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즈웰

보즈웰

다른 표기 언어 James Bos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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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0. 10. 29, 에든버러
사망 1795. 5. 19,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전기 작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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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에든버러와 런던 시절
  3. 대륙여행
  4. 스코틀랜드에서의 생활
  5. 존슨의 전기와 런던
  6. 보즈웰에 대한 평가

개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새뮤얼 존슨의 친구이다.

전기 〈새뮤얼 존슨의 생애 The Life of Samuel Johnson〉(2권, 1791)를 썼으며 그의 일기가 20세기에 출판되어 위대한 일기작가로 꼽히게 되었다(→ 색인:논픽션 산문).

에든버러와 런던 시절

아버지 알렉산더 보즈웰은 1749년부터 에어셔 오친렉의 변호사이자 영주였으며, 1754년에 오친렉 경이라는 재판관이 되었다.

보즈웰가는 유서깊고 명망있는 집안이며, 보즈웰은 야심만만한 가족의 강한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5세 때 보내졌던 엘리트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싫어했으며, 8~13세 때는 가정교사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1753~58년에 에든버러대학에서 인문학 과정을 밟았다.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1758년 대학에 돌아왔으나 연극에 매료되었고 로마 가톨릭교도인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는 그를 글래스고대학으로 보내 애덤 스미스의 강의를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760년 봄에 런던으로 도망쳐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런던에서 많은 부인들을 소개받았고, 대도시의 문화와 모여서 쾌활하게 떠드는 관능적·매력적인 여자들을 열렬히 좋아했다. 런던은 그를 충만하게 해주는 온갖 쾌락을 제공했다. 그무렵 임질에 걸렸는데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이 병으로 고생했다.

1760~62년에 집에서 엄한 감시하에 법률을 공부하면서 지루할 때는 연애로 긴장을 풀었고 소핑 클럽(Soaping Club)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사교단체를 찾거나 습작을 했다.

그러나 이때의 글(대부분 시)에는 뚜렷한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 성년이 되었을 때 근위 보병대에 몹시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민법 시험에 합격하면 추가연금을 받아 런던에 가서 신망을 얻어 임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1762년 7월 시험에 합격했다. 그해 가을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그의 천재성이 가장 잘 표현되었다.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은 글로 씌어져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는 상상에 의해 말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마치 어떤 일을 현재 겪고 있으면서 그뒤의 결과는 전혀 알지 못하는 듯이 상세히 기술했기 때문에 그의 일기는 매우 극적이다. 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말을 하고 독특한 몸짓을 하기도 한다.

보즈웰은 1762년 11월에 런던을 다시 방문하여 1763년 8월까지 머물렀다. 런던에 도착한 뒤 곧 스코틀랜드에서 아들 찰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영국성공회식 세례를 받게 했다. 아이의 엄마(페기 도익)는 하녀였던 것 같다. 런던에서는 소설가·극작가·시인이었던 올리버 골드스미스, 급진적인 정치가이며 논객인 존 윌커스를 만나게 되었다.

1763년 5월 16일, 배우이며 서적상인 토머스 데이비스 집의 응접실에서 뜻밖에 새뮤얼 존슨을 소개받았다. 그는 그전부터 존슨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고 오랫동안 그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존슨은 퉁명스러웠지만 보즈웰은 침착성을 잃지 않았으며, 1주일 뒤에 존슨을 방문하여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깊은 우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만났을 때 존슨은 53세, 보즈웰은 22세였다.

계급과 지적 능력의 차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공손히 대했다. 근위대에 들어가려는 계획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겨울 동안 위트레흐트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그다음에 외국여행을 해야 한다는 제안도 받아들였다.

대륙여행

보즈웰은 존슨의 신앙심에 감화를 받아 헤이그 대사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영국교회의 영성체를 받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신앙심이 강했으나 새로운 경험에서 생기는 신선함이 없어지자 곧 시들해졌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한 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지는 악몽을 여러 번 꾸었다. 순결한 생활과 고된 일보다는 방탕한 생활이 더 편하다고 느끼며 실망하다가 곧 이전의 난잡한 생활에 빠졌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구이자 고문이며 제임스 2세파인 마셜 백작 일행과 위트레흐트에서 베를린으로 여행했으나 왕을 만나지는 못했다.

