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

바스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Pulteney, 1st earl of Bath
요약 테이블
출생 1684. 3. 22, 런던
사망 1764. 7. 7,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휘그당 정치가.

12년 동안 로버트 월폴(1721~42 총리 겸 재무장관)에게 확고한 충성을 바친 뒤 반대진영으로 돌아서 두각을 나타냈다. 3번이나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한 번도 내각을 구성하지 못했다. 그는 학구적이고 다재다능하며 풍자적인 연설 솜씨가 뛰어났지만 진정한 정치가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책임감이 눈에 띄게 부족했다.

1705~42년 하원의원을 지냈으며(1742년에 백작 작위를 받음) 조지 1세의 첫번째 내각에서 육군 장관(1714~17)을 지냈다.

1721년 월폴이 집권했을 때는 고위직에 임명되지 못했고 그뒤에도 국무장관 자리에 오르는 데 실패하자(1724) 월폴에게 적개심을 품고 그를 부패한 정치가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월폴에게 반대하는 휘그당의 당수로서 볼링브룩 자작 1세와 손잡고 통합 야당을 결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정치 신문 〈크래프츠먼 The Craftsman〉(1726~36)을 발행했다. 그의 신문과 뛰어난 의회 연설은 휘그당과, 월폴에 반대하는 토리당 분파의 동맹을 고무시켰고 월폴이 1733년에 포도주와 담배 소비세 법안을 제정하지 못한 것은 바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1735년 볼링브룩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월폴에게 대항하는 휘그당과 토리당의 제휴가 깨지자, 바스의 정치활동은 기세를 잃었다. 1742년 월폴이 실각하자 조지 2세는 바스에게 2번이나 내각 구성을 요청했는데 바스가 그 요청 대신 윌밍턴 백작 1세 내각(1742~43)의 국가재무위원회 위원장 자리와 바스 백작작위를 수락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윌밍턴이 죽자(1743. 7. 2) 그는 공직을 떠났고 오랫동안 그의 숙적이던 헨리 펠럼이 총리가 되었다. 1746년에 바스와 그랜빌 백작 존 카터릿은 내각을 구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 실패로 바스의 정치생활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