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W(illiam) L(yon) Mackenzi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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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4. 12. 17, 캐나다 온타리오 벌린
사망 1950. 7. 22, 퀘벡 킹스미어
국적 캐나다

요약 캐나다의 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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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교육
  3. 초기활동
  4. 자유당 당수
  5. 전시의 지도력

개요

자유당의 당수로서의 총리(1921~26, 1926~30, 1935~48)를 역임했다.

캐나다에서 영국계와 프랑스계 국민을 통합하는 데 이바지했다.

교육

킹은 존 킹과 이사벨 그레이스 매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인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는 어퍼캐나다에서 자치정부의 수립을 목적으로 일어난 '1837년 반란'의 지도자였다. 반란 후 매켄지가 망명중일 때 태어난 이사벨은 자신의 아들 킹이 어렸을 때부터 그가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운명을 타고났음을 가슴속에 심어주었다. 킹은 토론토대학교·시카고대학교·하버드 대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영국과 독일을 여행하면서 시야를 넓혔다. 시카고(이곳에서 그는 제인 애덤스 헐 하우스에 머물렀음)와 런던에서는 자신의 후기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캐나다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산업노동자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초기활동

1900년 킹은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직을 거절하고 캐나다로 돌아와 신설된 노동부의 차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노동 관보 Labour Gazette〉를 발행하고, 산업분쟁을 조정하는 등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자유당의 당수이며 총리인 윌프리드 로리에의 호감을 샀다. 킹은 선천적으로 성급한 성격이었지만 장로교의 교육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겉으로는 고상하고 신중하게 보였고, 이런 태도는 그의 제2의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는 신중함 대신 자신이 점점 믿게 된 운명에 모험을 걸었다.

그는 1908년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보수당의 아성인 고향 노스워털루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09년에는 로리에 내각에서 캐나다 최초의 상근 노동부장관을 지냈으나 1911년 로리에 정부가 선거에 패배하자 장관직을 잃었다. 이후 3년 동안 자유당의 홍보와 조직에 전념하며 의회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1914년부터 록펠러 재단의 제안을 받아 미국의 산업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918년 〈산업과 휴머니티 Industry and Humanity〉를 출판했다. 연구기간 동안에도 그는 캐나다에 살기를 고집했고, 1917년 로리에가 이끄는 자유당 소속으로 노스요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자유당 당수

1919년 로리에가 죽자 킹은 자유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사회주의에 집착하지 않는 킹의 사회개혁 주장이 자유당 젊은 층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킹이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1917년의 선거에서 보여준 로리에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그러나 자유당 당수직이 정치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자유당 내에서 영국계와 프랑스계는 징집문제로 분열되었고, 일부 자유당 지도자는 보수당이 이끄는 '연합정부'(Union Government)에 참여했다.

더욱이 농민을 기반으로 한 진보당이 창당되자 서부에서 자유당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었다.

1921년 선거에서 연합정부가 패배한 뒤 킹은 12월 29일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킹과 자유당의 미래는 안전하지 않았다. 1925년 선거에서 그는 다수의 지지를 얻었지만 자유당이 확보한 의석은 보수당의 의석보다 적었다. 자유당의 패배는 명백한 것이었지만 보수당 역시 다수당이 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킹의 내각은 진보당과 독립당의 지지를 받아 의회의 신임을 얻은 후 1926년 6개월 동안 유지되었으나 관세청의 추문으로 의회의 지지를 잃었다. 킹은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총독에게 의회를 해산시키도록 권유했으나 이 권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했다. 보수당 당수인 아서 미언이 정부를 구성했으나 2일 뒤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미언은 의회를 해산했다. 1926년의 선거에서 헌법문제가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많은 선거구에서 자유당과 진보당이 제휴했으므로, 이 선거는 자유당이 다수당이 될 수 있는 최초의 기회였다.

같은 해 9월 25일 킹은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1926년 후반 런던에서 열린 제국회의(대영제국 내 국가의 총리 회의)에서 킹은 제국 내의 자치국가(나중에 영국 연방으로 불림)들에게 평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시의 지도력

킹의 정부는 1930년의 선거에서 패배하여 실각했다.

킹은 이후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기간에 야당을 지도하여 1935년 실시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1948년 은퇴할 때까지 총리를 지낸 그는 전시 6년과 전후 3년의 재임기간 동안 캐나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외정책을 둘러싼 장기간의 분열을 통일하여 전쟁정책을 수행했으며, 징집문제로 초래된 2차례의 정치적 위기(이중 1차례는 그의 정부에게 거의 치명적이었음)를 극복하여 전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정부는 전쟁에 대한 막대한 군사적·산업적·재정적 지원을 펼침과 동시에 이후 경제와 사회복지가 순조롭고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므로 킹의 후임자인 루이스 세인트 로런트는 강력한 정부, 통일되고 효율적인 정당, 고성장의 자신감 있는 국가를 물려받았다. 이러한 업적은 대중에 대한 호소력, 정치적 달변, 강력한 지도력 등이 부족했던 고독한 독신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킹의 성공은 여론에 대한 예리한 직관력과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능력의 결합물로 볼 수 있다.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한 후 1년 6개월 만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