatham, Viscount Pitt of Burton-Pynsent, The Great Commoner
요약 테이블
출생 1708. 11. 15, 런던
사망 1778. 5. 11, 잉글랜드 켄트 헤이스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1st Earl of Chatham, Viscount Pitt of Burton-Pynsent(1766~)라고도 함. 별칭은 The Great Commoner.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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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출생배경과 교육
  3. 초기 정치활동
  4. 7년전쟁 기간의 지도력
  5. 말년
피트(William Pitt the Elder)
피트(William Pitt the Elder)

개요

실질적인 총리(1756~61, 1766~68)로, 대영제국 건설에 크게 기여했다.

출생배경과 교육

피트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해리엇 빌러스 부인은 그랜디슨 자작의 딸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귀족이었고 하원의원인 아버지 로버트 피트는 동인도회사의 인도 마드라스 책임자인 토머스(다이아몬드) 피트의 아들이었다. 피트의 할아버지 토머스는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생산지역의 하나인 마드라스를 통치하면서(이곳은 1717년 프랑스 섭정에게 팔렸음)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피트는 인도에서 귀국할 당시 우울증과 통풍(痛風)으로 인해 포악해졌다.

그는 부인과 격렬하게 싸우고 가족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손자인 윌리엄에게는 다정했다. 아버지 로버트는 인색하고 고약한 인물이었고 외가인 빌러스 가문도 혈통이 불안정하기로 유명했다. 윌리엄은 조상들로부터 오만한 성질과 함께 조울증, 통풍까지 물려받았다.

그의 이같은 출생배경은 상황이 요구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불 같은 기질과 피트 가문의 무자비성은 교육이 필요했고 따라서 그는 이튼 학교에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사회적 품위를 갖추고 고고하지만 무난한, 오만하지만 예의를 차리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건강이 나쁜데다 젊어서 발병한 통풍 때문에 운동이나 사냥을 할 수는 없었지만, 승마와 포르투갈산 포도주 마시는 법을 배웠고, 특히 현명한 친구들을 골라 절친하게 사귀었다. 그들 중에는 〈톰 존스 Tom Jones〉의 저자인 헨리 필딩, 2명의 그렌빌(나중에 각각 템플 백작과 국왕 조지 3세 밑에서 수석장관에 올랐음), 조지 리틀턴, 찰스 프랫(뒤의 캠던 백작 1세가 되었고 1766년 내각에 입각하여 피트의 심복이 됨)을 비롯해 정치적 거물이 된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트는 이튼의 엄격한 교육과정을 싫어하여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집에서 교육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나 1년 뒤 학위를 따지 않은 채 자퇴했다. 그후 몇 달 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교를 다녔는데 법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교육과정은 그로 하여금 로마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말하게 만들었다(고전).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베르길리우스였고 로마 역사의 애국적 교훈을 항상 잊지 않았다.

그는 반대파에 대한 분노를 황금의 혀로 내뱉은 웅변가 키케로의 책을 지속적으로 읽었다. 그는 목소리도 우렁차 후에 의회에서 연설할 때 의사당 밖에서도 똑똑이 들릴 정도로 타고난 웅변가였다. 그의 목소리, 완벽한 타이밍, 화려한 제스처 등은 당시 최고배우이며 그의 친구였던 데이비드 개릭에 필적했다.

피트는 야위었지만 키가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매부리코와 매눈(큰 회색의 눈은 화났을 때는 검게 변했음)으로 쳐다보는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 영국인들은 그를 아폴로의 신탁을 이야기하는 신과 같은 인물로 여겼다. 1년에 겨우 100파운드밖에 수입이 없었으면서 집안의 맏아들이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최후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성직을 거부했다. 그가 누이 낸 피트에게 보낸 많은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저주받은 은신처'라고 불렀던, 콘월에 있는 가문 소유의 조그마한 땅에서 무기력하게 지낼 때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백만장자 코범 경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다.

코범은 버킹엄셔의 스토에 호화주택과 거대한 정원을 갖추고 화려하게 사는 귀족으로 윌리엄과 그의 친구들은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했다. 코범은 윌리엄에게 유럽 여행을 시켜주었고(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와 스위스만 여행했음) 1731년에는 그가 조직한 기병대에 장교로 임명했다.

