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사

오스트레일리아사

다른 표기 언어 history of Australia

요약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2만 5천 년 전에서 적어도 4만 년 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부터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 유럽인들이 도착할 당시 원주민의 수는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해안에 도착한 쿡은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서 이 토지를 탐험·조사했으며, 동행한 탐험가·박물학자인 조지프 뱅크스는 이 토지가 식민지에 적합하다고 보고했다. 쿡 탐험대는 1770년 8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하고 이곳을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지었다. 1786년 뉴사우스웨일스가 영국의 유형지로 지정되었으며, 영국 해군의 아서 필립 대위가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행정권을 쥐게 되었다. 1792년 그가 귀국 길에 오를 무렵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초가 꽤 탄탄히 다져졌다고 할 만큼 식민지가 발전하게 되었다. 금세기에 와서 광물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이제까지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왔던 지방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중요시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사
오스트레일리아사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2만 5,000년 전에서 적어도 4만 년 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부터 이 대륙으로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 유럽인들이 도착할 당시 원주민의 수는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1432년 중국인들이 지금의 다윈에 도착한 흔적이 일부 남아 있지만,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대해 널리 알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의 대륙 탐험을 통해서였다.

1616년 네덜란드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도착한 후, 1644년 이 대륙이 뉴홀랜드로 알려질 때까지 아벨 타스만과 같은 훌륭한 선원들의 지휘하에 탐험은 계속되었다. 1688년 영국인들이 윌리엄 댐피어의 지휘하에 이곳에 도착했으나, 대규모의 탐험은 1770년 제임스 의 역사적 항해로 이루어졌다.

1768년 제임스 쿡은 약 200년 전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은 명령을 받았다. 영국 해군 및 영국 학사원의 의뢰를 받은 그는 혼 곶을 돌아 타히티를 경유하여 뉴질랜드에 도착했으며, 1770년 4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해안에 도착했다. 쿡은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서 이 토지를 탐험·조사했으며, 동행한 탐험가·박물학자인 조지프 뱅크스는 이 토지가 식민지에 적합하다고 보고했다.

쿡 탐험대는 힘겨운 항해 끝에 퀸즐랜드 북단에 도달했으며, 1770년 8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하고 이곳을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지었다.

1779년 조지프 뱅크스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영국 식민지 건설을 최초로 제안했다. 17, 18세기 동안 영국에서 법률 위반으로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해외로 송출되었는데, 독립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영국은 더이상 범죄자를 미국에 송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범죄자를 국외로 추방하는 형벌은 폐지되지 않았으며, 엔클로저(15~18세기 영국에서 대지주에 의한 토지의 집중화)나 산업혁명과 같은 사회적 격변에 의해 범죄가 현저하게 증가했기 때문에 새로운 유형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86년 뉴사우스웨일스가 유형지로 지정되었으며, 영국 해군의 아서 필립 대위가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행정권을 쥐게 되었다. 필립은 식민지 개척에 주력했으며, 1792년 그가 귀국 길에 오를 무렵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초가 꽤 탄탄히 다져졌다고 할 만큼 식민지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탐험이 전개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대부분의 지역이 이주에 적합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광물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이제까지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왔던 지방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중요시되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 시대

뉴사우스웨일스대

1792년 필립 총독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떠나자 뉴사우스웨일스대(隊)의 상급장교가 이 지역에 대한 지도권을 쥐게 되었다.

1795년 존 헌터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이들 장교들의 세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헌터는 식민지 발전에 힘썼으며, 영국 정부가 세운 정책을 식민지에 적용·실시하고자 했으나 뉴사우스웨일스대의 활동이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식민지는 처음 10년 동안 인구·경지·생산고 등이 모두 증가·확대되었지만 총독과 부대 장교 간의 대립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1800년 과로로 지쳐버린 헌터는 결국 귀국길에 올랐다.

후임 P. G. 킹은 강한 성격과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로, 장교에 의한 전제정치와 화폐 대신 럼 주(酒)를 이용하는 풍습을 시정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장교측의 세력이 강해질 뿐이었다. 이러한 반목은 장교인 존 매카서와 킹측의 윌리엄 패터슨과의 결투로 이어졌다.

매카서가 이끄는 반총독 운동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그는 영국에 소환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킹도 궁지에 몰려 결국에는 파면되었다. 영국에 돌아간 매카서는 부대를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지 개발 및 목양업 경영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양모업의 토대가 되었다.

