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

다른 표기 언어 Napoleon III 동의어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요약 테이블
출생 프랑스 파리, 1808. 4. 20
사망 1873. 1. 9, 잉글랜드 켄트 치즐허스트
국적 프랑스

요약 전제정치를 통해 프랑스에 20여 년에 걸친 안정된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서 패했다.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0년에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보나파르트였다. 황제가 되겠다는 열망이 있었으며, 1848년 12월 선거에서 모든 계층 유권자들에게서 골고루 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헌법을 개정하고 제2제정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는 산업을 발전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정치를 펼쳤다. 말년에 이르러 전쟁의 와중에서 폐위되었고, 포로 생활을 거친 후 영국에서 살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망명지에서의 어린시절
  3. 왕위요구
  4. 대통령시절
  5. 황제로서의 국내정책
  6. 황제로서의 대외정책
  7. 개혁시도
  8. 말년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개요

전제정치를 통해 프랑스에 20여 년에 걸친 안정된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서 패했다.

망명지에서의 어린시절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0년에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보나파르트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린시절과 청년기를 주로 망명지에서 보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어머니 오르탕스도 보나파르트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스위스에 자리잡아 1817년 아레넨베르크 성(城)을 사들였다. 낭만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어린 루이 나폴레옹에게 나폴레옹 1세의 천재성을 열렬히 찬양하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사랑스럽지만 고집센' 이 소년은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닌(1821~23) 뒤,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루이는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면서 부르봉 왕정복고(王政復古)의 희생물이 된 다른 망명자들과 친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교황의 지배를 받는 이탈리아인들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는 역사에 가장 큰 흥미를 가졌고 국민의 자유라는 이념에 고무되었다.

따라서 1830년 실패로 끝난 로마 교황령 정부전복음모와 1831년 중부 이탈리아 반란에도 가담했는데, 이 난리 속에서 사랑하던 형이 죽었다. 그는 어머니가 위험을 무릅쓰고 개입한 덕택에 오스트리아군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왕위요구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한 그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로 군사훈련을 마치고 경제와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공부를 했다.

직접 정치와 군사문제에 대해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치에 대한 명상 Rêveries politiques〉(1832)이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황제가 있어야만 프랑스에 영광과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자신의 이념을 선전하는 한편 추종자들이 모이기를 원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이므로 프랑스군의 지지를 받으리라 믿고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1836년 10월 30일 스트라스부르 수비대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루이 필리프 국왕은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가 1837년초 그의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다시 불러들였다. 1838년에는 프랑스의 압력으로 스위스에서도 쫓겨나 결국 영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1839년에 그는 〈나폴레옹 이념 Des idées napoléoniennes〉을 출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나파르트주의는 제1제정 때 혜택을 입었던 사람들의 추억거리이거나 따분한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낭만적인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소책자를 통해 그는 보나파르트주의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영감에 따르기도 했다. 그에게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합리적 고찰과 신념이 낳은 것이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의 주역은 신의 소명을 받아 진보를 실현하는 위대한 인물이며, 이 소명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나폴레옹 1세야말로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새로운 사상을 가져온 구세주'인 나폴레옹 1세는 '나폴레옹 이념'을 통해 살아남았는데, 그의 '정치적 신조'를 종교적 신조처럼 지키려는 순교자와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이념은 다음과 같다. "질서와 자유, 민중의 권리와 권력의 원칙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사회적이고 산업주의적인 이념이며, 인도주의적이고 무역을 장려하는 것이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 과업을 완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1840년 8월 6일 56명을 거느리고 불로뉴 근처에 상륙했으나 그곳 수비대가 합세하지 않아 또 실패했다.

체포당해 재판에 회부되어 "성채 안에 영원히 가두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함(Ham)의 대학'(그가 갇혔던 성의 이름)에서도 앞으로 황제가 될 경우를 생각해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프랑스 야당세력들과 서신왕래를 했고 이들이 내는 신문에 글을 싣기도 했다. 몇 개의 소책자도 썼는데 그 가운데 〈빈곤의 퇴치 Extinction du paupérisme〉(1844)는 좌익의 지지를 얻었다. 1846년 5월 25일 마침내 탈출에 성공해 영국으로 도망쳤고, 권력을 잡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머물렀다.

대통령시절

1848년 2월 혁명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로 달려갔으나 임시정부는 그를 쫓아냈다.

그러나 지지자 몇 명은 소규모의 보나파르트 당을 조직해 그를 제헌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했다. 6월 4일 4개 주(州)에서 당선되었으나 좀더 상황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며 이 자리를 사양했다. 9월에 다시 출마해 5개 주에서 당선되었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대통령 출마 준비에 들어갔다. 루이는 새로 창당된 질서당(Parti de l'ordre)의 지원을 받았는데 부르봉 왕가, 루이 필리프,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다. 이들은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탓에 노련한 정치가는 아니었으나 대중에게 인기있던 루이를 쓸 만한 인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제헌의회 의원 선거 때와 같은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프랑스의 영광스런 추억이 서려 있는 나폴레옹의 전설적인 위업을 환기시키며 평화로웠던 옛 시절을 되찾을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또한 각 계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여 모든 유권자 집단의 지지를 얻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 대해서는 '지원'을 약속했다. 1848년 12월 선거에서 모든 계층 유권자들에게서 골고루 표를 얻은 후보자는 루이뿐으로 모두 543만 4,226표를 얻었다.