초기 정치활동

1735년 피트는 형이 맡던 '독점선거구'(pocket borough)의 하나인 윌트셔 주 올드새럼을 넘겨받아 하원의원으로 진출했다(의회). 그는 '코범 단원'으로 알려진 소그룹과 코범이 로버트 월폴 경(나중의 오퍼드 백작 1세)의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관직희망자와 자신의 인척들을 모아 조직한 '소년애국자단'에 소속되었다.

반대파들은 월폴이 1720년부터 영국을 통치하면서 관직임명을 독점하고, 특히 평화를 위한 외교문제에 있어서 항상 타협부터 준비한다고 비난했다. '소년애국자단'은 존 카터렛(나중의 그랜빌 백작)과 윌리엄 펄트니(나중의 바스 백작 1세) 등 불만이 많은 휘그당원들과 제휴, 야당세력을 규합한 뒤 조지 2세 국왕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프레더릭 루이스 왕세자를 지원했다.

18세기에는 공식적인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권력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재정확충의 기회는 소수 지주계급이나 군주의 후원에 의해 가능했다.

또한 의회에도 정식 야당이 없었고 왕이 임명한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당파싸움이나 심지어는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피트는 의회에서 행한 첫 연설에서 정부를 격렬히 비난했고, 그 결과 분노한 월폴은 '이 무서운 젊은 기병장교를 제압하기 위해' 피트의 장교지위를 박탈했다. 1737년 왕세자는 피트를 연봉 400파운드의 궁중관리로 임명했다. 피트는 아직 막강한 휘그당에 의지해야만 하는 빈약한 처지였으나 이미 정신적인 독립성뿐만 아니라 의회 밖의 여론에 호소하려는 자세를 보였는데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월폴이 그를 장교직에서 해임했을 때 그는 자신의 가난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말 1필만 있는 마차를 타고 런던 주위를 몰고 다녔다. 웅변가로서 그의 재능은 이미 확실했다. 그는 의회가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의회 밖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영국의 목소리'에 거듭 의지했다. 그는 상공업자 및 해외식민지 주민들을 대변하겠다고 선언했는데, 특히 식민지 주민의 입장은 그 전에는 의회에서 거의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는 논쟁을 이용해 휘그당과 가까운 세력들을 분열시켰다. 그는 월폴이 서인도 무역문제로 야기된 스페인과의 분쟁에 소심하게 대처하는 데 반대하면서 부유한 사탕수수 재배업자 출신의 런던 시의원들과 지속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742년 마침내 월폴이 실각하고 뉴캐슬 공작 1세인 토머스 펠럼 홀리스와 하드윅 백작 1세인 필립 요크 등 그의 오랜 동료들이 참여한 새 정부가 출범했다. 카터렛은 국무장관에 임명되었고 펄트니는 귀족에 서임되었다.

피트가 지도자로 공인된 '소년애국자단'의 단원들은 여전히 배제되었다. 이 단은 이전의 월폴보다 카터렛에게 훨씬 더 반발했다. 전쟁을 옹호했던 피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과 관련해 카터렛이 하노버(영국 왕의 독일 내 영토)를 보호하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병력과 자금을 보내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면서 그를 '하노버 군사장관'이라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국왕은 피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피트는 프랑스 세력이 유럽 대륙에서보다는 해양과 그 식민지에서 저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44년 카터렛이 실각하고 펠럼 홀리스와 그의 형제인 헨리 펠럼이 취임했다. 이들은 피트가 입각하기를 희망했지만 조지 2세는 코범·리틀턴·그렌빌의 입각은 승인하면서도 피트만은 거부했다. 당시 피트는 처음으로 붕대를 감고 목발을 짚은 채 커다란 통풍환자용 신발을 신고 의사당에 나타남으로써 의도적으로 자신의 병을 공개했다. 1745년 재커바이트(퇴위한 제임스 2세를 옹립하려는 세력)가 득세하면서(1745년 반란) 피트는 유력 정치인으로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다(45년 반란).

1746년 2월 국왕은 피트를 연봉 3,000파운드의 아일랜드 재무차관에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2개월 뒤 피트는 육군경리장관에 올랐다. 그는 국왕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공손하게 절했으나 국왕은 분노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경리장관은 부정축재를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정부 내에 가장 인기 있는 자리 중 하나였다. 그의 친구들 중에서는 그가 매수된 것으로 의심해 반발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는 공식연봉 4,000파운드 외에는 어떠한 돈도 절대로 받지 않음으로써 재산 축적에 대한 혐오와 가난하지만 정직한 사람으로서의 청렴성을 계속 보여주었다.

