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그레츠 전투

쾨니히그레츠 전투

다른 표기 언어 Battle of Königgrätz 동의어 자도바 전투, Battle of Sadowa

요약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7주전쟁 때 벌어진 결전(1866. 7. 3).
자도바 전투라고도 함.

쾨니히그레츠 전투(Battle of Königgrätz)
쾨니히그레츠 전투(Battle of Königgrätz)

엘베 강 상류에 있는 보헤미아의 도시 쾨니히그레츠(지금의 흐라데츠크랄로베) 북서쪽에 있는 자도바라는 마을에서 벌어져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고 그결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지배하의 독일에서 제외되었다.

보헤미아 전선에 있던 약 24만 1,000명의 오스트리아군 병력은 총구로 탄환을 장전하는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했고, 총검을 이용한 돌격전술에 의존했다.

사령관으로 갓 임명된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리터 폰 베네데크 장군은 부대와 현지 지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휘관 자리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28만 5,000명에 이르는 프로이센군은 헬무트 폰 몰트케 총참모장의 지휘를 받으며 작센에서 슐레지엔까지 활 모양으로 뻗어 있는 434㎞의 전선에 3개 부대로 나뉘어 포진하고 있었다. 몰트케는 이 전투에서 자신이 고안한 새로운 전술과 전투 방법을 시험하고자 했다. 프로이센군은 후장식 단발총으로 무장했고, 유럽의 전투 역사상 처음으로 철도수송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전투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둔 뒤, 몰트케는 7월 1일에 3개 부대를 하나로 모았다. 프로이센군의 정찰이 불완전했고 베네데크는 좀더 유리한 지점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 군대는 7월 3일에 불리한 위치에서 맞부딪쳤다. 오스트리아군은 약 4만 명을 잃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포로가 된 반면, 프로이센군의 손실은 1만 5,0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베네데크는 남동쪽으로 후퇴했다. 프로이센군이 그들을 추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모라비아의 올뮈츠(올로모츠)에 재집결할 수 있었다. 양쪽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빈 근처에서 다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인 7월 26일 니콜스부르크(미쿨로프)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베네데크는 패배의 책임을 문책받고 퇴역당했다. 프로이센군은 그들의 전력을 시험한 이 전투에서 여러 번의 실수를 했지만, 이 실수는 값진 교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