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엔촐레른 왕조

호엔촐레른 왕조

다른 표기 언어 Hohenzollern dynasty

요약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왕가(1415~1918)이며 독일 제국의 왕가(1871~1918)였던 유명한 유럽의 왕조.

왕조의 명칭은 처음에는 촐로린 또는 촐레라고 불리던 슈바벤의 한 성에서 유래했다(지금은 호엔촐레른 성으로 부르며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튀빙겐 시 남쪽에 있음).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선조는 부르하르트 1세로 11세기에 촐레른 백작 칭호를 얻었으며 3, 4대손에 이르러 촐레른 호엔베르크계와 뉘른베르크 성주(城主)계로 갈라졌다.

촐레른 호엔베르크계는 1486년 후대가 모두 끊어지고 뉘른베르크 성주계가 근대까지 이어졌다.

촐레른의 프리드리히 3세(1200경 죽음)는 뉘른베르크 성주의 딸과 결혼해 1192년에 프리드리히 1세로서 뉘른베르크 성주의 자리를 계승했다. 두 아들인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사이에서 처음으로 가문이 갈라졌고 이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첫번째는 나중에 프랑켄 가계로 알려진 것으로 뉘른베르크의 성주를 시작으로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로이센 지역의 왕과 프로이센의 국왕, 독일 제국의 황제로 이어졌다.

2번째 가문인 슈바벤 가계는 촐레른 백작으로 시작해 호엔촐레른 백작, 촐레른샬 크스부르크 백작, 하이거로크 백작을 비롯해 호엔촐레른 헤힝겐 공, 호엔촐레른 지크마링겐 공, 호엔촐레른 공으로 이어졌고 다시 루마니아 공과 루마니아의 국왕들로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성주 콘라트 1세와 촐레른의 프리드리히 4세 중 누가 손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프랑켄 가계가 뉘른베르크 성주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 것은 프리드리히 3세(1297 죽음)가 바이로이트를 차지하고 그 후손들이 안스바흐와 쿨름바흐를 획득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호엔촐레른 왕조는 오랫동안 이 지역들을 브란덴부르크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뒤 프리드리히 6세는 1411년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이 되었고 1415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로 선제후의 지위에 올랐다.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종교개혁 때 루터파가 되었다가 1613년 칼뱅파로 개종)은 15~17세기에 많은 영토를 획득하고 역사적으로 부상했다(→ 브란덴부르크).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영토 획득은 손아래 가문의 일원이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을 얻은 일이다(→ 프로이센). 1701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는 1772년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이 이 칭호를 얻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프로이센의 왕들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칭호를 그대로 보유했다. 1871년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로이센과 독일에 대한 주권을 상실했다.

슈바벤 가계는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시기에 로마 가톨릭을 고수했다. 촐레른과 구별하여 호엔촐레른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이 가계 출신인 프리드리히 9세였다. 헤힝겐계와 지크마링겐계는 1623년 제후의 서열에 올랐으나 1849년 프로이센에 주권을 넘겨주었다.

20년 뒤 헤힝겐계가 끊어지면서 지크마링겐계의 장자인 카를 안톤이 호엔촐레른 공의 칭호를 이어받았으나 영토는 보유하지 못했다. 안톤의 둘째 아들인 카를은 1866년 루마니아 공이 되었고 1881년 카롤 1세로 왕위에 올랐다. 안톤의 맏아들인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왕위계승자 후보로 등장한 것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레오폴트의 아들인 페르디난트는 삼촌의 뒤를 이어 1914년 루마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후손들은 정교회로 개종하고 1947년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