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트

뷰트

다른 표기 언어 John Stuart, 3rd Earl of Bute
요약 테이블
출생 1713. 5. 25,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792. 3. 10,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스코틀랜드 태생 영국 왕실의 총신.

영국 왕 조지 3세 치세 초기의 5년 동안 조지 3세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총리(1762~63)로 있는 동안 프랑스와의 7년전쟁(1756~63)을 종결하기 위한 평화조약을 교섭하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안정된 행정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1723년 아버지의 백작작위를 계승한 그는 애초에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1747년 조지 2세의 아들이자 웨일스 공(왕세자)인 프레더릭 루이스를 만나 그의 총애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섰다. 1751년 웨일스 공이 죽자 그는 웨일스 공의 아들이자 영국 왕위계승자인 조지의 절친한 동료가 되었다(그는 조지의 가정교사로도 일한 적이 있었음). 조지가 즉위한 후 뷰트는 1761년 3월 국무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는 처음부터 잉글랜드에서 호감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성공적인 전시전략을 수립했던 윌리엄 피트(나중에 채섬 백작 1세가 됨)를 정부에서 축출함으로써 한층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762년 5월에는 뉴캐슬 공작 1세인 토머스 펠럼 홀리스를 대신해 총리직에 올랐으며, 이듬해 2월에는 파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 대한 잉글랜드인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뷰트는 사과술 세금을 부과하여 원성을 사고 또 논쟁을 거듭하던 헨리 폭스에 대한 세습귀족 지위부여 문제에도 연루되는 등 물의를 일으킨 후에 1763년 4월 결국 국무장관직을 사임했다. 조지 3세에 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신임 총리 조지 그렌빌이 1765년 5월 왕으로부터 뷰트를 다시 관직에 등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 후로 뷰트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