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스미스

골드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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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30. 11. 10, 아일랜드 웨스트미스 킬케니웨스트
사망 1774. 4. 4,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수필집 〈세계의 시민〉(1762), 시 〈황폐한 마을〉(1770),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1766), 희곡 〈그녀는 정복하기 위해 굽힌다〉(1773) 등으로 유명하다. 무명 작가였으나, 다른 작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하고 생기 넘치며 읽기 쉬운 문장력으로 곧 출판업자들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새뮤얼 존슨, 조슈아 레이널스 경, 토머스 퍼시, 데이비드 개릭, 에드먼드 버크, 제임스 보스웰 등 유명인사들을 매료시켜서 곧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골드스미스는 1762년 수필집 〈세계의 시민〉으로 수필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1764년 시집 〈나그네〉로 시인의 진가를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유럽 여행에 대한 추억과 정치적 의견을 담았다. 성공한 작가로서 돈도 많이 벌었으나 무절제한 생활로 빚이 계속 늘어났고 1774년 봄 얼마 동안 병을 앓은 뒤 죽었다.

수필집 〈세계의 시민 The Citizen of the World, or, Letters from a Chinese Philosopher〉(1762), 시 〈황폐한 마을 The Deserted Village〉(1770),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 The Vicar of Wakefield〉(1766), 희곡 〈그녀는 정복하기 위해 굽힌다 She Stoops to Conquer〉(1773) 등으로 유명하다.

골드스미스는 영국계 아일랜드인 목사 찰스 골드스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무렵 가족은 리소이 근교의 저택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더블린에서 불행했던 트리니티 칼리지 학부시절과 1752년 에든버러의과대학으로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의 불행한 일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1749년 2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문학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뒤 아버지가 죽자 친척들의 도움으로 의대에 다녔다. 유럽 여행 후 런던에 돌아왔을 때 의학사학위를 딴 사람에게나 주는 의사(Doctor)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나 사실 에든버러대학에서 학위를 따지 못했고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간신히 유럽을 여행한 2년 동안에도 학위를 받지 못한 것 같다.

인생의 초반부는 1756년초 돈 한푼없이 걸인 같은 모습으로 런던에 돌아오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유명해졌다. 보조약제사·학교수위·의사로서 일을 했으며, 편집·번역·비평 등 닥치는 대로 문필생활을 했다. 거칠고 무식하며 신용할 수 없는 무명(無名)의 젊은 아일랜드 방랑자가 몇 년 만에 런던의 귀족지식계층과 어울리게 된 것은 아직도 놀랄 만한 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것은 다른 이류작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하고 생기 넘치며 읽기 쉬운 문장력 때문이었으며 이런 재능으로 곧 출판업자들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759년 〈유럽의 교양상태에 관한 연구 Enquiry into the Present State of Polite Learning in Europe〉를 시작으로 〈벌 The Bee〉과 다른 정기간행물들, 무엇보다도 1762년 〈세계의 시민 The Citizen of the World〉으로 편집한 수필 〈중국에서 온 편지들 Chinese Letters〉을 내놓아 수필가로 부각되었다.

또 1762년 〈리처드 내시 경의 생애 Life of Richard Nash of Bath, Esq〉를 써냈다.

이미 그는 도움을 주는 유명한 친구들을 사귀어 그들을 화나게도 하고 즐겁게도 했으며 충격을 주기도 하고 매료시키기도 했다. 새뮤얼 존슨, 조슈아 레이널스 경, 토머스 퍼시, 데이비드 개릭, 에드먼드 버크, 제임스 보스웰 등이 바로 그들이다.

1759년 이름없는 작가였던 그는 1764년에 레이널스, 존슨, 버크 등이 만든 유명한 클럽(Club)의 창립회원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격상되었다(→ 문인 클럽). 이들은 매주 모임을 갖고 저녁식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돈도 많이 벌었으나 낭비벽으로 인한 빚 때문에 더 많은 잡문을 써야만 했다.

영국과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책을 비롯해서 전기, 명시선, 번역물, 이해하기 쉬운 과학 등에까지 손을 댔는데 이 책들은 주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으로 작품들을 매끄럽게 살리는 일을 했다. 이렇게 뜯어맞춘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19세기까지 재판(再版)을 거듭했다.

