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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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원래 최신 사건을 신문처럼 인쇄된 형태로 취재·보도하는 것을 가리켰으나 20세기 이후 시사문제를 다루는 모든 인쇄물과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하게 되었다.
1609년경 최초의 신문이 독일에 등장했다. 17세기에 학술지로 시작한 잡지는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저렴한 잡지들이 대량 등장했고 삽화를 곁들인 잡지와 여성 잡지도 등장했다. 또한 특집기사나 국제기사 등을 각각의 언론사에 판매하는 전문적인 뉴스 기사 배급처인 통신사들이 생겨났다. 라디오·텔레비전·컴퓨터 등의 발명과 인터넷 발달은 저널리즘의 적시성을 크게 높였다.
옛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언론 기관을 소유하고 언론 통제를 했다. 반면 영어권 및 서부 유럽 국가 대부분의 보도기관은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있다.

목차

접기
  1. 역사
  2. 전문직업
  3. 현대의 저널리즘
  4. 역사
  5. 전문직업으로서의 저널리즘
  6. 현대의 저널리즘
저널리즘
저널리즘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원래 최근의 사건을 인쇄된 형태로, 특히 신문에 취재·보도하는 것을 가리켰으나 20세기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확대되어, 최근의 시사문제를 다루는 모든 인쇄물과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하게 되었다.

역사

최초의 형태로 알려진 저널리즘의 소산은 고대 로마에서 배포된 〈악타 디우르나 Acta Diurna〉라고 하는 낱장짜리 신문이었다.

BC 59년부터 매일 발간된 〈악타 디우르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곳에 게시되었으며,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사건들을 보도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저보 邸報〉라 하는 관보가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여 발행되었다. 이 관보는 1911년에 청조가 끝날 때까지 여러 형태와 다양한 이름으로 거의 연속해서 발행되었다.

1609년 무렵 정기적으로 발간된 최초의 신문이 독일의 도시들과 앤트워프에 등장했다. 최초의 영어 신문인 〈위클리 뉴스 Weekly Newes〉가 1622년에 발간되었으며, 최초의 일간 신문 가운데 하나인 〈데일리 커런트 The Daily Courant〉가 1702년에 발행되었다.

처음에는 정부의 검열과 규제 및 세금으로 인해 방해를 받던 신문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신문이 확보하고 있는 보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신문의 독보적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나고 증기로 가동되는 인쇄기에 이어 전기로 작동되는 인쇄기가 도입되면서 신문의 일간 발행부수는 몇 천 부에서 몇 십만 부, 마침내는 몇 백만 부로 늘어나게 되었다.

17세기에 학술지로 시작한 잡지는 최근의 시사 사건에 대해 여론을 조성하는 기사들을 특집으로 싣기 시작했는데, 〈태틀러 Tatler〉(1709~11)·〈스펙테이터 Spectator〉(1711~12)가 이런 특집기사의 보도에 선두적이었다. 1830년대에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폭넓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저렴한 잡지들이 대량으로 배포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삽화를 곁들인 잡지와 여성 잡지들이 등장했다.

대규모의 특집기사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많아지게 되자 특집기사나 국제기사 등을 각각의 개별 신문사와 잡지사에게 파는 전문적인 뉴스 기사 배급처인 통신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전신의 발명과 곧이은 라디오텔레비전의 발명은 저널리즘의 업무활동 속도를 매우 빠르게 하고 적시성을 크게 높였으며, 매우 많은 수의 새 지국과 청취자 및 시청자에게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해 새로운 정보를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말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저널리즘에 관련된 정보를 원거리에 송신하고 있다.

전문직업

20세기의 저널리즘은 전문직업으로서의 인식이 점차 커져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4가지 주요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직업적인 저널리스트 조직의 증가, 저널리즘을 위한 전문교육,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문제점·기술을 다루는 문학작품의 증가, 저널리스트가 갖는 사회적 책임의식의 증가 등이다. 저널리스트 조직은 일찍이 1883년에 잉글랜드의 인가를 받은 저널리스트 협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33년에 조직된 미국신문조합(American Newspaper Guild)이나 프랑스 보도 연맹과 마찬가지로 이 협회는 노동 조합과 직업 조직의 구실을 했다.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는 원고담당 사환이나 견습기자로 시작하는 저널리스트 도제를 통해 훈련되었다.

