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쿡

제임스 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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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728. 10. 27, 잉글랜드 요크셔 마턴인 클리블랜드
사망 1779. 2. 14, 하와이 케알라케쿠아 만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해군장교·항해가·탐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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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항해와 발견
쿡(James Cook)
쿡(James Cook)

개요

제임스 쿡은 1759, 1763~67년 캐나다에 이르는 해로와 그 해안을 탐험했고, 1768~71, 1772~75, 1776~79년 3차례에 걸쳐 태평양을 탐험했다.

그 과정에서 남극대륙의 빙원에서 베링 해협까지,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까지 탐험했다.

초기생애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농장노동자인 제임스 쿡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에 농장의 감독관이 되었다.

농장주인은 어린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제임스 쿡에게 12세가 될 때까지 학비를 대주었다. 10대 초반을 농장에서 보냈으나, 휫비 북부 해안마을에 있는 잡화점에서 일했던 짧은 기간 동안 배와 바다를 접할 수 있었다. 1746년 18세가 될 때부터 퀘이커교도이며 선주인 존 워커 밑에서 일했고, 21세에는 석탄선의 유능한 선원으로 인정받았다. 300~400t급의 그 배는 북해의 무역에서 사용되었는데, 겨울에 수리를 위해 배가 휫비 해안에 정박할 때면(그 정비는 견습공과 선원이 맡게 됨) 쿡은 해안에 머물면서 밤에는 수학을 공부했다.

휫비의 배로 북해의 항로표지가 부실한 해안을 항해하면서 많은 실용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다.

1752년 부선장으로 승진했고, 3년 후에는 선원생활 8년 만에 바크 선(船)의 선장이 되었다. 이러한 순탄한 승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기회와 전문적인 선원으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 해군에 입대했다. 제임스 쿡은 출중한 외모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빠른 진급을 할 수 있었다.하사관 계급의 1등항해사와 갑판장으로 승진한 후, 29세에는 영국의 '펨브로크호' 선장이 되었으며, 1756~63년 영국과 프랑스와의 7년전쟁에서 비스케이 만(灣) 작전, 노바스코샤의 루이스버그 포위작전, 퀘벡 수륙양면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제임스 쿡은 세인트로렌스 강의 지도를 제작해서 울프 장군의 상륙작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겨울 동안 핼리팩스에 주둔하면서 평판(平板)을 이용해 측량을 끝마쳤다. 전쟁이 끝난 후 1763~68년에 스쿠너 선 '그렌빌호'의 함장이 된 뒤 뉴펀들랜드 해안을 조사하고 겨울에는 영국에 정박하여 항해도를 제작했다. 1766년 일식현상을 관찰하고 런던의 왕립협회에 관찰결과를 보내기도 했다.

항해와 발견

1768년 왕립협회는 영국 해군본부와 공동으로 최초의 태평양 학술탐험을 계획했다.

당시 40세였던 제임스 쿡은 탐험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곧바로 해군 대위로 진급된 뒤 '인데버호'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 배는 엉성한 외모와는 달리 튼튼한 휫비의 석탄동력선으로서 만들어진 지 4년이 되었고, 무게는 368t, 길이는 30m가 약간 못 되었다. 쿡의 임무는 금성의 태양통과현상을 관찰하러 가는 왕립협회의 과학자들을 타히티로 수송하는 일이었다. 그 임무를 마친 후, 1769년 6월 3일에 남극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당시 남극대륙은 테라 오스트랄리스라고 불렸다.

당시 철학자들은 북반구대륙들과의 균형을 위해 남극대륙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탐험대 과학자들의 책임자인 조지프 뱅크스는 부유하고 유능한 26세의 젊은이로서 스웨덴의 생물학자인 다니엘 솔란데르와 미술가·천문학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첫 항해 당시 항해달력과 청동 육분의(六分儀:해·달·별 등의 고도를 재는 기구)를 가지고 있었으나, 천문·항해용 정밀시계는 없었다.

전임자들이 타히티에서 순탄한 무역풍을 타고 서쪽과 서북서쪽으로 항해한 반면, 남쪽과 남서쪽으로 역풍을 타고 6개월의 어려운 항해 끝에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이곳의 전역을 지도로 작성했다.

그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태즈먼 해를 건너 1770년 4월 19일 오스트레일리아 남동해안에 도착했다(오스트레일리아사). 동부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면서 퀸즐랜드에 있는 산호초인 그레이트배리어리프를 성공적으로 주항했으며, 산호해와 토러스 해협에 도달했다.

밤에 배가 산호초에 부딪친 적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 충격에서 버틸 수 있었고, 퀸즐랜드 근교의 해안에 정박해서 배를 수리한 후 영국으로 돌아갔다. 식량공급을 위해 잠시 정박했던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30명의 선원이 열병과 이질로 죽었으나, 비타민 C 결핍으로 생기는 괴혈병은 18세기 당시 장기 항해의 선원들에게 크게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쿡의 선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중령으로 승진하고 조지 3세를 접견했으며, 좀더 큰 탐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지프 뱅크스와 그의 과학자들의 성공적인 탐험으로 인해 해군항해에 과학자들이 동행하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는데, '비글호'에는 찰스 다윈이, '래틀스네이크호'에 T. H. 헉슬리, 제임스 로스의 남극대륙 로스 해 탐험에는 J. D. 후커가 동행한 것이 그 예이다. 그 탐험들로 인해 신대륙 발견뿐만 아니라 과학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많이 알려졌다. 1772년 7월과 1775년 7월 사이에 레절루션호와 요함(僚艦) 어드벤처호를 타고 또다른 항해를 시작했다.

남위 70° 이상의 남극지역을 항해하면서 테라 아우스트랄리스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나, 고위도에서의 동서항해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겨울에는 통가 섬과 이스터 섬에 대한 지도를 제작했고, 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와 대서양의 사우스샌드위치·사우스조지아 섬을 발견했다. 또한 제임스 쿡은 실존하는 테라 오스트랄리스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대륙뿐이라는 사실과, 남극의 빙하 너머에 있는 대륙은 모두 얼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항해에서도 괴혈병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대령으로 승진했고, 왕립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괴혈병에 대한 연구로 최고의 영예에 속하는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캐나다·알래스카 근방의 북서항로와 대서양·태평양 사이 시베리아 근방의 북동항로의 존재 유무는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있었던 몇 번의 항로 탐색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북태평양으로부터의 탐색 가능성이 보였다.

이 탐험을 맡은 제임스 쿡은 1776년 7월에 '레절루션호'와 휫비 선인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출발했으나 북서·북동 항로 중 어느 것도 발견되지 못했다. 소형 범선을 훔치려는 하와이 원주민들과의 싸움에서 쿡은 폴리네시아 원주민에 의해 케알라케쿠아 해변에서 살해되었다.

제임스 쿡은 활발한 항해활동으로 인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1762년 34세에 엘리자베스 베츠와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의 절반 이상을 바다에서 보냈다. 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3명은 어렸을 때 죽었고 남은 3명의 아들 중 2명이 해군에 입대했고 1794년 무렵에는 3명 모두 죽었다. 제임스 쿡은 항해에 있어서 철저한 개척정신, 선박조종술, 지도제작법, 바다를 다루는 법, 원주민과의 관계, 바다에서의 과학적 응용 등에 관해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세계지도를 변경시킨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