대통령이 된 루이는 1849년 5월 입법의회 선거에서 승리했던 질서당 소속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집권한 새 정부는 원정군을 파견해 교황이 로마를 되찾도록 도왔다. 한편 프랑스 안에서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던 공화파들을 정부요직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그러나 국민의회에서 루이가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의원들은 고작 12명 정도의 보나파르트 당원들뿐이었다. 그는 헌법이 보장한 권한을 충분히 활용해 조심스럽게 세력을 넓혔고 행정부와 군의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앉혔다. 10월 31일 처음으로 그는 국민의회보다는 그에게 더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고, 전국을 돌며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1851년 경제상태가 나빠지자, 이를 구실로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부추겼고 있지도 않은 혁명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선전했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으로 중임할 수 없었다.

그는 헌법개정에 필요한 의원수 3/4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화파들만이 저항했으나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패배했고 파리에서도 시가전 끝에 12월 4일 패했다. 수천 명이 체포당해 추방되었으며 루이 나폴레옹은 입법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승인을 받자 자신을 얻은 그는 1852년 11월 또 국민투표를 실시, 상원에서 제정을 다시 실시하기로 결의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자기와 신분이 같은 공주와 결혼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853년 1월 여백작인 외제니 드 몽티조와 결혼했다.

황제로서의 국내정책

나폴레옹 3세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항상 대중여론에 앞서가려고 했다.

따라서 여론을 검토하고 선전을 통해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몹시 신경을 썼다. '합당한 자유'를 약속했지만 한동안 경찰국가의 통치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함과 번영을 위한 모든 문제를 선도해나갈" 생각으로 공공사업·철도건설·은행설립을 비롯해 공업과 농업발전을 촉진시켰다. 대규모의 기술개발에도 열정을 쏟아 후원했으며 발명가들을 지원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파리를 근대적으로 재건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말한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빵값을 낮게 유지시켰고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 건설을 촉진시켰으며, 중재위원회도 설립했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서로 돕는 사회에서는 사용자와 노동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는 사회복지기관에 자주 기부금을 하사했으며 시민들도 이같은 일을 본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중산계급은 그를 사회주의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보호자로만 여겼으며 그의 사회적 구상은 이상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로서의 대외정책

나폴레옹 3세는 국내정책과 마찬가지로 대외문제에서도 곧 바로 주도권을 쥐었다.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평판이 나빠지는데도 이를 방치했기 때문에 몰락했다. 나는 뭔가 일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프랑스에 커다란 치욕을 안겨준 1815년의 빈 회의의 결과로 생긴 유럽 체제를 깨뜨림으로써 다시 한번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명시대에서 군사적 성공이란 일시적인 것이며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언제나 대중의 여론"이라고 확신한 그는 "관대하고 고상한 사상의 맨앞에서 행진할 것"을 계획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상은 민족성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더 지속적이고 공평한 기초 위에 유럽의 세력균형을 재건"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원했고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림 전쟁으로 그는 자신의 구상 가운데 하나(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는 것)를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파리 회의에서 강화조건이 타결되자 나폴레옹 3세는 유럽의 중재자가 된 것 같았다. 한편 이탈리아 혁명가인 펠리체 오르시니가 그를 저격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는데(1858. 1),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통해 "이탈리아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던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과 힘을 합쳐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는 전쟁에 돌입했다. 우수한 병기(兵器)의 중요성을 주장해왔던 나폴레옹은 근대화된 프랑스군 포병대가 눈부신 전과를 올리고 계류기구(繫留氣球)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1859년 6월 솔페리노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두자 자신이 군사적으로도 천재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연방이 개입할 가능성에 놀라 갑작스럽게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느슨한 연방국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통일 이탈리아 건설을 들고 나와 그에게 대항하던 이탈리아의 카보우르 백작의 책략에 말려들어 니스와 사부아를 양도받고 손을 떼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이런 행동은 영국의 불만을 샀다. 1860년 영국-프랑스 통상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회의적이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군함건조, 식민지와 동양권 국가에 대한 정책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오스트리아-프랑스 피에몬테전).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상품을 판매할 새로운 통상 방식과 새로운 출구"를 만들고 "그리스도교와 문명의 진보"를 촉진할 것을 꿈꿨다.

따라서 통상이익을 증대시키고 그 기지(基地)를 마련하기 위한 식민정책을 추구해야 했다. 인도차이나와 서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동에서는 알제리인에게 더 나은 대우를 보장하여 튀니지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모든 지역의 아랍인들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얻어내려고 했다. 그는 수에즈 운하 건설도 지원했으며, 프랑스의 보호를 받으며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계통의 마론파(派) 교도들이 박해를 받자(1860) 원정군을 파견해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했다.

