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올리비에

다른 표기 언어 Émile Olliv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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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5. 7. 2, 프랑스 마르세유
사망 1913. 8. 20, 생제르베레 뱅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작가·연설가.
Ollivier는 Olivier라고도 씀.

그는 나폴레옹 3세의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나폴레옹의 독재정치와 프랑스의 의회정치 사이에 타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법률을 공부했고 젊어서 사회주의운동과 낭만주의 운동에 심취했던 그는 1848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슈뒤론 주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848년 12월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국 대통령이 되자 올리비에는 관직에서 해고되었다. 그뒤 1849~57년 공직을 전혀 맡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제2제정의 압력으로 인해 사회주의 활동을 포기했다. 1857년에 입법의회 의원이 된 그는 5인방으로 알려진 공화국의 소수 권력자들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당시 이들 5인방은 나폴레옹의 독재정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올리비에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낸 특이한 형태의 공화주의사상을 점차 발전시켰다. 그는 정부의 형태는 시민의 자유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혁명이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반면 방해하기도 한다고 여겨 자유주의적 개혁은 폭력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1860년 11월 자유주의적 요소를 인정하자 올리비에는 공화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나폴레옹은 1870년 1월 2일 올리비에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헌법의 초안을 마련하고 여러 위원회를 설치하여 노동·교육·법률 등의 분야에서 완전한 개혁을 준비했다.

그가 공직에 오른 지 6개월이 조금 넘은 1870년 7월 19일 그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 전쟁에 패한 탓으로 그가 꿈꾼 자유주의 제국을 향한 모든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전까지는 나폴레옹이 외국의 복잡한 문제에 되도록 관여치 않기를 바라는 평화애호가였던 올리비에가 이제는 프랑스의 명예가 무시되었다는 이유로 전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1870년 9월에 공직을 사퇴한 후 다시는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그뒤 43년의 여생 동안 자신의 폭넓은 관심사와 다양한 재능들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65세 되던 해에 그는 제2제정 역사를 자신의 회고록 형식으로 쓴 〈자유주의 제국 L'Empire libéral〉이란 책을 썼다. 17권으로 된 이 기념비적 저작은 당대에 나폴레옹 3세를 변호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외에 그가 지은 또다른 저서들로는 미켈란젤로에 관한 연구서와 소설 1편이 있다. 그는 1870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