스위스를 지나가면서(1764. 12) 루소와 볼테르를 만나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보즈웰은 이탈리아에서 9개월 동안 머물면서 체계적인 관광에 몰두했다. 나폴리에서 윌커스(당시 추방되어 있었음)와 친해졌으며, 윌커스가 상스럽게 비난한 대상인 뷰트 백작의 맏아들 마운트스튜어트 경과 함께 여행했다. 그의 생애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6주 동안(1765. 가을) 코르시카 섬을 여행하면서 만난 파스쿠알레 데 파올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당시 코르시카를 제노바에서 독립시키는 데 전념한 코르시카의 영웅적인 수령이었다. 파올리도 그의 매력에 끌려 일생 동안 친구가 되었다.

보즈웰은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공상적·정치적인 견해와 사실을 뒤섞어 쓴 글을 신문에 실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생활

보즈웰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1766년 7월 26일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 17년 동안 에든버러에서 매우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변호사로 지냈다.

런던 여행을 좋아했지만 해마다 가지는 못하고 1784년까지 휴가 때 여행했다. 특히 형사소송에 능통했으나 스코틀랜드 형사법원에서는 부도 명성도 얻지 못했다. 1768년 2월에 〈코르시카 이야기 An Account of Corsica, The Journal of a Tour to That Island;and Memoirs of Pascal Paoli〉를 출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코르시카 섬을 병합할 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사람들은 코르시카와 파올리에 매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전효과를 노리기 위해 작가 자신을 책 속에서 매우 순진한 인물로 묘사하고 여행은 단지 파올리를 회고하기 위한 작품 틀로서만 사용했는데 결과는 좋았다. 파올리는 플루타르코스의 위인전을 연상케 하는 기품있는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1766~69년에는 빠져나갈 구멍을 잘 마련해놓은 다양한 결혼계획을 추진하면서 틈틈이 젊은 다즈 부인과의 비밀관계도 유지하는 재미로 시간을 보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샐리도 찰스처럼 아기 때 죽었다. 1769년 11월 마침내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어했던 사촌 마거릿 몽고메리와 결혼했다.

결혼 초기 몇 해 동안 매우 행복하고 열심히 살았으며 아내에게 충실했다. 보즈웰은 의회에 자리를 얻을 수 있거나 적어도 스코틀랜드 재판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파올리가 1771년 스코틀랜드로 그를 만나러 왔으며, 1773년 존슨 박사를 중심으로 조슈아 레이널즈 경이 만든 뛰어난 인물들로 구성된 클럽의 회원으로 뽑혀 그해에 존슨과 함께 유명한 헤브리디스 제도를 여행했다. 그는 비로소 건강하고 똑똑한 5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변호사회의 심사관이 되었고 변호사 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프리메이슨 비밀공제조합의 캐넌게이트 킬위닝 지부장을 2번이나 역임했으나 스코틀랜드의 프리메이슨 총본부장 후보지명은 거절했다. 그러나 1776년경 강한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에어셔의 정치에 무모하게 개입하여, 당시 스코틀랜드의 선거 관리에서 정치적인 독재자로 부각한 헨리 던더스와 맞서게 되었다. 더구나 변호사업도 더 이상 잘되지 않아 마음을 달래려고 폭음을 하기 시작했으나 예전처럼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아내가 임신을 하거나 불평을 하여 떨어져 지낼 때는 과거처럼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이미 1778년에 아내의 결핵은 치명적이 되었다.

1777~83년 〈런던 매거진 The London Magazine〉에 〈우울증 환자 The Hypochondriack〉라는 제목으로 70편의 수필 시리즈를 실었다.

이 글에 전력을 쏟지는 않았지만 유명해질 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었다. 1783년말에 피트의 새 내각의 관심을 끌려고, 피트의 가장 큰 라이벌인 찰스 제임스 폭스가 도입한 동인도 법안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다. 피트는 감사 표시를 보냈지만 그를 임용할 생각은 없었다. 1782년 오킨렉을 상속받아 영지에 관심을 기울이며 빈틈 없이 관리했다.

그러나 런던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으며, 스코틀랜드보다는 잉글랜드에서 변호사업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생각에 빠졌다.

존슨의 전기와 런던

존슨은 1784년 12월 13일에 죽었다.

