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런드

포틀런드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Henry Cavendish Bentinck, 3rd Duke of Portland
요약 테이블
출생 1738. 4. 14, 잉글랜드 버킹엄셔 벌스트로드
사망 1809. 10. 30, 벌스트로드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총리(1783. 4. 2~12. 19, 1807. 3. 31~1809. 10. 4).
Marquess of Titchfield, Earl of Portland, Viscount Woodstock, Baron of Cirencester라고도 함.

2차례 총리를 역임했으나 실제로는 모두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의 통제를 받는 이름뿐인 정부 수반이었다. 포틀런드 공작 2세 윌리엄의 맏아들(1762년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음)로 웨스트민스터와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761년 의회에 들어가 1765년 7월부터 1766년 12월까지 궁내대신으로 일했다.

당시 총리였던 로킹엄 후작 2세 찰스 웟슨 웬트워스에게 임명받아 아일랜드 총독으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1782. 4~8). 1783년 셸번 경(뒤의 랜즈다운 후작 1세)이 구성한 내각이 무너지자, 노스 경과 찰스 제임스 폭스는 연립정부를 만들고 포틀런드를 이름뿐인 총리로 앉힌 뒤 자기들은 각각 내무장관과 외무장관을 맡았다. 포틀런드는 상원이 국왕 조지 3세의 고집에 따라 폭스의 인도 개혁법안을 부결한 뒤 해임되었다. 윌리엄 소(小)피트의 제1차 내각에서 내무장관으로 일했다(1794~1801).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중 내부반란에 대한 영국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소요죄와 반역죄에 대한 자의적인 법 적용을 자제해 명망을 얻었으나 1798년 일어난 아일랜드 반란은 억압적으로 다루었다. 그뒤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1801~05). 그가 2번째로 총리가 되었을 때 외무장관 조지 캐닝과 육군장관 겸 식민지장관 캐슬레이 자작(뒤의 런던데리 후작 2세)이 내각을 주도했는데 결국 결투로까지 발전한 두 장관의 불화와 자신의 건강악화로 죽기 직전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