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즈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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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William Petty-Fitzmaurice, 1st marquess of Lansdowne 동의어 2nd earl of Shelburne, 윌리엄 셸번
요약 테이블
출생 1737. 5. 13, 아일랜드 더블린
사망 1805. 5. 7,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2nd earl of Shelburne라고도 함(1761~84).

조지 3세 때 총리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 존 피츠모리스는 삼촌이 소유했던 아일랜드의 영지를 물려받음으로써 페티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753년에 셸번 백작이 되었다. 윌리엄은 가정교사에게 배우고 옥스퍼드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받았으며(1755~57)군에 입대해서는 7년전쟁에 참전했다. 해외에 있는 동안 자기 가문의 영지인 치핑위컴 선거구 대표로 의원에 선출되었다(1760). 1761년 재선되어 케리 군(郡) 대표로 아일랜드 의회에도 들어갔지만 그해 5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작위를 물려받게 되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하원의원 자격을 잃고 잉글랜드의 상원으로 자리를 옮겼

뷰트 내각에서는 관직을 사양했으나 그렌빌 내각에서 제1상무장관이 되었다(1763년). 그러나 몇 개월 후에 사임하고 윌리엄 피트 밑에 들어가서 1766년 남부 지역 국무장관으로 일하다가 동료들과의 식민지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1768년 사임했다. 1782년 로킹엄 내각에서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7월 로킹엄이 죽자 총리에 임명되었으나 폭스가 당수로 있던 휘그당이 노스 경(卿)과 제휴해서 1783년 그를 밀어냈다. 소(小)피트가 연립내각 해산 직후인 1783년 12월 내각을 구성했을 때에도 그는 기용되지 못했다. 왕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오만하고 냉정했으므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했으며 노스 경처럼 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피트는 결코 셸번과 상의하지 않았으며 셸번은 자신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더이상 피트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이런 불화도 1784년 12월에 셸번이 랜즈다운 후작작위를 받음으로써 끝났으며 그는 그후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