보즈웰은 〈새뮤얼 존슨의 생애〉를 천천히 집필하면서 일단 존슨과 동행한 〈헤브리디스 제도 여행기 The Journal of a Tour to the Hebrides, with Samuel Johnson, LL.D.〉를 먼저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따라서 그는 1785년 봄에 런던으로 가서 출판 준비를 했는데 헤브리디스 여행기는 그뒤에 출판된 다른 것들보다 더 훌륭하다. 이 여행기는 보즈웰의 일생 중에 가장 건강하며 행복한 시기에 쓰여졌으며, 여행 이야기 그 자체로도 매우 재미가 있고, 존슨과 101일 동안 줄곧 함께 지낸 내용을 실었다.

이 책은 많이 팔렸지만, 보즈웰이 멍청하다는 경멸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뒤에도 이러한 비난이 그의 이름에 붙어다녔다. 실제로 지적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다른 작가와 달리 문학의 기본법칙을 태연하게 어겼던 것이다. 한 인간으로 존경받기를 바라는 작가라면 자신의 장점을 보여줌이 없이 결점만을 드러내놓고 출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즈웰은 자신의 허영과 약점을 역사가처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기록했으며, 존슨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자신의 인격을 무모하게 낮추고 존슨이 비난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그것의 언외(言外)의 뜻을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주지시키지 않았다.

1786년에 이너템플 법학원에서 나와 잉글랜드의 변호사가 되었고 가족들도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뒤 변호사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새뮤얼 존슨의 생애〉였다. 그는 꾸준히 쓰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 몰두했다. 수입은 변변지 않았지만 자식들에게는 비싼 교육을 시켰다. 런던으로 이주한 뒤에 단 한 번, 그것도 거의 비밀리에 에든버러를 방문했다.

아내는 오킨렉에 있고 싶어했고 건강이 악화되자 그곳에 데려다달라고 고집했다. 반면에 보즈웰은 S. 존슨의 전기 완성과 그에게 뜻밖의 용기를 주며 칼라일의 형사법원 임시판사로 뽑히도록 도와준 론즈데일 백작 옆에 있기 위해 런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의 임종(1789. 6. 4)을 보지도 못했으며, 론즈데일과 관계를 청산하려 했을 때는 놀랄 만큼 냉혹한 취급을 받았다.

〈새뮤얼 존슨의 생애〉는 1791년 5월 16일에 출판되었다.

당시 비평가들은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나 보즈웰에 대해서는 비난했다. 그는 문학적인 명성에 대해 매우 즐거워했으나 스스로는 패배자라 느꼈다. 인생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으며 그의 기괴한 태도는 50세를 넘은 한 사람의 방종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보즈웰과 나눈 대화가 글로 발표될 것을 두려워해 그 앞에서 말하는 것을 꺼렸다. 술에 취하고 술상에서 떠드는 습관 때문에 함부로 그를 초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식 5명은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으며 그의 진가를 인정한 편집자 에드먼드 말론과 몇몇 친구들도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1793년 7월 〈새뮤얼 존슨의 생애〉 제2판이 인쇄된 것을 보고 제3판을 쓰기 시작, 1795년 죽기 전까지 계속했다.

보즈웰에 대한 평가

사람들은 보즈웰이 출판하지 않은 글이 죽은 뒤에 곧 없어졌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으나 그중 많은 글이 1920년대에 더블린 근처의 맬러히드 성에서 발견되어, 미국인 수집가 랠프 H. 아이셤에게 팔렸다고 보즈웰의 4대 손자인 맬러히드의 톨벗 경이 밝혔다. 이 글과 1930년대에 맬러히드 성에서 발견된 글은 애버딘셔에 있는 보즈웰의 유언 집행자 후손의 집에서 클로드 컬러 애벗 교수가 찾아낸 것과 함께 묶여서 예일 대학에 팔려 체계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새뮤얼 존슨의 생애〉는 보즈웰의 다른 글이 출판되면서 그 독특한 가치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으나 앞으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질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 저작의 뛰어난 점은 존슨의 대화를 확장시킨 것인데, 일기의 일부가 통째로 대화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오늘날에도 일기는 계속 출판되어 20세기 작가들과 능력을 겨룸으로써 예술가로서의 그의 재능이 더욱 인정받고 있다. 일기를 통해 일반독자들은 처음으로 작가의 여러 모습에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