그는 경리장관 자금구좌들과 과거 경리장관들이 횡령한 돈을 영국은행에 귀속시켜 다시 한번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그는 행정부에도 많은 개혁조치를 도입했으며 펠럼 형제가 하노버와 동맹을 맺는 데 지지를 보냈고(이는 정책의 변화였음) 해군력을 강화하는 데도 힘썼다. 이때 말버러 공작부인이 '영국 법률을 보호하고 국가의 파괴를 막기 위해 기울인 숭고한 노력을 기념해' 1만 파운드의 유산을 남기자 그는 점차 돈을 마구 쓰는 습관에 빠져들었다.

조경공사에 많은 돈을 지출했고 런던 부근에 새로 땅을 사기도 했다. 그는 수년 동안 안주인 역할을 맡아온 누이 낸과 크게 싸움을 벌인 뒤 사이가 벌어졌다.

헨리 펠럼이 1754년 임기중에 죽자 피트는 자신이 그 지위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각종 음모와 대규모 개각이 있은 뒤 뉴캐슬 공작과 헨리 폭스(나중의 홀런드 남작 1세)는 정략적으로 그를 배제시켜버렸다. 피트는 그뒤 병에 걸려 바스에 있는 새 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명예로운 은퇴뿐이다.

강을 항해하는 모든 배들로부터 무시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세상에 보여줄 수는 없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병약하고 나이 많은 독신자였으나 이때 갑자기 친구 그렌빌의 동생인 헤스터 그렌빌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당장 약혼식을 갖고 1754년 11월에 결혼했다. 당시 피트는 46세였고 그렌빌은 33세였다. 그녀는 피트를 존경했는데 이 감정은 그녀가 어린시절 오빠들과 함께 스토를 방문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현명했으며 인내심이 많고 현실적이었다. 특히 돈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채권자들을 기쁘게 하거나 저당을 잡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피트가 말년에 돈을 마음대로 쓸 때에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쏟아부었다. 결혼생활은 극히 행복했다. 질서 있고 애정이 넘치는 집과 가족(피트는 자기 가족을 '보병대'라고 불렀음)이 있었다.

그는 켄트에 있는 자신의 집 '헤이스 플레이스'에서 가족과 함께 건초를 만들었고 소풍을 가거나 나비를 잡기도 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집권을 위한 의회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첫 싸움부터 뉴캐슬 공작의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1755년 경리장관에서 해임되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처남인 템플 백작이 1,000파운드의 연금을 보내 도와주었다.

7년전쟁 기간의 지도력

7년전쟁의 발발은 피트에게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 전쟁은 초반에 막대한 손실과 정책의 혼란을 가져왔다. 국민들은 피트가 집권할 것을 요구했고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요구가 거세지자 피트는 "오직 나만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1756년 11월 그는 데본셔 공작을 명목상의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면서 뉴캐슬은 제외시켰다. 뉴캐슬은 1757년 6월 자신이 모든 관직임명권을 통제하며 전쟁수행은 피트에게 위임할 것을 약속하고 복귀했다.

피트는 이 전쟁이 모든 의미에서 국가의 전면전쟁이며 해전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병대를 부활하는 한편 해군을 다시 조직하고 재무장시켰다. 그리고 일관되고 효율적인 전략을 위해 모든 파벌과 여론을 통일시키고자 애썼다. 그는 전략의 주요목표를 아메리카와 인도에 집중시켰다. 그는 주력 원정대를 아메리카에 보내 캐나다를 확고히 정복하는 한편, 동인도회사와 '하늘이 내려준 장군' 로버트 클라이브를 지원해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맞서 싸우게 했다.

그는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에게 재정원조를 제공하여 프로이센군을 강화시킴으로써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해안, 서인도제도, 아프리카 등에서 프랑스 해군을 괴롭혔다. 그는 훌륭한 육·해군 장군을 뽑아 그들에게 도전과 모험의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승리의 해'인 1759년에는 월폴의 아들이며 문학가인 호레이스 월폴마저 "우리의 종은 승리를 위해 울리느라 다 닳아버렸다"라고 찬양했다. '위대한 하원의원' 피트는 유명해졌고 전세계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처럼 단호하고 일치된 영국의 정책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결과 1763년의 파리 조약에 따라 대영제국은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고 미노르카를 지중해 기지로 차지했으며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도 영토를 획득했다.