저널리즘에 대한 첫 대학 과정은 1879~84년의 미주리 주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대학교에서 개설되었다. 1912년에는 뉴욕 시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가 뉴욕 시의 편집장이면서 출판인인 조지프 퓰리처의 원조금을 받아 저널리즘에 대한 첫 대학원 과정을 개설했다. 뉴스 보도와 신문사의 운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전문 훈련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더 요구되었다. 또한 정치·사업·경제·과학 같은 특별한 종류의 뉴스를 심층 취재하려면 종종 이러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편집장들은 깨닫게 되었다.

영화·라디오·텔레비전이 뉴스 매체로 등장하면서 뉴스를 수집하고 내보내는 데 있어 쉴 새 없이 늘어나는 일련의 새 기술과 기법들이 요구되었다. 1950년대 무렵에는 대부분의 대학이 저널리즘이나 커뮤니케이션 과정들을 개설했다. 저널리즘에 관한 문헌은 1900년에는 2권의 교과서와 몇 안 되는 강의집과 논설집, 많지 않은 역사책과 전기(傳記)가 고작이었는데 20세기 후반 무렵에는 수적으로나 종류별로 크게 늘어났다. 그것은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기자와 사진기자를 위한 교재, 저널리즘의 방법과 저널리스트의 자질, 윤리에 관한 저널리스트들의 사상과 논쟁을 다룬 책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저널리즘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은 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산물이다.

초기의 신문들과 잡지들은 일반적으로 정치 분야에서 지나치게 당파적인 경향을 취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당의 입장을 견지하고 반대당의 입장을 비난하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자층이 늘어나면서 신문의 규모와 재정 또한 커졌으며 점차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신문들은 부수를 늘리기 위해 스스로 대중적이고 선정적인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1890년대에 뉴욕 시의 두 신문 〈월드 World〉와 〈저널 Jounal〉 사이에 경쟁적으로 벌어진 '옐로 저널리즘'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사회적 책임의식은 책과 잡지, 협회 모임 등을 통해 보도 책임에 대한 전문 교육과 폭넓은 논의를 실시한 결과 괄목할 만하게 높아졌다. 영국의 왕립 언론 위원회(1949) 보도와 미국의 언론의 자유에 관한 비공식적인 위원회가 쓴 것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 A Free and Responsible Press〉(1947) 같은 보도들은 현직 저널리스트 스스로 자기 반성을 하도록 자극했다.

20세기 후반 무렵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 집단으로서의 저널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사실을 공정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이상주의적이었다. 여러 저널리스트 단체가 윤리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미국 신문 편집인 협회의 성명일 것이다.

현대의 저널리즘

저널리즘의 핵심은 언제나 뉴스였음에도 뉴스라는 말이 너무도 많은 부차적인 뜻을 내포하여 이제는 '하드 뉴스'(hard news)라는 용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뉴스를 구별하기 위해 명확한 뉴스 가치를 지닌 기사를 가르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것은 주로 신문이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보도가 등장한 결과이다(방송보도). 독자층을 유지하기 위해 신문은 뉴스, 간단한 인물란, 숙련된 작가들이 쓴 시의적절한 시사 논평과 같은 해설류의 기사들을 더욱더 늘리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대부분의 신문, 특히 저녁판과 일요일판은 객관성이라는 전통적인 규칙이 여전히 적용되던 '하드 뉴스'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잡지의 방식을 크게 모방한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보도에서 시사잡지들은 뉴스와 사설 논평을 함께 싣고 있었다.

출판 저널리즘은 비록 그 역사는 짧지만 대단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싼값의 책들이 증가하면서 저널리즘 관련 서적들이 활발하게 출판되었는데, 선거 운동과 정치 추문, 전체적인 세계정세를 보도·분석한 책들과 트루먼 커포티, 톰 월프, 노먼 메일러 같은 작가들의 '뉴 저널리즘'(new journalism)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언론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제한이 다시 가해졌다. 옛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언론 기관을 소유했으며 언론인과 편집인은 정부 고용인이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 기관의 주요기능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나 정부가 선언한 국가의 목표를 뒷받침하고 지지하는 임무를 지녔다. 그결과 공산주의 국가의 명백한 업적은 언론 매체를 통해 강조하는 반면 그들의 실패는 보도하지 않거나 무시해 버렸다.

