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크스

윌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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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5. 10. 17, 런던
사망 1797. 12. 26,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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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노스 브리튼
  4. 의회에서 축출됨
  5. 미들섹스 선거
  6. 런던에서의 활동
  7. 윌크스에 대한 평가

개요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언론인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여러 차례 의회에서 추방당한 것 때문에 박해의 희생자, 자유의 기수 등으로 불렸다. 그가 대중으로부터 폭넓게 지지를 얻은 것은 아마도 영국 래디컬리즘의 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초기생애

양조업으로 성공을 거둔 인물인 이스라엘 윌크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트퍼드의 한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그뒤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747년 5월 23일 에일즈베리 장원의 상속녀인 메리 미드와 결혼함으로써 안정된 재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또한 버킹엄셔의 젠트리 지위를 확보했다. 천성적으로 방탕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메드넘 수도승'이라고 하는 동류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 집단은 이른바 '지옥불 클럽'에 속했고 때때로 버킹엄셔의 메드넘에 있는 세인트메리 대수도원 유적지에 모여 주색잡기와 악마숭배 미사를 올리는 일에 탐닉하곤 했다.

1754년 템플 백작의 제의를 받고서 버윅어폰트위드에서 하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그러나 지방의 정당 지도자를 매수해 상대편 표를 조작하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선에는 실패했다. 1757년 7,000파운드의 선거 자금을 들인 후 에일즈베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진출했는데 7,000파운드의 자금 가운데 대부분은 유권자들에게 뇌물로 준 것이었다. 무모하게 돈을 많이 뿌린 결과 많은 빚을 짊어진 그는 정치적 입신출세를 통해 재산을 만회하고자 했다.

노스 브리튼

1762년 정치적 성향을 띤 신문 〈노스 브리튼 North Briton〉을 창간한 그는, 총리인 뷰트 경에 대한 템플 백작의 반대운동을 돕기 위해 언론을 통한 열렬한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널리즘).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잉글랜드 대중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뷰트 경과 조지 3세의 모친과의 관계에 대해 중상모략과 다름없는 빈정거림을 지면을 통해 쏟아냈다.

1763년 4월 뷰트 경이 장관직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한 것에는 윌크스가 뷰트 경에 대한 적대감정을 맹렬히 선동한 데 어느 정도 원인이 있었다. 템플 백작은 뷰트 경의 뒤를 이어 총리 조지 그렌빌에 대해서도 반감을 품었으며 그해 4월 23일 윌크스로 하여금 유명한 〈노스 브리튼〉 '제45호'를 발간하게 했다. 제45호를 통해 윌크스는 국왕의 연설에 담긴 내각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가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신임 각료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혹심한 중상비방을 없애고자 했으며, 국왕도 자신의 어머니를 비방하는 윌크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노를 표시함으로써 각료들을 고무했다.

이에 각료들은 윌크스에게 즉각적인 응분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체포할 사람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모호한 내용의 영장이 발부되었으며 윌크스가 체포되기에 앞서 증거확보를 위한 수색과정에서 48명이 붙잡혔다. 윌크스는 런던 탑에 투옥되었으나 1주 후 고등법원의 수석재판관 프랫은 윌크스 체포가 의회의 월권행위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석방을 명령했으며, 이같은 사실에 일반대중은 크게 기뻐했다.

윌크스와 여타 동료들은 국무장관 핼리팩스 백작과 그 부하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바로 윌크스와 그 동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불법적인 성격의 모호한 영장을 발부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면책을 누릴 것으로 생각한 윌크스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펴나갔다. 알고 지내던 한 프랑스인이 그에게 잉글랜드에서 언론자유가 어느 정도로 신장되어 있는지 질문하자 그는 "언론자유가 어느 정도인지 분간할 수 없으나 그것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의회에서 축출됨

그에 대한 2번째 공격이 바로 그의 메드넘 시절 친구였던 샌드위치 경에 의해 좀더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있었다.

