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프랑스

뉴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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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북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던 프랑스 식민지(1534~1763).
(프). Nouvelle France.

뉴프랑스(New France)
뉴프랑스(New France)

초기에는 세인트로렌스 강, 뉴펀들랜드 주, 아카디아(노바스코샤 주)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포함했으나, 차츰 오대호 연안지역과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의 일부까지 확장되었다.

이곳은 1529년에 조반니 다 베라차노 형제가 만든 지도에 갈리아노바(뉴프랑스를 뜻함)라는 지명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1524년 지금의 캐롤라이나에서 북쪽의 노바스코샤 주까지 북아메리카의 해안을 탐험했다.

그후 1534년 프랑스의 선원인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만으로 들어가 뉴프랑스를 점령해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쳤다. 그리고 수년 내에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몬트리올 시가 있는 라신 급류지역에 다다랐다.

그리고 로베르발 경(卿)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와 함께 지금의 퀘벡 주 근처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 탐험의 결과, 프랑스인들은 세인트로렌스 강과 만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과 모피거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후 사뮈엘 드 샹플랭은 계속되는 모피무역 전매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1603년에 세인트로렌스 만으로 항해했고, 1604년 펀디 만에 들어가 북아메리카에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그곳은 현재 노바스코샤 주의 아나폴리스로열이며, 당시의 이름은 포트로열이었다. 1608년 그는 세인트로렌스 만의 폭이 좁아지는 곳에 터를 닦고 퀘벡이라는 이름의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퀘벡의 요새에는 거주민이 거의 모여들지 않았다. 1627년에 프랑스의 총리대신 리슐리외 추기경은 뉴프랑스사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흔히 '일백회원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로 알려진 이 회사는 세인트로렌스 계곡 전체를 포함해 뉴프랑스 식민지를 인수받았고, 1629년부터 15년 동안 모피무역의 전매권을 독점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연간 200명 내지 300명의 이주민을 뉴프랑스로 데려와야만 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영국이 이 회사의 첫 함대를 포획하자 1629년 퀘벡 식민지는 영국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1632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이 지역을 되찾았고, 뉴프랑스사가 1663년까지 뉴프랑스를 다스리기는 했으나 영국으로부터 입은 타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후 몇 년간 프랑스의 식민지 건설은 주춤했고, 모피무역만이 선교사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주된 관심거리로 남았다.

1663년 루이 14세는 뉴프랑스사의 특허를 취소하고 뉴프랑스를 직할식민지로 삼기로 결정했는데 총독이 형식상·군사상의 수반이 되었다.

직할식민지를 창설하는 외에 루이 14세는 1666년에 트라시 후작 알렉산드르 드 프루빌을 사령관으로 한 1개 연대병력을 파견하여 이로쿼이 인디언족을 물리치고 강제력을 동원해 그들과 강화를 맺었다. 그때부터 뉴프랑스는 이주민이 늘어났고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결혼적령기 처녀들을 포함하여 3,000명 이상의 이주민들이 1660년대에 이곳으로 보내졌다. 그후에는 거의 이주민들이 오지 않았으나 자연증가로 인하여 인구는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최초의 행정장관 장 바티스트 탈롱(1665~68, 1670~72)은 식민지 건설과 산업을 장려했다.

또한 먼 서부지역의 개척을 강행하기도 했다. 루이 졸리에는 미시시피 강을 탐험하여 강줄기가 태평양이 아닌 멕시코 만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알아냈다. 1671년 시몽 프랑수아 도몽(생뤼송 경 도몽이라고도 함)은 수세인트마리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의 내륙지방이 모두 뉴프랑스의 연장부분이므로 프랑스령이라고 선언했다.

그사이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토와 무역문제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윌리엄 왕 전쟁(북아메리카판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 1689~97) 중에 윌리엄 핍스 경이 이끄는 뉴잉글랜드 함대와 군대는 아카디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1690년 퀘벡을 손에 넣으려던 핍스의 도전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후 프롱트나크 백작 루이 드뷔마드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뉴잉글랜드의 변경을 계속 습격해 마침내 이로쿼이족의 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편 뛰어난 능력을 가진 캐나다 청년 이베르빌 경 피에르 르무안은 허드슨 만을 정복하고 아카디아를 되찾았으며 뉴펀들랜드를 공략했다.

이 전쟁은 라이스바이크 조약(1697)에 의해 종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뉴프랑스는 허드슨 만(뉴펀들랜드는 제외)을 고수하고 원래의 소유지들을 확보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캐나다인들이 이룬 일이었다. 이베르빌은 1699년에 뉴프랑스의 또다른 영토인 루이지애나를 건설하기 위해 출발했다. 1700년과 1701년에 이로쿼이족과 뉴프랑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로쿼이족과 뉴프랑스의 인디언 동맹들 사이에도 평화조약이 이루어졌다.

더이상 이로쿼이족과의 전쟁은 없게 되었고, 뉴프랑스는 번영의 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뉴프랑스는 갑자기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과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영국 식민지의 주민들은 뉴프랑스 전체를 정복하려 했는데, 2단계에 걸쳐 정복이 이루어졌다. 첫단계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난 1713년에 끝났다. 1710년에 아카디아는 다시 영국인들의 손에 넘어갔으나 이듬해 허벤든 워커 경이 이끈 원정대는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 심한 타격을 입고 돌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유럽에서 일어났고 유럽에서의 영국의 승리로 전쟁을 종결시킨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영국은 허드슨 만을 되찾고, 뉴펀들랜드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제한시키며, 아카디아를 분할하고(케이프브레턴 섬 제외) 서부의 모피무역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1756년 유럽에서 7년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의 연장으로 일어난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뉴프랑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2년 동안은 프랑스 군대와 캐나다 방위대가 승세였다. 그러나 영국 해군병력의 도움을 받으면서 영국과 미국의 군대가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1758년 루이스버그가 함락되었다. 1759년 제임스 울프가 퀘벡을 점령하고 1760년에 몬트리올이 함락되면서 모든 뉴프랑스 영토가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1763년 파리 조약에 의해 평화가 체결되고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뉴올리언스 외곽에 있는 미시시피 강 동쪽의 모든 뉴프랑스 영토는 대영제국으로 넘어갔다.

뉴펀들랜드 근처에 있는 생피에르 섬과 미클롱 섬이 프랑스령으로 남게 되었고 뉴펀들랜드에 대한 프랑스의 조업권은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퀘벡 주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던 6만 명이 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영국의 신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