골드스미스는 1762년 수필집 〈세계의 시민〉으로 수필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 수필집은 런던을 방문한 동양인의 눈을 통해 서양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1764년 시집 〈나그네 The Traveller〉로 시인의 진가를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유럽 여행에 대한 추억과 정치적 의견을 담았다. 1770년 더욱 유명한 〈황폐한 마을〉로 시인으로서 명성을 굳혔다. 이 시에는 전원생활의 아름다움과 빈민을 쫓아내는 부유한 지주에 관한 비난이 표현되어 있다.

한편 1776년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로 소설가로서의 자질을 보였는데 시골생활을 묘사한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적인 사건들을 감상적·도덕적 시각에서 다루었으며 전반적으로 날카롭지만 건강한 아이러니를 통해 시골생활을 이상적으로 그렸다.

1768년에는 희곡에 관심을 돌려 〈호인 The Good Natur’d Man〉을 내놓았고 1773년 〈그녀는 정복하기 위해 굽힌다〉라는 작품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희곡은 우스꽝스러운 소란과 생생하고도 익살스러운 성격 설정으로 18세기초에서 19세기말까지 다른 어떤 희곡보다 더 많이 상연되었다. 보스웰이 쓴 〈새뮤얼 존슨의 생애 Life of Samuel Johnson〉에는 마지막 10년 동안에 골드스미스가 존슨을 비롯해 여러 사람과 나눈 대화 내용, 그의 어리석음과 재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성공한 작가로서 돈도 많이 벌었으나 무절제한 생활로 빚이 계속 늘어났고 1774년 봄 얼마 동안 병을 앓은 뒤 죽었다.

골드스미스에 대한 평가

죽을 당시 골드스미스는 수필가·시인·극작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친구인 존슨 경은 "골드스미스가 손대지 않은 문학장르는 없으며 작품마다 빛이 안 난 작품이 없다"고 평했다. 당시 사람들은 작가로서 그를 한결같이 존경했으나 인물됨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영국계 아일랜드인인 그는 세련된 런던 사교계에서 아일랜드 사투리를 썼고 촌스러운 행동을 계속 했으며 태도는 평범했고 외모는 보잘것없는 기인이었다. 몸매도 이상하고 얼굴은 곰보여서 어떤 사람은 추하다고까지 말했다. 일상생활을 잘 이끌어가지 못했고 도박에 빠져 돈이 있을 때는 되는 대로 낭비했으며, 어떤 때는 어려운 사람들을 자신의 재력을 넘어서까지 도와주기도 했다.

작가로서 글솜씨는 우아하고 유려했으나 말은 잘 하지 못했고 말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두각을 나타내려는 끊임없는 욕구와 허영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시기하기도 했다. 골드스미스는 세련된 필체를 가진 확신에 찬 문학가였으나 사생활에서는 아주 무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우 모순된 인물로 보였다. 존슨 경은 이런 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가 펜을 들지 않을 때는 그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그가 펜을 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현명한 사람도 없다."

작가로서의 성공은 어떻게 보면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 장난기있는 아이러니, 즉흥적인 기쁨과 슬픔의 교차 등 문체에서 풍겨나는 인물의 매력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고 간결하면서도 이해시키는 힘이 있다. 소설과 희곡이 성공한 것은 잘 짜여진 구성이나 내용 및 언어 때문이 아니라 인물들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인물이 풍경보다 더 생생하게 독자의 기억에 남는다. 시골목사나 교장 등이 등장하며, D. 개릭과 E. 버크에 대해서 예리하지만 불쾌하지 않게 그려낸다.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읽히는 이유는 전통적인 영웅시체 2행연구(Heroic Couplet)를 18세기 무운시의 장엄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와는 형식에서 상당히 다른 단순한 가락으로 순화시켰기 때문이다. 또 소설과 희곡에서는 당시의 문학적 상상력을 유연하게 표출했다. 그는 인간의 상황, 특히 인간의 곤경을 희극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골드스미스는 리얼리스트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풍자가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관대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감싼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