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롱트나크

프롱트나크

다른 표기 언어 Louis de Buade, comte de Palluau et de Frontenac
요약 테이블
출생 1622. 5. 22, 프랑스 파리 근처 생제르맹앙레
사망 1698. 11. 28, 캐나다 퀘벡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궁정인이며 뉴프랑스의 총독(1672~82, 1689~98).

많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이윤 많은 서부 개척을 장려하고, 뉴프랑스에 대한 영국과 이로쿼이족의 공격을 물리쳤다.

아버지 앙리 드 뷔아드는 나바르 연대장을 지냈으며 루이 13세의 측근이었다. 어머니는 유력한 퐁샤르트랭 가문의 안 펠리포였으며, 루이 13세는 프롱트나크의 대부였다. 그는 30년전쟁 때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21세 때인 1643년에 노르망디 연대장이 되었으며, 1646년에는 '마레샬 드 캉'(준장)으로 임명되었다. 1648년에 안 드 라 그랑주 트리아농과 비밀리에 결혼했는데, 이 결혼 때문에 안은 부유한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프롱트나크는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궁정에서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데다 낭비벽이 심했다. 1663년까지 그가 진 빚은 무려 35만 리브르를 넘었다. 1669년에 그는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크레타 섬을 지키는 베네치아군에 들어가 중장으로 복무했지만, 상관들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해임될 위험에 처하자 섬을 떠났다.

1672년에 그는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인 뉴프랑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부임한 지 1년이 지나기 전에 그는 온타리오 호 연안에 포르프롱트나크라는 모피교역소를 세웠다. 그 직후에 라 살을 알게 되었는데, 프롱트나크의 지원으로 라 살은 미시시피 강을 탐험하다 중단한 루이 졸리에의 뒤를 이어 미시시피 강 어귀까지 탐험을 계속해도 좋다는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라 살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시간 호 기슭과 일리노이 강 연안에 모피교역소를 세웠다.

그의 부하들은 이 교역소를 기지로 삼아 서부 모피교역의 대부분을 불법적으로 독점했고, 프롱트나크는 그 불법행위를 묵인했다. 이때문에 그들은 몬트리올의 모피상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고, 식민지는 적대적인 두 파벌로 나뉘었다. 루이 14세와 J.-B. 콜베르 장관의 수차례에 걸친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롱트나크는 뉴프랑스의 관리 및 성직자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식민지 내부에서 이런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외부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1675년까지 이로쿼이족 인디언 동맹인 5개 부족 연합은 안다스테족과 모히간족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675년에 이로쿼이족은 다른 부족들을 제압했고, 서부 모피교역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은 모피교역의 중심지를 몬트리올에서 그들이 중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올버니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들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을 공격하고 프랑스인마저 위협했으나 프롱트나크는 거의 무방비상태인 식민지를 강화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은 채 그들을 달래려고만 애썼다.

이 정책은 오히려 이로쿼이족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보다 거센 공격을 조장했을 뿐이다. 결국 프랑스인들은 서부에서 쫓겨날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무렵 영국의 허드슨스베이사가 제임스 만에 교역소를 세움으로써 캐나다의 모피교역에 또다른 위협을 제기했지만, 프롱트나크는 이 위협을 무시했다.

1682년에 루이 14세는 실정을 이유로 그를 소환했다. 후임자인 르 페브르 드 라 바르는 이로쿼이족을 굴복시키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1685년에 직위해제되었다. 그뒤를 이은 드농빌 후작은 인디언과 화해하는 데 성공했다.

1689년 5월에 영국이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자, 프롱트나크는 영국의 뉴욕 식민지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뉴프랑스 총독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드농빌은 유럽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프롱트나크의 원정대는 악천후로 항해가 지연되어 10월 12일에야 퀘벡에 도착했다.

한편 이로쿼이족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뉴프랑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사실을 미리 알고 8월 5일에 무방비상태인 식민지를 공격해 큰 손상을 입혔다(프렌치-인디언 전쟁). 이 공격으로 약 100명의 캐나다인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게다가 프롱트나크가 식민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철이 늦었기 때문에 뉴욕을 침공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1월에 그는 3개 부대를 보내어 스케넥터디·포트로열·새먼폴스에 있는 영국의 변경 정착촌을 공격했다.

이 3곳의 수비대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내었고 정착지는 파괴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부의 영국 식민지들은 뉴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단결했다. 그러나 윌리엄 핍스가 이끄는 공격군은 퀘벡에서 프롱트나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격퇴당했다. 이 전투에서 프롱트나크는 신중한 전술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후 몇 년 동안 캐나다 정착촌에 대한 이로쿼이족의 간헐적인 공격은 캐나다 모피상들이 서부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프롱트나크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기보다는 모피교역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루이 14세는 중부 식민지를 강화하기 위해 내륙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억제했지만, 프롱트나크는 이런 왕의 정책을 무시한 채 기존의 모피교역소들을 강화하고 새로운 교역소를 잇달아 세웠다. 결국 프랑스의 영향력은 슈피리어 호 너머까지 확대되었고, 몬트리올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피는 프랑스 국내시장을 공급과잉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부하들의 강력한 권유와 프랑스 해군장관의 명백한 명령서를 받은 뒤 마침내 1696년에 원정을 시작해 이로쿼이족 마을 두 곳을 파괴했다. 이듬해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끝났지만, 프롱트나크의 후임자는 1701년에 이로쿼이족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프롱트나크는 북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다채로운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루이 14세의 궁정에 많은 연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정을 거듭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연줄 덕분에 부하들의 업적을 자신의 공로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뉴프랑스에 대한 영국과 이로쿼이족의 공격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영토를 몬트리올에서 위니펙 호까지, 그리고 허드슨 만에서 멕시코 만까지 확대한 것은 그가 뉴프랑스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