이러한 엄격한 검열제도는 공산주의 국가의 저널리즘에 만연되어 있었다. 공산주의가 아닌 개발도상국에서 보도 기관은 다양한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그것은 본국 정부를 난처하게 하는 문제들에 대해 때에 따라 신중하게 자체 검열을 실시하는 것에서부터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엄격하면서도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검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대부분의 영어권 국가들과 서부 유럽 여러 국가들의 보도기관들은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누리고 있다.

역사

최초의 형태로 알려진 저널리즘의 소산은 고대 로마에서 배포된 〈악타 디우르나 Acta Diurna〉라고 하는 낱장짜리 신문이었다. BC 59년부터 매일 발간된 〈악타 디우르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곳에 게시되었으며,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사건들을 보도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저보 邸報〉라 하는 관보가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여 발행되었다.

이 관보는 1911년에 청조가 끝날 때까지 여러 형태와 다양한 이름으로 거의 연속해서 발행되었다. 1609년 무렵 정기적으로 발간된 최초의 신문이 독일의 도시들과 앤트워프에 등장했다. 최초의 영어 신문인 〈위클리 뉴스 Weekly Newes〉가 1622년에 발간되었으며, 최초의 일간 신문 가운데 하나인 〈데일리 커런트 The Daily Courant〉가 1702년에 발행되었다.

처음에는 정부의 검열과 규제 및 세금으로 인해 방해를 받던 신문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신문이 확보하고 있는 보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신문의 독보적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나고 증기로 가동되는 인쇄기에 이어 전기로 작동되는 인쇄기가 도입되면서 신문의 일간 발행부수는 몇 천 부에서 몇 십만 부, 마침내는 몇 백만 부로 늘어나게 되었다. 17세기에 학술지로 시작한 잡지는 최근의 시사 사건에 대해 여론을 조성하는 기사들을 특집으로 싣기 시작했는데, 〈태틀러 Tatler〉(1709~11)·〈스펙테이터 Spectator〉(1711~12)가 이런 특집기사의 보도에 선두적이었다.

1830년대에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폭넓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저렴한 잡지들이 대량으로 배포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삽화를 곁들인 잡지와 여성 잡지들이 등장했다. 대규모의 특집기사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많아지게 되자 특집기사나 국제기사 등을 각각의 개별 신문사와 잡지사에게 파는 전문적인 뉴스 기사 배급처인 통신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전신의 발명과 곧이은 라디오텔레비전의 발명은 저널리즘의 업무활동 속도를 매우 빠르게 하고 적시성을 크게 높였으며, 매우 많은 수의 새 지국과 청취자 및 시청자에게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해 새로운 정보를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말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저널리즘에 관련된 정보를 원거리에 송신하고 있다.

전문직업으로서의 저널리즘

20세기의 저널리즘은 전문직업으로서의 인식이 점차 커져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4가지 주요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직업적인 저널리스트 조직의 증가, 저널리즘을 위한 전문교육,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문제점·기술을 다루는 문학작품의 증가, 저널리스트가 갖는 사회적 책임의식의 증가 등이다.

저널리스트 조직은 일찍이 1883년에 잉글랜드의 인가를 받은 저널리스트 협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33년에 조직된 미국신문조합(American Newspaper Guild)이나 프랑스 보도 연맹과 마찬가지로 이 협회는 노동 조합과 직업 조직의 구실을 했다.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는 원고담당 사환이나 견습기자로 시작하는 저널리스트 도제를 통해 훈련되었다.

저널리즘에 대한 첫 대학 과정은 1879~84년의 미주리 주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대학교에서 개설되었다. 1912년에는 뉴욕 시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가 뉴욕 시의 편집장이면서 출판인인 조지프 퓰리처의 원조금을 받아 저널리즘에 대한 첫 대학원 과정을 개설했다. 뉴스 보도와 신문사의 운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전문 훈련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더 요구되었다. 또한 정치·사업·경제·과학 같은 특별한 종류의 뉴스를 심층 취재하려면 종종 이러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편집장들은 깨닫게 되었다. 영화·라디오·텔레비전이 뉴스 매체로 등장하면서 뉴스를 수집하고 내보내는 데 있어 쉴 새 없이 늘어나는 일련의 새 기술과 기법들이 요구되었다.

