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니

모르니

다른 표기 언어 Charles-Auguste-Louis-Joseph, duc de Mor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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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1. 10. 21, 프랑스 파리
사망 1865. 3. 10,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사회지도자.

제2제정 때 의붓형인 샤를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옹립한 1851년 12월 12일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별거중이던 부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플라오 백작 샤를 조제프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 모르니 백작이라는 있지도 않은 작위를 즐겨 썼으며, 죽기 얼마 전에야 공작위를 받았다. 프랑스군 중위로서 군복무를 시작했고 주로 아프리카(1832~36)에서 근무했으나 군대에 대한 야망도 관심도 없었다. 사교계에 드나들기를 즐겨 군에서 물러나 파리 사교계에 뛰어들었고, 투기와 사탕무 제당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1842년 클레르몽페랑을 대표해 하원의원으로 뽑혔고 1846년 재선되었으나 형인 루이 나폴레옹이 1848년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될 때까지는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1849년 퓌드돔 출신 의원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날에 내무장관으로 임명받았고 루이 나폴레옹을 독재자로 만들기 위한 국민투표를 준비했다. 곧 내무장관직을 사임한 그는 1856년 잠시 러시아 대사를 지낸 뒤 의회 의장이 되었고, 재임중에 과거의 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국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도록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하려 했다.

나폴레옹의 독재권력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나폴레옹에게 강제로 쫓겨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 때로 황제와 충돌을 일으키긴 했지만 늘 황제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62년 공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쉼없이 정치활동과 사업을 벌이고 사교계를 드나들며 방종하게 지낸 결과 건강이 나빠졌고 엉터리 의약품 때문에 더욱 건강이 악화되었다. 황제와 황비는 그가 파리에서 죽기 바로 전에 그를 방문했다.

그가 소장했던 귀중한 그림과 예술품들은 그가 죽은 뒤 팔렸다. 뛰어난 재치와 사교술을 지녔음에도 극작가로서는 기대했던 만큼 명성을 얻지 못했고, M. 드 생레미라는 필명으로 출판한 〈위대한 항로 Sur la grande route〉·〈슈플뢰리 씨는 고향에 머무르려 한다 Monsieur Choufleury restera chez lui〉·〈남편의 술책 Finesses du mari〉을 비롯한 어떤 작품도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