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살

라 살

다른 표기 언어 René-Robert Cavelier, sieur de (sire of) La Salle
요약 테이블
출생 1643. 11. 22, 프랑스 루앙
사망 1687. 3. 19, 브래저스 강(텍사스) 근처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탐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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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젊은시절
  3. 뉴프랑스의 확장시도
  4. 마지막 탐험
르네 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René 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
르네 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René 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

개요

일리노이 강과 미시시피 강 줄기를 따라 탐험을 하고, 미시시피 강과 그 지류의 물을 사용하는 모든 지방을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소유라고 주장하고, 그 지방의 이름을 '루이지애나'라고 지었다.

몇 년 뒤 미시시피 강의 어귀를 찾는 탐험도중에 자기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젊은시절

라 살은 예수회파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사제직 수업을 받았으며 22세 때 자신이 모험이나 탐험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1666년 입신출세를 위해 캐나다로 향했다. 몬트리올 섬의 서쪽 끝에 있는 땅을 양도받으면서 그는 단번에 세뇨르(지주)의 지위와 개척자로서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는 러신 여울 부근에 있는 자신의 땅을 경작하면서 동시에 모피 교역의 전초기지를 세웠다. 모피를 팔러 오는 인디언들과의 접촉을 통해 여러 가지 인디언 언어들을 배웠고 정착지 너머 땅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곧 서쪽 변경에 있는 강과 호수들을 건너 동양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는 꿈에 사로잡혔다. 그는 1669년 자신의 토지를 팔고, 오하이오 지방을 탐험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라 살이 오하이오 강을 발견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1672~82년 프롱트나크 백작에게서 뉴프랑스(캐나다의 프랑스인 소유지)의 '투쟁하는 통치자'라는 동족정신을 발견했다. 라 살과 프롱트나크 백작은 화합하여 온타리오 호(湖) 요새(프롱트나크 요새)를 세워서 프랑스의 군사력을 증대시켰고, 이로쿼이족 인디언들의 진입을 막아 호수의 상류지방과 덴마크·영국의 해안거주지 사이에 이루어지던 모피교역을 가로채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교역권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몬트리올의 상인들과 내륙의 인디언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을까 염려하던 선교사들(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롱트나크 요새는 지금의 킹스턴 자리에 건설되었다.

1675년 라 살은 프롱트나크의 대표로 프랑스의 왕궁을 방문한 후에 영주로 임명되었다. 프롱트나크 총독은 그를 "지성과 능력을 갖추었으며 이곳에서 어떤 종류의 사업과 발견이든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추천했다. 루이 14세는 그에게서 상당한 감명을 받고 귀족의 작위를 수여했다.

뉴프랑스의 확장시도

프롱트나크 요새에서 막대한 모피교역권을 장악한 라 살은 사업에 성공했다.

1677년 다시 한번 프랑스를 방문한 라 살은 '뉴프랑스의 서쪽'을 탐험하고 원하는 수만큼의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권한과 들소가죽 교역의 가치있는 독점권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이 계획을 자기자본으로 실행해야 했기 때문에 파리와 몬트리올에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으며, 결국 이후의 사업도 모두 실패했다. 게다가 그의 계획은 예수회 수사들의 반감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어 그들은 라 살의 모든 계획을 완고하게 반대했다. 1678년 라 살은 가장 충실한 벗이자 동맹자가 된 이탈리아의 부유한 군인 앙리 드 톤티와 함께 캐나다로 돌아왔다.

이듬해 초 그는 이리 호에 최초의 상업용 범선 '그리퐁'을 만들었다. 그는 이 범선이 미시시피 강에까지 이르는 내륙탐험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라 살은 나이애가라 폭포 상류에 사는 세네카족 인디언들에게서, 사냥한 고기와 약간의 옥수수로 연명하면서 걸어서 장거리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탐험대의 일원이며 그의 탐험에 비판적이었던 루이 에네팽 수사도 한겨울에 이루어진, 나이애가라에서 프롱트나크 요새까지의 도보여행에 대해 라 살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리퐁' 같은 범선으로 호수에서 미시시피 강 하류에 화물을 운반하려던 그의 원대한 구상은 '그리퐁호'가 난파되고 1680년 2번째 배가 건조되고 있던 일리노이 강변의 크레브쿠르 요새가 파괴됨으로써 좌절되었다.

천성적으로 자부심이 강하고 굽힐 줄 몰랐던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부리려고 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그는 드디어 일리노이 강과 미시시피 강이 만나는 지점에 도착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꿈꾸던 미시시피 강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강을 탐험할 기회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톤티와 그의 동료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돕기 위해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라 살과 톤티는 카누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내려가 멕시코 만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1682년 4월 9일 라 살은 그곳에서 미시시피 강 유역 전부를 프랑스의 소유라고 선언하고 그 이름을 '루이지애나'라고 붙였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비옥한 땅 절반을 프랑스를 위해 얻은 셈이었다. 이듬해 라 살은 일리노이 강의 스타브드 록(지금은 주립공원)에 세인트루이스 요새를 세우고, 이곳에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사는 식민지를 건설했다. 새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퀘벡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프롱트나크는 라 살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총독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는 세인트루이스 요새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거절한 라 살은 왕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 북아메리카를 떠났다. 파리에서 환영을 받은 라 살은 그를 총애했던 루이 14세를 배알했으며, 왕은 총독에게 라 살의 소유권을 모두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보냈다.

마지막 탐험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은 미시시피 강 어귀를 요새화하고 멕시코의 스페인 영토 중 일부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해적들과 1만 5,000명의 인디언 군대의 도움을 받아 약 200명의 프랑스인만으로 이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계획했다. 그의 반대파들은 그 모험이 무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스페인과 전쟁중이던 루이 14세는 스페인인들을 괴롭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이 계획을 승인하고 라 살에게 인원과 배, 돈을 제공했다.

이 모험은 처음부터 불운했다.

프랑스를 떠나자마자 라 살과 해군사령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해적의 약탈과 난파로 인해 배들을 잃었으며 질병으로 많은 이주민을 잃었다. 결국 커다란 계산 착오 때문에 목적지로부터 800㎞ 서쪽에 있는 텍사스의 마타고르다 만에 배가 정착했다. 잃어버린 미시시피를 찾아나섰으나 헛되이 끝나버린 몇 차례의 항해 끝에 라 살은 브래저스 강 근처에서 반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프랑스 제국에 대한 그의 환상도 죽음과 함께 끝났다. 라 살은 죽은 뒤에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프롱트나크와 함께 완고한 노르만인의 자부심에 찬 정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극소수 인물들 중 하나인 톤티는 그를 "당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라고 보았다. 텍사스 식민지의 비극적인 시절부터 라 살이 죽을 때까지 그 밑에서 함께 일했던 앙리 주텔은 그의 훌륭한 장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거만함에 대해서도 썼다. 주텔의 견해로는 이 거만함이야말로 라 살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진정한 원인이었다.

라 살은 성격상의 결함 때문에 방해받았고 지도자의 자질도 부족했다. 반면에 그는 놀랄 만한 이상·강인함·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루이지애나가 프랑스 영토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공허한 허풍에 불과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이 실현시킨 프랑스의 식민제국을 예고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