1950년대 무렵에는 대부분의 대학이 저널리즘이나 커뮤니케이션 과정들을 개설했다. 저널리즘에 관한 문헌은 1900년에는 2권의 교과서와 몇 안 되는 강의집과 논설집, 많지 않은 역사책과 전기가 고작이었는데 20세기 후반 무렵에는 수적으로나 종류별로 크게 늘어났다. 그것은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기자와 사진기자를 위한 교재, 저널리즘의 방법과 저널리스트의 자질, 윤리에 관한 저널리스트들의 사상과 논쟁을 다룬 책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저널리즘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은 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산물이다. 초기의 신문들과 잡지들은 일반적으로 정치 분야에서 지나치게 당파적인 경향을 취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당의 입장을 견지하고 반대당의 입장을 비난하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자층이 늘어나면서 신문의 규모와 재정 또한 커졌으며 점차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신문들은 부수를 늘리기 위해 스스로 대중적이고 선정적인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1890년대에 뉴욕 시의 두 신문 〈월드 World〉와 〈저널 Jounal〉 사이에 경쟁적으로 벌어진 '옐로 저널리즘'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사회적 책임의식은 책과 잡지, 협회 모임 등을 통해 보도 책임에 대한 전문 교육과 폭넓은 논의를 실시한 결과 괄목할 만하게 높아졌다. 영국의 왕립 언론 위원회(1949) 보도와 미국의 언론의 자유에 관한 비공식적인 위원회가 쓴 것으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 A Free and Responsible Press〉(1947) 같은 보도들은 현직 저널리스트 스스로 자기 반성을 하도록 자극했다.

20세기 후반 무렵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 집단으로서의 저널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사실을 공정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이상주의적이었다. 여러 저널리스트 단체가 윤리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미국 신문 편집인 협회의 성명일 것이다.

현대의 저널리즘

저널리즘의 핵심은 언제나 뉴스였음에도 뉴스라는 말이 너무도 많은 부차적인 뜻을 내포하여 이제는 '하드 뉴스'(hard news)라는 용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뉴스를 구별하기 위해 명확한 뉴스 가치를 지닌 기사를 가르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것은 주로 신문이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보도가 등장한 결과이다(→ 방송보도).

독자층을 유지하기 위해 신문은 뉴스, 간단한 인물란, 숙련된 작가들이 쓴 시의적절한 시사 논평과 같은 해설류의 기사들을 더욱더 늘리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대부분의 신문, 특히 저녁판과 일요일판은 객관성이라는 전통적인 규칙이 여전히 적용되던 '하드 뉴스'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잡지의 방식을 크게 모방한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보도에서 시사잡지들은 뉴스와 사설 논평을 함께 싣고 있었다.

출판 저널리즘은 비록 그 역사는 짧지만 대단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싼값의 책들이 증가하면서 저널리즘 관련 서적들이 활발하게 출판되었는데, 선거 운동과 정치 추문, 전체적인 세계정세를 보도·분석한 책들과 트루먼 커포티, 톰 월프, 노먼 메일러 같은 작가들의 '뉴 저널리즘'(new journalism)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언론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제한이 다시 가해졌다.

옛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언론 기관을 소유했으며 언론인과 편집인은 정부 고용인이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 기관의 주요기능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나 정부가 선언한 국가의 목표를 뒷받침하고 지지하는 임무를 지녔다. 그 결과 공산주의 국가의 명백한 업적은 언론 매체를 통해 강조하는 반면 그들의 실패는 보도하지 않거나 무시해 버렸다. 이러한 엄격한 검열제도는 공산주의 국가의 저널리즘에 만연되어 있었다.

공산주의가 아닌 개발도상국에서 보도 기관은 다양한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그것은 본국 정부를 난처하게 하는 문제들에 대해 때에 따라 신중하게 자체 검열을 실시하는 것에서부터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엄격하면서도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검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대부분의 영어권 국가들과 서부 유럽 여러 국가들의 보도기관들은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