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헤이스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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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732. 12. 17(구력 12. 6), 영국 옥스퍼드셔 데일스퍼드 근처
사망 1818. 8. 22, 데일스퍼드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초대 인도 총독.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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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벵골 총독직
  4. 정치적 경쟁자들
  5. 인도의 전쟁
  6. 사직과 탄핵
  7. 평가

개요

역대 총독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1772~85년에 인도 업무를 관리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탄핵받았지만 곧 혐의를 벗었다(대영제국).

초기생애

영국성공회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삼촌에 의해 양육되었다.

삼촌은 그에게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게 해주었고, 그는 거기서 문학과 학자의 심미안을 습득하여 후에 인도 문화와 문명에 대단한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학창시절은 1749년 삼촌의 죽음으로 짧게 끝났다. 그는 그후 학교에서 물러나 서기직(동인도회사의 하위직)을 얻게 되어 1750년 17세의 나이에 벵골행 배를 탔다. 1750년에 영국과 인도 간의 거래는 아직 동인도회사가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는 인도의 몇몇 항구의 작은 정착촌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데 전념했다.

헤이스팅스는 회사 종업원으로 경력을 쌓기 위해 처음에는 영업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1756년 이후 회사와 그 종업원들의 전망은 급격히 변화했다. 회사는 인도에서 프랑스와 인도 통치자들과 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고, 1757년 로버트 클라이브가 지휘하는 군대가 플래시 전투에서 벵골의 나와브(태수), 즉 인도인 나와브를 퇴진시켰다. 비록 이 회사가 이 단계에서 벵골 주의 실제적인 통치자로서 자처할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세력이 강력해서 새 나와브들이 이 회사의 들러리가 되었다.

따라서 헤이스팅스를 포함한 사원들은 점점 더 인도 정치에 말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헤이스팅스는 1758~61년에 벵골의 나와브 궁전에서 회사의 대표자로서 일했고, 그후 1761~64년에는 벵골의 내부업무를 통제·조절하는 회사위원회에서 근무했다. 이 위원회에서 신랄한 논쟁이 벌어진 후 그는 곧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헤이스팅스는 자신이 소수파에 속한 것을 깨닫고 회사에서 사임하고 1765년에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벵골 총독직

돈이 모자라게 되자 헤이스팅스는 다시 인도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1769년 그는 마드라스 위원회에 제2인자로 임명되었다. 2년 후에 벵골의 동인도회사 업무를 책임지는 총독으로 다시 보내졌을 때 그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지난번 벵골에 있었던 때 이래로 플래시 전투 이후에 시작된 벵골 지방 정규 인도 정부기구의 해체와 타락은 속도를 더해갔다. 그래도 회사는 새로운 행정제도를 세우기를 꺼리고 있었다. 실질적인 면에서 벵골은 영국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은 무굴 황제의 칙명에 의해 1765년 권력이양을 받은 이후 합법적인 실질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업무는 인도인 관리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유럽인의 참여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헤이스팅스는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비록 그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지나치게 관련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영국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그 권력을 효율적으로 행사하며 정부업무에 좀더 깊숙이 관여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인도에서 영국인의 역할에 대한 그의 견해는 후에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어떤 '계몽'이나 근대화의 사명도 없다고 보았다.

벵골은 철두철미한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통치되어야 하고 그곳 백성의 삶은 변혁에 의해 혼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통치를 보장하기 위해서 영국인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의 통치기간중 가장 건설적인 시기인 1772~74년에 헤이스팅스는 인도의 중앙정부기구를 나와브의 궁전과 분리했고, 이것을 캘커타의 영국인이 지배하는 영국인 거주지 안으로 가져왔다.

세금징수를 효율적으로 감독하기 위해 벵골 전지역의 사법부 행정을 개조했다.(무굴 왕조).

정치적 경쟁자들

헤이스팅스가 벵골에서 전권을 휘두른 시기는 회사의 행정체계에 변화가 일어난 1774년에 끝났다.

그는 새로운 총독직을 얻고 인도령 내의 다른 영국 정착지를 관리해야 하는 새 책임을 맡았으나 이 권력은 다른 4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와 나누어 갖게 되었고, 이들 중 3명은 인도에 새로 온 사람들이었다. 새 위원들은 군대장교 존 클래버링 경에 의해 주도되었고 대단한 능력과 야망을 가진 필립 프랜시스를 포함했는데, 곧 헤이스팅스와 다투게 되었다. 헤이스팅스의 숭배자들은 클래버링과 프랜시스를 거의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프랜시스가 헤이스팅스에게 반대하는 의견에는 진실한 면도 들어 있었다. 즉 헤이스팅스의 개혁 이후에도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것이 벵골에는 여전히 많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영국인들에 의한 뇌물, 금품 강요, 그외의 권력남용은 플래시 이래 너무나 공공연했고 의심할 여지 없이 지속되었음). 새 위원들과 헤이스팅스 사이의 다툼은 벵골 정부를 마비시켰고, 새 위원들은 고국에서 헤이스팅스를 불신임받도록 하려고 인도인들에게 그의 비행을 고소하도록 촉구했다.