1805년 새 총독에 임명된 윌리엄 블라이도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뉴사우스웨일스 장교단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윌리엄 블라이(William Bligh)
윌리엄 블라이(William Bligh)

럼 주의 거래 및 토지 취득을 둘러싼 대립·분쟁 결과 블라이가 장교단에 체포·구금되었다. 실권을 잡은 장교단은 토지를 대량으로 나누어가지면서 지위를 한층 강화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들의 파멸의 씨앗이 되기도 했는데, 부대에 대해 귀국 명령이 내려지고 라클런 매콰리가 새 총독으로 다른 부대를 이끌고 오게 되었다.

매콰리는 공공 건물과 도로의 건설, 은행 창설, 탐험과 목축업의 장려 등에 힘썼으며 럼 주를 대신하는 통화를 유통시켰다. 또 죄수의 석방을 앞당기고 형기 만료자에게는 새 삶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구습에 물든 자유식민지측에서는 매콰리의 시정에 반감을 품었으며, 영국 본국도 공공사업에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1817년 J. T. 비그가 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실제 정세를 조사하러 왔다. 비그는 매콰리의 훌륭한 행정능력을 인정했지만 배척자들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매콰리에게 불리한 보고를 했는데, 이는 1821년 매콰리가 정치를 그만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콰리(Lachlan Macquarie)
매콰리(Lachlan Macquarie)
오스트레일리아 자치제도의 발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는 매콰리의 뒤를 이어 1821~25년에 재임한 토머스 브리즈번 총독의 치하에서 경제적·사회적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182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자유로운 정부 형태와, 영국 정부보다 뉴사우스웨일스의 권한을 더 많이 인정하는 자주적인 정치 체제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823년 비그의 보고에 기초해서 영국 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의해 뉴사우스웨일스에는 임명제의 소평의회가 설립됨으로써 법률 제정과 지방세 부과에 관해 총독에게 조언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평의회가 1825년 태즈메이니아에, 1838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 1842년에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도 설치되었다.

그결과 1830년대 후반에는 정치 권력을 영국 정부에서 식민지로 양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완전한 대의제를 요구하는 의견은 강하지 않았으며 유력자층에서는 재산에 따른 제한 선거를 바랐다. 1842년 영국 의회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신평의회를 설치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신평의회는 36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12명은 여왕이 임명하고 나머지 24명은 재산 제한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이 평의회는 모든 세입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았지만 토지 매각 및 그 수입에 관한 권한은 여전히 영국 측에 있었다. 빅토리아와 퀸즐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의 일부로서 이 신평의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토지 정책과 죄수 수송 문제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는 1830년대말의 심각한 불황으로 인하여 1840년대에 들어서는 성장이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1838년 취임한 조지 기브스 총독은 면허를 받고 넓은 토지를 사용하고 있는 스쿼터(토지를 무단 점유하여 목양을 하는 업자)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스쿼터들 중에는 제한구획을 벗어나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이때문에 1840년대초의 6년 동안 계속해서 경제 불황에 시달렸고, 총독과 스쿼터 사이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업자측의 반총독 운동이 실효를 거두어 1847년 평의희에서 업자들에게 유리한 명령이 내려졌다. 이 일로 인해 토지분쟁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한편 1840년 이래로 영국에서 뉴사우스웨일스로의 죄수 수송은 중단되었다.

1846년 영국의 식민장관 글래드스턴은 죄수 수송의 재개 여부를 식민지측 의향에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그것의 필요성을 시사했고, 뉴사우스웨일스 입법 평의회도 죄수 수송 재개를 결정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허시미 호에 죄수를 가득 싣고 수송에 나섰다. 1849년 이 배가 멜버른에 도착했으나 일반 주민의 반대로 시드니로 향해야 했다. 여기서도 강경한 반대에 부딪쳐 겨우 브리즈번에 상륙했는데, 결국 뉴사우스웨일스로의 죄수 수송은 1849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러나 태즈메이니아에는 1853년까지 죄수 수송이 계속되었으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는 1850~68년에 유형 식민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정치적 발전

토지 정책과 죄수 수송에 관한 논쟁은 식민지를 정치적으로 크게 발전시켰으나, 대의제와 의회에 책임을 묻는 완전한 정부의 실현은 금이 발견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골드러시). 1851년 금이 발견되면서 상업 및 농촌의 불황, 인구 정체 등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일시에 호황으로 바뀌었다.

