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회의

빈 회의

다른 표기 언어 Wiener Kongress 동의어 Congress of Vienna

요약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재편을 논의한 국제회의(1814~15).
(영). Congress of Vienna.

빈 회의(Wiener Kongress)
빈 회의(Wiener Kongress)

나폴레옹의 첫번째 퇴위 후 5개월 째 되던 1814년 9월에 시작하여 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나기 직전인 1815년 6월에 '최종 결의안'을 완성했다.

이 결의는 유럽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은 조약이었다.

나폴레옹을 물리친 주요세력, 즉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영국 등 4대 열강은 나폴레옹이 퇴위하기 1개월 전인 1814년 3월 9일의 쇼몽 조약에 따라 특별동맹을 결성했다.

뒤이어 5월 30일, 4대 열강뿐 아니라 스웨덴·포르투갈이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7월 30일에는 스페인이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이전의 모든 교전국들이 빈 회의에 전권대사를 파견하도록 규정했으나 4대 열강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실질적인 의사 결정권을 독점하려고 했다. 빈 회의가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부르봉 왕정의 프랑스가 '4대 열강'에 끼어 4대 열강은 5대 열강이 되었고 이 5대 열강 위원회가 빈 회의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다.

1814년 9월말경 각국의 대표들이 빈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총리인 메테르니히 공(公) 클레멘스가 황제인 프란츠 2세를 대신해 참석했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직접 외교사절단을 이끌고왔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고위 각료 폰 하르덴베르크 공 카를을 대동했다. 영국은 외무장관 캐슬레이 자작이 대표로 참석했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Fürst von Metternich)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Fürst von Metternich)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캐슬레이가 의회 업무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가자 웰링턴 공작이 대신 왔고 그가 떠난 뒤에는 클랜커티 경이 수석 대표로 참석했다.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탈레랑을 파견했다. 스페인·포르투갈·스웨덴은 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대표로 파견했다.

아서 웰 듀크 웰링턴(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아서 웰 듀크 웰링턴(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유럽의 많은 소국가의 통치자들도 얼굴을 나타냈다. 그밖에 다수의 조신들과 비서, 그리고 오스트리아 궁정의 화려한 사교생활을 즐기려는 귀부인들이 모여들었다. 의견 충돌을 일으킨 주요쟁점은 폴란드와 작센에 대한 처리, 스웨덴·덴마크·러시아 사이의 요구 대립, 그리고 독일 연방의 국경조정문제 등이었다. 보통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랑스·영국과 대립했다. 뒤의 세나라는 한때 방어동맹을 결성하는 비밀조약(1815. 1. 3)까지 맺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주요사항은 다음과 같다.

폴란드 문제에 관해서는 러시아가 갈리치아를 오스트리아에 되돌려주고 토른(토루인)과 그 주변지역을 프로이센에 주었다. 크라쿠프는 자유시가 되었다. 바르샤바 공국의 나머지 부분은 러시아 황제가 주권을 갖는 별개의 왕국으로 병합되었다.

프로이센은 작센의 2/5를 얻었고 베스트팔렌 지방과 라인 강 왼쪽 유역의 광대한 영토를 추가로 보상받았다. 작센 왕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이 후자의 영토를 프로이센이 차지해야 한다고 고집한 것은 바로 캐슬레이였다. 캐슬레이는 프로이센이 라인 강을 지켜 프랑스를 견제하고 이전의 연합주와 벨기에를 포괄하는 신생 네덜란드 왕국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얻었고 티롤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도 대체로 유리한 결과를 얻었으며 또한 영토를 확장했다. 느슨한 연방체로서 독일의 윤곽이 그려졌는데 이는 메테르니히의 승리였다.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보하고 라우엔부르크를 얻었고 반면 스웨덴령이었던 포메른은 프로이센에 넘어갔다. 스위스는 새로운 헌법을 인정받았다. 이탈리아에서 피에몬테는 제노바를 흡수했다. 토스카나와 모데나는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넘어갔으며 파르마는 폐위된 나폴레옹의 배우자 마리 루이즈에게 주어졌다.

교황령은 다시 교황에게 돌아갔고 나폴리는 시칠리아의 부르봉가가 차지했다. 이 회의에서는 국제 수로에서의 자유항행과 외교 우선권에 대한 중요한 항목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캐슬레이의 열성적인 노력은 종교적인 선언 정도로 그쳤다.

빈 회의의 최종 결정안은 이 모든 협약을 한데 모은 중요한 문서였다(빈 조약). 1815년 6월 9일 주요 8개국(스페인은 이탈리아에 관한 결정에 항의하는 뜻으로 조인을 거부했음)이 이 최종결정안에 조인했다.

이어 모든 유럽 국가들이 이에 승인했다. 결과적으로 빈 회의에서 결정된 국경선은 1,2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40년 이상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