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회의

대륙회의

다른 표기 언어 Continental Congress , 大陸會議

요약 미국 독립전쟁 때의 기구로서 나중에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발전한 여러 식민지의 대표기구(1774~89).

특히 이 용어는 대체로 제 1·2차 대륙회의라 일컫는 1774년 회의와 1775~76년 회의를 가리킨다.

1774년 봄, 영국 의회가 보스턴 항구 폐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통과시키자, 식민지 아메리카는 이러한 조치에 격분했다(→ 참을 수 없는 법). 1774년 9월 5일 이 법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의 연락위원회 주체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개최되었다. 조지아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에서 56명의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했다. 버지니아 대표 페이턴 랜돌프가 만장일치로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회의'라는 용어뿐 아니라 '의장'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찰스 톰슨이 총무로 뽑혔는데, 그는 그뒤 대륙회의가 열린 15년 동안 계속 총무직을 맡았다. 단합을 이루기 위해 각 식민지 대표들은 식민지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1표씩을 가졌다. 제1차 대륙회의에는 페트릭 헨리,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 존 제이, 존 디킨슨 등이 참석했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회의에서 대표들은 식민지의 자유와 영국의 권위를 조화시키자는 안을 기각시키는 대신 생명·자유·재산·집회의 권리 및 배심원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개인 권리에 관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대표 없는 과세와 식민지의 동의 없이 영국 군대를 식민지에 계속 주둔시키는 행위 등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의 통상에 관한 영국 의회의 규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974년 10월 대륙회의는 1763년 이래 누적되어온 불만을 시정해줄 것을 영국 국왕에게 청원했다. 회의는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 영국 상품에 대한 전반적인 불매운동과 쌀을 제외한 미국 상품을 영국이나 영국령 서인도제도로 수출하지 않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또 앞으로의 조치를 위해 1775년 5월 10일 다시 회의를 열기로 했다. 펜실베이니아 청사에서 제2차 대륙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미 매사추세츠의 렉싱턴과 콩코드에서는 전투가 벌어졌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이 새로 참석했으며, 랜돌프와 존 핸콕이 차례로 의장으로 뽑혔다.

1775년 6월 15일 대륙회의는 보스턴에 모여 있던 뉴잉글랜드군을 '채용'하고 아메리카군 총사령관으로 워싱턴을 임명했다. 또한 대륙회의는 13개 식민지의 임시정부 역할을 하여 화폐를 발행하고 차관을 들여왔으며 우편 업무를 확립하고 해군을 창설했다. 회의는 처음 몇 달 동안은 아메리카인들이 대영제국 안에서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점차 영국과 유대관계를 끊었으며 마침내 완전한 분리를 결의했다.

1776년 7월 2일, 뉴욕이 기권한 가운데 회의는 "식민지연합(United Colonies)에 속한 각각의 주는 자유롭고 독립된 주이며 그렇게 되어야 할 권리가 있음"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2일 뒤 이들은 엄숙하게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승인하고,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준비했다. 이 헌장은 모든 식민지의 승인을 거쳐 1781년 3월 미국 최초의 헌법이 되었다. 대륙회의는 오늘날의 미국 헌법에 의해 1789년 선출된 새로운 의회가 개최될 때까지 그 기능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