골드러시(gold rush)
골드러시(gold rush)

1850년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정부법이 영국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빅토리아는 뉴사우스웨일스로부터 분리되었으며(1851 실시), 오스트레일리아 각 식민지의 평의회를 완전한 대의제 의회로 전환시키고 헌법제정권도 부여했다. 이듬해 금이 발견되어 식민지 경제력이 증가했고, 1852년에는 토지 지배권이 영국에서 식민지로 완전히 넘어감으로써 이제 식민지는 자주적인 책임정부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는 최초로 헌법 기초에 착수한 식민지였다.

세습제 상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반대가 거세어 결국 상원은 입법의회(하원)의 조언에 따라 총독이 임명하고, 입법의회 자체는 성년 남자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게 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에 이어 제정된 빅토리아 헌법도 거의 같은 노선을 따랐지만, 상원인 입법평의회는 재산 자격에 따른 제한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미 임명제의 평의회를 갖고 있던 다른 식민지들도 1853년 이후 신헌법을 제정했으며, 퀸즐랜드도 1859년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했다.

모든 식민지의 헌법에서 하원은 성년 남자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상원에 대해서는 뉴사우스웨일스처럼 임명제 방식과 빅토리아처럼 재산 제한선거 방식이 있었다.

토지 개혁과 경제 불황

1855년 이래 뉴사우스웨일스의 하원에서 토지문제 조사위원회의 설치가 여러 번 제안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1858년에 스쿼터의 토지를 농민에게 선택하게 하는 법안이 작성되어 이듬해에 하원을 통과했으나, 스쿼터가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의 반대에 부딪혀 법률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1861년 타협안이 양원을 통과하여 농민의 토지 선택권이 인정되었으며, 스쿼터에게도 그 점유 방목지의 1/25의 선매권과 구입한 농지의 3배 이상의 토지에 대한 우선 차지권(借地權)이 주어졌다.

이 법률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스쿼터는 관개·수리 등의 조건이 최상인 토지를 고른 뒤 다른 토지는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가장행위나, 실재 또는 가공의 친척이나 친구 명의로 토지를 구입하는 대역행위(代役行爲)에 의해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해갔다. 한편 빅토리아에서도 1857년 신헌법에 따라 하원이 성년남자 보통선거제를 도입함으로써 토지 개혁파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으며, 하원을 통과한 토지 개혁법안이 상원에서 통과되지 못한 적이 한차례 있었지만 타협 결과 1869년까지 2개의 토지양도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빅토리아 의회에서는 보호관세를 둘러싸고 상·하원의 대립이 있었다.

상공업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하원은 보호 관세를 요구한 반면 유산계급을 배경으로 하는 상원은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그러나 1866년 하원의 승리로 보호관세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비해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자유무역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사금이 고갈된 이후 약 15년간은 불황이 계속되었으며, 1871~92년에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는 해외로부터 적어도 2억 2,000만 파운드를 차입했다. 대부분이 실업구제를 위한 공공사업에 쓰였으며 철도 건설비만으로도 적어도 6,400파운드가 들었다.

1873년 이후 점차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경기 호황이 1883년부터는 투기를 불러 일으켜 불건전한 가격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으며, 결국 건설회사·토지회사 및 그외 투기성의 다수 기업이 도산해서 심각한 경제불황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 성립

연방의 성립

종합적인 조정기구의 필요성이 처음으로 대두된 것은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가 분리되었을 때이다.

이때 영국 정부는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독으로 하여금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을 겸임하게 했으나, 그후 하나의 오스트레일리아 국가와 정부의 성립을 추진하는 운동이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에서 전개되어갔다. 1863년 멜버른에서 최초의 식민지 의회가 개최된 것을 계기로 이와 비슷한 의회가 그후 여러 해에 걸쳐 개최되어 각 주의 의회가 일률적으로 입법할 필요성이 있는 문제에 있어서 의견 통일을 꾀했다. 1900년 각종 이해 세력간의 타협을 거쳐 연방이 성립되었다.

1901년 1월 1일에는 뉴사우스웨일스·빅토리아·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퀸즐랜드·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태즈메이니아 등의 6개주(州)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으로서 정식으로 통일되었다. 중앙 정부가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갖고 나머지 권한은 각 주에서 보유하기로 했다. 최초의 연방의회는 멜버른에서 개최되었는데, 1908년에는 연방의 수도를 캔버라에 건설하자는 안이 가결되었고, 1927년 5월 캔버라에서 최초의 의회가 개최되었다.

신보호주의

1904년 연방 의회는 노동문제의 조정·중재를 위한 재판소를 설치했으며, 1906년에는 농업기계에 관한 관세율 및 물품세법을 제정했다.