개혁시도

1860년 나폴레옹 3세는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어도 될 만큼 정권이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다.

재정을 늘리고 국민의 생활비를 감소하기 위해 자유무역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경제정책의 첫번째 조치로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의회의 기능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정부의 모든 정책을 세우는 데 더 직접적으로 간여할 거대한 국가체제"를 만들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기대했던 만큼 이뤄지지 않았다. 경제악화로 불만이 쌓인 중간계급과 노동자들은 그의 반(反)교황적인 이탈리아 정책에 분노한 가톨릭교도들과 합세하여 반대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해갔다.

1857년 선거에서는 5명의 반대세력만이 국민의회의 의석을 차지했지만 6년 후에는 32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방광결석증이 재발하여 1856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 3세는 일시적으로 무력상태에 빠졌다. 그는 정부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자신이 직접 간여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장관들은 한낱 허수아비일 뿐이었으나, 이제는 측근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측근들은 파당을 이루어 서로 음모를 꾸몄다.

1863년 '부황제'(副皇帝)란 별명을 가진 권위주의자인 외젠 루에르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배다른 형제인 모르니 공작의 조언을 듣고 계속 자유화 정책을 폈다. 또한 민주적인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운 삼촌 제롬 보나파르트의 도움으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양보조처들(1864년의 결사의 자유 승인, 1868년의 집회의 자유 인정, 의회의원의 권리확대, 언론법의 자유화 등)은 많은 단서조항 때문에 제한을 받았고, 또 시기적으로도 너무 늦었다.

그는 1863년부터 교육부 장관이던 빅토르 뒤뤼이가 교육에 대한 교회간섭문제로 성직자들과 싸우는 것을 용인했는데, 한편으로는 새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의 분쟁타결에 노력함으로써 프랑스 가톨릭교도들과 화해하려고 했다.

1861년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의 대공(大公)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의 자리에 앉힐 것을 제의했고 에콰도르의 대통령과 '안데스 왕국'의 건설문제를 협의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진출을 꾀했다.

이로써 프랑스에 돌아올 물질적 보상을 기대했으며, 미국이 더이상 라틴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안데스 왕국이 견제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자마자 프랑스를 남아메리카에서 몰아냈다. 1863년 유럽에서 폴란드 항거가 일어나자 그는 폴란드인들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러시아에 대항하여 폴란드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동정 때문에 러시아와 사이가 멀어졌다. 더욱이 유럽 열강들에 유럽을 재정비하기 위한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호의적이었으므로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덴마크와 싸워서 해결했을 때도 초연한 자세를 지켰다. 그는 북독일지역에서 세력을 넓히려는 프로이센의 구상에 항상 동조했다. 그러나 이같은 지원에 대한 대가를 공개적으로 비스마르크에게 요구한 적은 없었다.

1866년 프로이센이 덴마크를 친 뒤 옛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나폴레옹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스트리아군을 패배시켰을 때 그는 프로이센 편에 선 어떤 군사적 개입도 거부했으며 단순한 중재자로서 역할만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이 중립을 지켰다고 해서 독일 영토를 떼어줄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그 대가로 벨기에를 얻으려던 그의 계획은 1867년 룩셈부르크를 얻으려던 일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룩셈부르크 요새에서 프로이센군이 철수한 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보상이 못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날 속이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황제는 속지 않는다"고 못마땅해 했고 비스마르크가 마인 강을 넘어가 남부 독일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말년

황제의 대외정책이 실패를 거듭하게 되자 황제 반대파의 세력이 커졌다.

1869년 선거에서 집권정부는 443만 8,000표를 얻었고, 반대세력은 335만 5,000표를 얻었을 때, 나폴레옹 3세는 체제의 진정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70년 1월 그는 모르니가 자유주의적 제국 총리에 가장 적합하다고 추천한 올리비에 에밀 올리비에를 총리로 임명했다. 새 내각은 프랑스가 무장해제할 준비가 되었다고 영국과 프로이센에게 알렸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조하기를 거절했다. 7월 2일 프로이센 왕의 친척인 호엔촐레른가의 한 대공이 스페인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프랑스는 이것이 프랑스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프로이센이 개입한 것이며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나폴레옹 3세는 즐겨 썼던 비밀외교를 통해 호엔촐레른가의 대공이 입후보를 포기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때 이 병약한 프랑스 황제는 호전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측근들의 말을 받아들여 프로이센에게 호엔촐레른가의 스페인 왕위계승문제를 재론하지 말라고 요구하여 굴욕감을 안겨주려 했다.

그결과 7월 19일 전쟁이 터졌다. 몸이 불편한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에서 싸우다가 죽으려 했으나 결국 9월 2일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폐위되었고, 9월 4일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후 영국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기술과 사회문제를 공부했고 각종 출판물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변호했으며, 심지어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 제위에 복귀할 생각까지 했다. 그는 방광결석 제거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나폴레옹3세의 죽음
나폴레옹3세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