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발

라발

다른 표기 언어 François de Montmorency La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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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23. 4. 30, 프랑스 몽티니쉬르아브르
사망 1708. 5. 6, 캐나다 퀘벡
국적 프랑스

요약 캐나다 최초의 로마 가톨릭 주교.

프랑스의 북아메리카령에 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프랑스 최고 가문에서 태어나 164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소르본대학에서 교회법학위를 받은 뒤 에브뢰 교구의 대부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자리를 사임하고 1654~58년 장 드 베르니에가 이끄는 종교학교인 캉의 에르미타주에서 지냈다.

1658년 6월 라발은 뉴프랑스의 주교이자 대목이 되었고, 1년 뒤에는 퀘벡으로 주재지를 옮겼다. 위대한 이상을 품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따지기를 좋아하는 타고난 성품 때문에 식민지의 공권력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인디언들에 대한 주류 판매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결국 1662년 총독 아보구르 남작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그해 8월 프랑스로 떠났지만 다음해 아보구르 남작이 그를 다시 캐나다로 부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 1663년 퀘벡으로 돌아가 퀘벡 신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는 사제 양성과 함께 은퇴한 사제들의 거주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새 총독과 다투게 되었는데 1664년 새 총독은 '통치의회'에서 라발의 후원을 받던 네 사람을 몰아냈다.

라발의 정치적 세력은 성직자의 권위가 시민 정부의 권위에 반드시 종속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은 장 바티스트 탈롱이라는 새 행정관(왕의 대리인)이 오면서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큰 권위를 유지하였다. 1674년 퀘벡의 주교가 되었는데 이 퀘벡 교구는 북아메리카의 모든 프랑스령을 포함시켜 새로 생긴 교구로 로마 교황청의 직속 관할하에 있었다. 1684년 건강이 나빠져 퀘벡을 떠났고, 왕실에 사의를 표하자 왕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그뒤 몇 년 간 실무적인 면에서 계속 집무를 했지만 후임으로 내정되어 있던 교황청 성직자 생 발리에르가 1685년 총대리라는 직함으로 취임했다.

1688년 라발이 공식적으로 사임하자 생 발리에르가 승계했고, 라발은 죽을 때까지 퀘벡 신학교에서 지냈다. 1852년 퀘벡 신학교는 창립자의 이름을 따서 라발대학교가 되었다. 1878년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처음 시작된 뒤 1960년 교황 요한 네스 23세는 라발이 성인다운 고결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진술한 교령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