그결과 농업기계 수입에는 높은 세율의 관세가 부과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산(産) 기계류에는 '적정한' 임금을 지불한 제품인 것에 한해 물품세를 환불하게 되었다. 관세 제도의 확립을 위해 고용자와 노동자의 이해의 결합을 꾀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보호주의'라 일컬어지고 있다. 1901~13년은 전반적인 번영기로서, 앤드루 피셔를 수반으로 하는 노동당 정권은 전(前) 내각의 사회입법을 이행·확대할 수 있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시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모든 정당이 가능한 한 최대한의 원조를 연합국측에 하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전쟁 비용의 대부분을 내외채로 조달한다는 원칙을 따랐다. 정부가 국민경제에 상당부분 개입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장경제가 유지되었다. 전쟁 직후 3년 동안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당인 오스트레일리아 지방당이 결성·대두되었고, 징병문제를 둘러싼 분쟁·탈당 등의 원인으로 노동당 세력이 급격히 쇠퇴함으로써 전후 오스트레일리아 정계는 크게 변화했으며, 1920년대에는 노동당의 정치 발언권이 거의 사라졌다.

국민당과 지방당의 제휴로 성립된 1923년의 브루스 내각은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반영해 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오스트레일리아는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지 몇 시간 만에 이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는 제조공업국으로 성장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고도의 공업국으로 변모했다.

전쟁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는 국제 정치에서 독립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국제관계에서의 역할도 변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군사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1946, 1947년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은 발생하지 않았고 생활 수준은 계속 향상되었다. 복원·재고용·직업훈련에 대해서는 부흥 및 고용법(1945. 6)에 의해 일반적 방식이 규정되었다. 그러나 1948년이 되자 실업이 아닌 인플레이션이 전후의 최대 과제로 드러났다. J. B. 치플리를 수반으로 정권을 담당해온 노동당 내각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계획경제정책을 채택했는데, 자유지방당은 자유, 개인의 이익, 이윤의 존중을 외쳤다.

경제활동은 양모 가격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정부 지출은 더욱 증대되었다. 1949년 노동당 정부는 명확한 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선거에 임했다가 참패했으며, 계획경제의 해제를 주장한 자유지방당의 R. G. 멘지스 내각이 등장했다(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그뒤 경제는 거의 완전고용이 되었으며 내구 소비재와 생산고도 증가했다.

또한 정부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역설하면서 인플레이션 문제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자유지방당 정부는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공산당원이 일정한 관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으나, 이 정부 제안은 1951년의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순조로운 경제 정세, 노동당의 약체화 등으로 인해 자유지방당은 1951~66년에 무난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레일리아는 안전보장 문제를 주로 국제연합(UN)에 기대했으며,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아시아 국가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점차 격렬해지고 있는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독립 움직임을 두려워하게 된 자유지방당 정부는 도리어 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반공국가 정부들과의 밀접한 제휴를 강조하게 되었다. 1951년 9월 미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사이에 체결된 태평양 안전보장조약(ANZUS 조약)은 일본의 재군비에 대한 상쇄 조치였지만, 이것은 또한 그러한 반공외교 정책을 구체화시킨 최초의 조치이기도 했다.

1954년 9월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 역시 이 지역에 대한 공산 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고자 한 것으로 오스트레일리아도 여기에 가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6·25전쟁에도 참가했으며 남베트남에도 원조와 파병을 했고 말레이시아에도 군대를 파견했다. 1966년 로버트슨 총리가 퇴진하고 전 연방재무국장인 H. E. 홀트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최근 오스트레일리아 외교의 일반적 동향은 ANZUS 조약 및 SEATO에 가입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반공·친미와 아시아 접근 정책이다.

노동당 시대에는 중도노선의 강화라는 목적에서 대미관계가 일시적으로 악화했지만, 다시 자유지방당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긴밀화되었다. 그래서 ANZUS 조약에 따라 안전보장체제를 중시하고 미국 원자력 함선의 기항을 허락했다. 한편 노동당 정권이 착수한 아시아 접근정책은 더욱 적극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프레이저 총리는 1978년 멜버른에서 동남아시아 제국연방(ASEAN)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협력회의를 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압도적으로 영국에 의존했으나, 전후 특히 영국의 유럽 공동체 가입으로 '영국의 식량기지'로서의 역할을 잃게 되면서 영국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영국을 대신해서 등장한 나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은 무역만이 아니라 어업·광업 등의 산업 부문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