이당시 샌드위치 경은 국무장관직에 있었으며 윌크스를 의회에서 축출함으로써 소추면책특권을 박탈하고자 계획했다. 정부는 윌크스의 개인 출판사에서 〈여성론 Essay on Woman〉 교정쇄(校正刷)를 확보했다. 이 책은 수년 전 윌크스와 토머스 포터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교황 알렉산데르가 쓴 〈남성론 Essay on Man〉을 외설스럽게 모방한 작품이었다.

윌크스는 이 책의 인쇄를 시작했으나 끝까지 마무리짓지는 못했는데 이는 '메드넘 수도승'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1763년 11월 의회가 문을 열자 샌드위치 경이 이 에세이를 상원에서 낭독했으며, 상원의원들은 표결을 통해 이 책은 중상모략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윌크스가 이 책을 펴낸 것은 의원으로서의 특권을 남용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이와 동시에 하원은 정부측 동의를 받아들여 〈노스 브리튼〉 제45호를 선동적인 명예훼손이라고 선언했다.

윌크스는 하원에서 의견을 주고받다 결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으나 곧 회복되었다. 크리스마스 휴가중 자신의 딸을 방문하기 위해 파리로 몰래 빠져나간 그는 국내에서 소추당하는 신세를 면하기 위해 귀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764년 1월 20일 각료들은 윌크스를 하원에서 축출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그해 2월 그에 대한 궐석재판이 진행되었으며 선동적인 명예훼손(〈노스 브리튼〉 제45호)과 외설스럽고 불경한 명예훼손(〈여성론〉)을 범한 출판물 발간이 유죄로 판결되었다.

그러나 최종 선고는 그가 귀국할 때까지 연기되었으며, 당연히 그는 곧 열리게 될 국왕 주재재판을 앞두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로 선언되었다.

미들섹스 선거

이후 4년 동안 윌크스는 유럽 대륙의 파리 등지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보장해줄 수 있는 친구가 총리직에 오르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으나 총리직에 있던 로킹엄과 채텀, 그래프턴 모두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에 실망한 나머지 윌크스는 1767년 〈그래프턴 공작에게 보내는 서한 Letter to the Duke of Grafton〉을 통해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를 통렬히 비난했다. 1768년초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그는 부채가 늘어나 더이상 파리에 머무는 것도 안전하지 못한 형편이 되자 모험을 작정하고 모든 운명을 의회의원 재선에 걸었으며, 공공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런던에서 야당으로 입후보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각료들은 윌크스를 즉시 체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윌크스는 비록 런던 지역구 선거에서 당선되지는 못했으나 각료에 대한 불신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미들섹스에서 당선되었다. 같은 해 4월말 그는 당국에 자수했으며 6월초 그의 탈법사실은 법률적인 측면에서 말소되어졌다. 의회의원으로서 갖는 특권을 당분간 유보한 그는, 1764년 유죄판결을 받았던 2가지 혐의에 대해 총 2년의 징역형과 벌금 1,000파운드를 선고받았다.

이같은 행동을 통해 그는 사면과 권리회복을 얻고자 했으며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각료들을 협박할 태세까지 되어 있었다.

다음 몇 개월 동안 그는 각료들이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맹렬히 공격을 가했으며 이와 함께 하원에 청원을 제출, 자신에 대한 재판과정이 불법이었다고 주장하며 판결 전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1769년 2월 3일 각료들은 재차 그를 하원에서 축출했다. 그러나 그의 반정부 입장은 대도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따라서 당시 하원이 현행 임기 내에서는 윌크스의 피선거권이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2월 16일 미들섹스 지역구에서 재선되었다.

1차례 더 의회로부터 추방당했으나 3월 16일 또다시 당선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재선된 이후 4월 13일 하원은, 선거에서 윌크스에게 패배한 헨리 루트렐이 정식 의원임을 선언했다. 결국 윌크스는 설득력이 없는 선례에 따라, 그리고 명백히 헌법질서를 저해하는 방식으로 의회로부터 추방당했다. 다시 말해 의회는 대표를 선택할 수 있는 유권자들의 권리를 의회의 특권이라는 명분으로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런던에서의 활동

1769년초 윌크스의 동료들과 그의 견해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윌크스의 대의명분을 지지하고 또 그의 채무를 대신 변제해주기 위해 '권리장전옹호협회'를 구성했다.

