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2세

조지 2세

다른 표기 언어 Georg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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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83. 11. 10(구력 10. 30), 하노버 헤렌하우젠 궁
사망 1760. 10. 25, 런던
국적 영국

요약 군사적인 면에서는 열정적이어서 1743년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울 때 용맹을 떨쳤는데 이는 영국 왕 가운데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사례였다. 그는 또 매일 일과를 군사교관과 같은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꾸려나갔다. 또다른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이었다. 오페라를 좋아했으며 독일의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후원자였다. 독일 출신으로 하노버 선제후인 게오르크 루트비히와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사이에서 난 유일한 아들이다. 하노버에서 성장했으며 1705년 아름답고 지성적인 안스바흐의 카롤리네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영국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웨일스 공에 봉해졌다. 왕위에 오른 후 처음 20년간은 주도면밀하게 외교와 내정 부문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월폴에 의존하는 유약한 측면도 보였다.

건전한 정치적 판단력을 소유했으나 자신감이 부족해 각료들에게 심하게 의존했는데 이들 가운데 로버트 월폴 경(卿)이 특히 유명하다.

독일 출신으로 하노버 선제후인 게오르크 루트비히(나중에 영국왕 조지 1세가 됨, 1714~27 재위)와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사이에서 난 유일한 아들이다.

하노버에서 성장했으며 1705년 아름답고 지성적인 안스바흐의 카롤리네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영국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웨일스 공에 봉해졌다. 그와 아버지는 수년 간에 걸쳐 서로를 매우 미워했으며 1717년 무렵에는 드러내놓고 싸웠다. 런던에 있는 그의 처소인 레스터 하우스는 월폴과 타운전드 등이 주도하는 휘그당 반정부세력의 회합 장소가 되었다.

1720년에는 아버지와 일시적으로 화해해 그의 측근인 월폴이 조지 1세의 정부에 입각하기도 했다. 월폴이 조지 1세의 유력한 각료가 됨에 따라 그는 더이상 월폴을 총애하지 않았으며 조지 2세로 즉위한 직후 월폴을 관직에서 쫓아내려 했으나 왕비가 월폴의 편을 들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왕위에 오른 후 처음 20년간은 주도면밀하게 외교와 내정 부문을 발전시켰다.

평화를 추구하고 검소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월폴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의회를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채우기 위해 월폴이 국왕의 관직임명권을 대신 행사하도록 했다. 월폴은 또한 재커바이트(망명중인 스튜어트 가문 왕위 요구자의 지지자)였던 토리당의 다수 유력자들로부터 조지 2세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했다. 그에 따라 1745년 실패로 끝난 재커바이트 반란기간중 유력한 정치인들 가운데 조지 2세의 입장을 저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지 1세 시대의 양상이 반복되는 식으로 조지 2세 및 월폴에 대한 반대세력이 부상했다.

조지 2세와 그의 아들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으며 프레더릭은 반정부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1742년 반정부세력은 월폴을 사퇴시킬 만큼 강력해졌으며 조시 2세는 재빨리 존 카터릿(나중에 그랜빌 백작이 됨)으로 월폴의 빈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카터릿의 오만한 태도는 정치권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월폴과 카터릿은 영국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에 끌어들였으며 이로 인해 정적들로 하여금 영국의 이해관계를 조지 2세의 독일 재산권 요구에 종속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744년 11월 조지 2세는 의회의 압력에 굴복, 카터릿의 사임을 받아들였으며 15개월 후 내각의 집단사퇴(잠정적인 것이지만)로 카터릿의 최대 정적인 윌리엄 피트(나중에 채텀 백작이 됨)를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시들어갔다. 프랑스와 벌인 7년전쟁(1756~63) 때는 전쟁과정을 관망하는 데 그쳤다.

7년전쟁을 영국의 승리로 이끈 탁월한 전략을 수립한 인물은 피트였다. 조지 2세는 1760년 갑자기 죽었으며 그의 손자(프레더릭 루이스의 아들)가 조지 3세로 왕위를 이었다.

생애 전반에 걸쳐 조지 2세는 군사적인 면에 정열을 쏟았다. 1743년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울 때 용맹을 떨쳤는데 이는 영국 왕 가운데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사례였다. 그는 또 매일 일과를 군사교관과 같은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꾸려나갔다. 또다른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이었다.

오페라를 좋아했으며 독일의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후원자였다. 찰스 트렌치가 집필한 전기 〈조지 2세 George Ⅱ〉가 1973년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