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다른 표기 언어 Franco-Prussian War

요약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의 야심을 역이용하여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1870년 7월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으나 독일군의 효과적인 공세로 4주 만에 프랑스군을 메스 요새에 가두어놓았고 프랑스군 주력부대도 스당에서 포위당한 후 항복했다.
프랑스 국민방위군 정부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1871년 1월 파리 역시 독일군에 항복했다. 전후 프로이센의 독일 지배는 확고해졌고 독일 국가들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은 종식되었다.
프랑스의 패배는 유지되었던 교황청의 세속 권력을 붕괴해 1870년 이탈리아 군이 로마에 입성했다. 또 러시아 정부는 파리 조약을 깨고 동부 유럽에서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재개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육군이 프로이센을 격파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서 실추된 황제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전쟁을 감행했다.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역이용하여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에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외교관계는 1870년 7월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레오폴트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려던 프로이센측의 시도로 매우 악화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의 반프랑스 동맹 가능성을 내포한 위협으로 보였다.

프랑스 대사는 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빌헬름 1세를 방문하여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에 대한 공식적인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빌헬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 전말을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렸다(엠스 전보). 7월 14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분시켜 전쟁을 도발시킬 목적으로 전보를 자극적으로 조작하여 공표했다(→ 엠스 전보). 프랑스는 5일 뒤 전쟁을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남독일 국가들이 프로이센 편에 서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계획하고 지휘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공세는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병력동원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독일군은 4주 만에 바젠 장군 휘하의 프랑스 야전군을 메스 요새에 가두어놓았다.

바젠 장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보려 했으나 이미 실패했다(→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마크 마옹 원수가 지휘하고 나폴레옹 황제가 직접 가담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바젠 구출작전을 시도했으나 8월 31일 스당에서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포위당했다(→ 스당 전투). 9월 1일 프랑스의 스당 탈출작전은 실패했으며 9월 2일에 나폴레옹과 마크 마옹을 포함한 8만3,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항복했다(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스당 전투).

프랑스의 저항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저항의 주역은 1870년 9월 4일 파리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 폐위와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새로운 국민방위군 정부였다. 9월 19일 독일군은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파리 포위전). 새 정부의 쥘 파브르 외무장관은 비스마르크와 협상을 벌였으나 독일이 알자스와 로렌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임시정부 수반이던 레옹 강베타는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뒤 지방에서 새로운 프랑스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새로운 군대도 독일군을 무찌를 수는 없었다. 바젠은 10월 27일 메스에서, 그리고 파리는 1871년 1월 28일 각각 항복했다.

1월 28일자 휴전조약에는 최종적인 평화조약 체결권을 갖는 프랑스 국민의회의 선거 조항이 포함되었다. 마침내 이 협상안은 아돌프 티에르와 파브르의 주도로 2월 26일에 조인되었고 3월 1일 비준되었다. 이때부터 1871년 5월 10일 공식적인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중에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공화국 정부가 전복되고 급진주의자들은 파리 코뮌이라는 단명한 정부를 구성했다.

파리 코뮌이 2개월 만에 진압된 뒤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이 실행에 옮겨졌다. 독일은 메스를 포함해 알자스 전체와 로렌의 대부분을 합병했다(알자스로렌).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배상금이 완납될 때까지 프랑스 북부 주의 독일군 점령경비를 부담해야 했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프랑스 왕궁이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된 1871년 1월 18일 비스마르크의 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이센의 독일 지배는 확고해졌으며 독일의 여러 국가들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은 종식되었다.

프랑스의 패배는 2가지 중요한 효과를 가져왔다. 1867년 이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유지된 교황청의 세속 권력이 붕괴되었고, 이탈리아 군대가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동시에 러시아 정부는 흑해 연안에서 자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한했던 파리 조약(1856)의 해군 조항을 거부했으며 동부 유럽에서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재개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40년간은 유럽의 주요열강들 사이에 극도로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