1770년 이 협회는 윌크스가 좌지우지하는 정치기구가 되었다. 의회진출 자체가 봉쇄된 윌크스는 런던에서 자신의 야심과 각료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1769년 시 참사회원이 되었으며 1771년에는 사법집행관, 1774년에는 시장이 되었다. 1771년 '권리장전옹호협회'가 채택한 급진적인 강령을 윌크스가 받아들인 까닭은 원칙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목적달성을 위한 1가지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협회가 채택한 강령은 의원임기의 단축과 선거권의 확대 및 귀족들에게 유리한 이른바 '포켓 선거구제'의 폐지 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의회 내 토론내용을 공개한 인쇄업자들을 당국이 월권행위라고 규정해 체포하려 하자 윌크스는 런던 시의 사법 특권을 이용해 이를 저지했다. 재정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특별한 책임감을 발휘하지는 못했으나 런던 시의 유력자로서 양심적이고 계몽된 인물임을 스스로 과시했다.

1774년 급진주의 강령을 표방하면서 미들섹스 의원으로 다시 당선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 독립전쟁에 대한 반대입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피력했으며, 1776년에는 의회개혁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곧 위선적인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이와 함께 자신이 각료들을 공격하는 연설을 행한 것은 전적으로 런던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는 점을 스스로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략 1779년부터 그의 인기는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톨릭교도를 공격한 고든의 반란이 계속되던 1780년 그는 반란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확고부동한 행동을 취했는데, 불과 수년 전에는 윌크스 자신이 이들 반란세력의 지지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미들섹스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급진성향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1780, 1784년 2차례에 걸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782년 하원의사록에서 1769년 당시 그의 의원직 박탈을 결정한 사실이 삭제됨으로써 유권자들의 의원선출권리에 대한 그의 변론이 정당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1784년 이후부터는 그의 인기를 지탱해주던 문제들이 시들해졌으며 그 자신의 열정도 소진되었다.

1790년 미들섹스에는 지지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후보를 포기했다. 그는 1797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윌크스에 대한 평가

윌크스는 지독한 사팔뜨기에다 굉장히 추한 용모의 소유자였으나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도 남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과 단 30분만 대화를 나누고 나면 못생긴 외모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된다고 자랑했으며, 또 1개월 정도의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어떤 애정 문제에서도 승리를 자신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천부적인 말재간을 지니고 있었는데 조지 3세 정부와 싸우던 시절 한번은 카드 게임에 초대를 받게 되자 "나에게 그런 부탁하지 마시오. 나는 매우 무식해서 왕(조지 3세를 지칭)이 그려진 카드와 잭(건달)이 그려진 카드를 분간할 줄 모른다오"라고 말했다. 샌드위치 경이 "윌크스는 천연두 아니면 교수형으로 죽고 말 것"이라고 조소 어린 발언을 하자 그는 이를 즉각 되받아서 "샌드위치 경, 그것은 다시 말해 내가 당신의 정부를 끌어안거나 아니면 당신의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런던 시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한 사람이 인내심을 잃고 분노하면서 "더이상 당신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다"라고 말하자 윌크스는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결단코 머리가 텅 비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종종 악의에 찬 그의 농담들은 적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친구들을 잃게도 만들었다. 야당 언론인이자 팜플렛 제작자로서 그의 이미지는 가차없고 통렬한 것이었지만 하원에서 토론을 벌이는 경우에는 재주가 부족했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언론의 자유를 신장시킨 것에 있다.

그의 도전적인 자세는 여태까지 정부가 대상자 이름이 기입되지 않은 모호한 내용의 영장을 발부해 오던 관행이 불법이라는 판결이 나오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의회에서의 토론 내용을 보도한 데 대해 의회가 인쇄업자들에게 보복을 취하려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