피트는 이전의 대영제국을 지키고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국으로 만들었으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사임했다.

1760년 조지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최고 고문인 뷰트 백작이 전쟁 종식을 결정했다. 피트는 동료들에게 전쟁에 개입할 것으로 보이는 스페인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1761년 10월 사임했다. 전쟁에 지치지 않은 사람은 피트 혼자였다. 그는 결코 전쟁이 가져오는 대량살상과 파괴가 국가를 파탄에 빠뜨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모든 활동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켰고 무서운 정력으로 일했다. 오만한 태도와 고압적인 일처리는 그에게 존경과 찬양을 가져다준 동시에 주위의 많은 사람을 떠나가게 함으로써 그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어졌다. 그가 사임할 때 부인 헤스터가 귀족작위와 함께 매년 3,00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자 또다시 권력남용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과거 그가 경리장관에 올랐을 때처럼 이번에 부인이 귀족작위와 연금을 받게된 것도 정치적 흥정의 결과로 비쳐졌다. 이것이 그가 이룬 막대한 공헌의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극도의 환멸을 불러일으킨 사실은 고매한 청렴으로 그가 얼마만큼 명성을 얻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의 초상을 불태우고 헤스터를 욕했다. 피트는 파리 조약으로 전세계에 걸쳐 거둔 성공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곧 회복되었으나 전쟁장관으로서의 정치인생은 막을 내렸다.

말년

피트는 물러난 뒤 통풍에 시달리면서 원예에 관심을 기울였다.

1765년 지지자로부터 서머싯 주 버턴 핀센트에 있는 훌륭한 땅을 선물받아 멋진 가로수길을 꾸몄다. 그는 바스를 자주 찾아갔는데 거기서 그가 광천수를 마시는 동안 사람들은 서서 기다리곤 했다. 그는 곧 머리까지도 통풍에 걸려 발작을 일으켰다. 1763년 뷰트가 사임하고 피트의 처남인 조지 그렌빌이 그 뒤를 이어 취임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피트의 공격은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피트는 자유의 옹호자가 되어 정부가 하원의원 존 윌크스에게 취한 고압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윌크스는 〈노스 브리튼 North Briton〉이라는 글을 통해 국왕이 하원 개회식에서 행한 연설을 공격했다가 결국은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피트는 1764, 1765년에는 활동을 중단했으나 1766년 1월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 식민지 과세법인 인지세법의 철폐를 요구하며 항거하는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에게 최고지상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했다.

그해 7월 국왕은 피트에게 하원 내 모든 파벌로부터 사람을 고루 뽑아 내각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피트는 이미 판단력과 지혜가 퇴색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때문에 통일성 있는 내각을 구성하지 못했다. 그의 내각은 정적인 에드먼드 버크의 말대로 '모자이크식 포장'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대실패작이었다. 피트는 스스로 제2인자 자리인 국새상서에 취임했는데 이를 위해 채텀 백작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각료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하원의원직뿐만 아니라 웅변술을 통한 하원에서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위대한 하원의원'은 경(卿)으로 물러나 이후 2년간 병을 앓았고 방향을 잃은 정부는 불운한 그래프턴 공작과 찰스 타운센드에 의해 움직여지면서 피트의 정책을 폐지시켰다. 피트는 1768년 완전히 물러났다. 그는 하원에서 일단의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야당인 휘그당의 로킹엄 경 세력과 동맹을 맺어 노스 경 정부에 위협을 가했으나 결국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피트의 말년은 병으로 인해 암울했다.

그렇지만 그는 원로 정치가로서 고통을 무릅쓰고 상원에 출석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호소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을 희망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 가운데는 아메리카가 독립 후 프랑스의 손아귀에 떨어질 가능성을 우려한 점도 있었다. 1775년 그는 미국 보스턴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를 중단할 것과, 필라델피아에 세워진 대륙회의를 각 식민지 조세평가기구로 이용하면서 영국의회가 식민지에 대한 입법권을 계속 유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긴급 제출했다.

이 법안은 비록 즉석에서 기각되었지만 피트가 구상하고 있던 아메리카 문제의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에 근거한 제한의 축소를 반대하는 마지막 연설로 헌법상의 자유와 통치력을 조화시키는 데 전념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피트는 1778년 5월 11일 그에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 중 헥토르의 장례식 장면을 읽어주던 아들 윌리엄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장관을 이룬 장례행렬과 국민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생전에 원했던 대로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