반면에 그의 편들은 그런 고소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등 수많은 비열한 에피소드가 나타났다. 이들 에피소드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한 마하라자인 난다쿠마르에 관련된 것으로, 그는 총독을 고소했으나 도리어 문서위조로 고소되어 처형되었다. 헤이스팅스는 이 사법적 살인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난다쿠마르를 제거할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인도의 전쟁

1777년 클래버링이 죽자 헤이스팅스는 다시 전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이후에도 3년간이나 헤이스팅스에 반대했고 이러한 헤이스팅스와 프랜시스 간의 알력은 권총 결투로 끝났다. 프랜시스는 상처를 입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777년까지 벵골 정부는 점점 더 전쟁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도의 몇몇 주와의 전쟁은 언제나 이 회사의 벵골 정복과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무굴 제국의 몰락으로 인도에서 발생한 불안정한 상황에 전적으로 관여해온 이 동인도회사는 이제 제국의 폐허 위에 자생적으로 생긴 세력들간의 다툼 속에 끌려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헤이스팅스의 정책은 단지 일련의 동맹을 통해 이웃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더이상의 정복과 전쟁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774년 벵골의 북서경계에 로힐라족이 점령한 영토를 탈취하기 위해 동인도회사와 동맹을 맺은 오우드국의 와지르를 도와 이미 전쟁에 참여해 있었다. 그리고 1778년 그는 서부·중부 인도 힌두교 추종자의 엉성한 동맹체인 마라타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헤이스팅스는 인도에서 영국인의 안전을 위해서는 마라타 동맹 지도자들과 회사가 친교를 맺어야 하며, 또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사적 압력을 적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 프랑스가 참여한 후 그도 역시 인도양에서 프랑스의 원정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마침내 1780년 남부 인도 마이소르 주의 통치자 하이데르 알리는 마드라스의 영국인을 공격했다. 몇몇 전선에서의 전투는 헤이스팅스에게 승리를 가져왔고, 회사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조직하여 모든 위협에 대처하는 그의 업적은 뛰어난 것이었다. 마라타 동맹은 1782년에 평화롭게 되었으며 1784년에는 마이소르에 평화가 왔다.

1783년 유럽 평화가 오기 전까지는 프랑스인의 활동도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회사의 무역업무는 타격을 받고 고국에서 적대적 의견이 제기되어 회사의 운명이 한계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인해(또는 그가 그렇게 믿음) 헤이스팅스는 특별기금을 모으는 달갑지 않은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그중 바나라스의 라자(raja) 차이트 싱으로부터 회사에 보조금을 요구한 것과 오우드의 왕비(와지르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보물을 징발한 것은 후에 그의 입장을 매우 불리하게 만들었다(마라타 동맹).

사직과 탄핵

헤이스팅스가 결국 1785년 떠났을 때의 인도는 평화로웠고 영국의 지배영역으로서는 완벽했다.

그러나 프랜시스의 주장과 전쟁에 관한 보도가 정당하든 또는 부당하든간에 그의 사임 전에 이미 그의 평판에 손상을 입혔다. 그리고 휘그당의 거물급 국회의원인 에드먼드 버크가 표시한, 인도에서 영국규범에 대한 열정적인 도덕적 관심은 결국 헤이스팅스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 수많은 역사가들은 버크의 절대적 성실성을 인정하지만 버크가 한 개인에게 상황적 악조건의 책임을 지우려고 시도했으므로 그가 악역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이스팅스는 난다쿠마르의 사형집행, 오우드의 왕비들 및 차이트 싱에 대한 조치에 얽힌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심지어 그의 개인적 재정 분야에서 공식 허용치 이상의 돈을 취득한 것 등의 약점이 있었다. 1786년 버크가 그에 대한 탄핵을 시작했을 때(상원에 앞서 하원에 의해 기소) 이러한 결점들은 특히 총리 윌리엄 피트 2세와 하원을 설득하기에 충분했고, 헤이스팅스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상원에서의 재판은 1788년부터 그가 석방되었을 때인 179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오래고 고된 시련이 매우 부당한 조치라고 간주할 수도 있으나, 이 재판과정이 공헌한 점은 인도에서 영국의 미래 통치규범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무죄 방면된 후 헤이스팅스는 한창 활동하던 때처럼 겸손하고 온순한 태도와 학자적 취미를 가지고 은둔한 시골신사로서 85세까지 살았다.

평가

벵골의 초대 총독으로서 헤이스팅스는 인도의 이 주요한 정복된 주에 영국의 통치를 확립하는 데 책임을 다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에 어떻게 거대한 인도의 인구들을 적은 외국인들의 손으로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이제 대표적 세력이 된 영국인들은 18세기 인도의 각 지방주에 적응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들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 해결책들은 인도에서의 영국의 미래 역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헤이스팅스의 활동은 또한 영국의 새 인도 제국 창립으로 생긴 여러 문제(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에 대한 통제의 정도와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고결성의 규범과 공정한 처우의 정도와 같은 문제들)를 고국인 영국 대중에게 환기시킨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일이 미래를 위해 필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