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레이

캐슬레이

다른 표기 언어 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 동의어 제2대 런던데리 후작, 2nd Marquess of Londonderry
요약 테이블
출생 1769. 6. 18, 더블린
사망 1822. 8. 12, 런던
국적 아일랜드

요약 영국의 정치가.
2nd Marquess of Londonderry라고도 함(1821~).

캐슬레이(Robert Stewart)
캐슬레이(Robert Stewart)

외무장관(1812~22)으로 재임중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대동맹을 이끄는 데 이바지했고, 유럽 지도를 바꾸어 놓은 1815년의 빈 회의에 주역으로 참석했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무장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영국 대표로서 당시의 유럽 외교에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한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말버러 공작뿐이다. 캐슬레이는 강대국들의 힘을 모아 결국 나폴레옹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빈 회의에서 마련된 강화협정의 틀을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 협조'라는 개념은 주로 그가 창안한 것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협의에 따른 외교 관행을 촉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지주인 로버트 스튜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9년에 귀족이 된 아버지는 백작(1796)으로 승격했다가, 결국 런던데리 후작(1816)의 신분으로 격상되었다. 아버지가 죽자, 캐슬레이는 런던데리 후작 2세가 되었다. 북아일랜드의 아마와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1790년에 무소속 후보로 아일랜드 의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794년에 그는 아름답지만 약간 괴팍한 에밀리 앤 호바트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지만, 그는 오랜 결혼생활 동안 내내 아내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바쳤다. 1798년 3월부터 그는 당시 아일랜드 총독이며 자신의 친척인 캠던 백작 밑에서 수석비서관 대리로 일했다. 1798년 11월에 캠던의 후임자인 콘월리스 경은 그를 정식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캐슬레이가 수석비서관으로 재직한 것은 18세기말 아일랜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 사건이 일어난 시기였다.

하나는 1798년의 반란이었고, 또하나는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통합이었다. 그는 1798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혹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면서도, 이러한 소요를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관대한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콘월리스의 견해에 공감했다. 프랑스의 침략 위협과 1798년의 반란을 계기로, 그는 영국과 아일랜드 의회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00년 6월에 통합법이 더블린 의회에서 가결될 때, 캐슬레이는 신교도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일랜드 하원에서 혼자 힘으로 이 법안을 밀어붙여 처음으로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다.

그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통합에는 로마 가톨릭교도에 대한 정치적 해방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1801년 2월에 피트 총리가 로마 가톨릭교도 해방에 대해 조지 3세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자, 콘월리스와 캐슬레이는 당장 사표를 제출했다.

캐슬레이는 1801년 5월에 공직을 떠났지만, 헨리 애딩턴 내각에 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조언을 계속했고, 1802년 7월에는 인도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인도통치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지적 능력으로 당장 내각에서 영향력을 얻었으며, 피트가 다시 총리로 복귀하자(1804. 5) 1805년 7월에 육군장관이 되었다.

그가 처음 맡은 중요한 일은 영국군을 하노버에 파병하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하는(1805. 12) 바람에 이 일은 헛수고로 끝났다. 그러나 이 조치를 계기로 그는 대륙전쟁에서 영국군이 갖고 있는 전략적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1806년 1월에 피트가 죽자, 그는 공직을 사임하고 외교와 군사 문제에 관한 야당의 수석대변인이 되었다. 1807년에 포틀랜드 공작의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다시 육군장관이 되어, 이제 완전히 나폴레옹이 통치하게 된 유럽 대륙과 대규모 전쟁을 치르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1808년에 정규군과 예비군 및 민병대를 개편하기 위한 그의 계획안이 채택되자, 영국은 본국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병력과 해외 작전을 위한 대규모의 효율적인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은 즉각 이베리아 반도에 대규모 원정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1809년에 아서 웰즐리(나중에 웰링턴 공작)가 원정대 지휘권을 맡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1809년에 캐슬레이가 안트웨르펜에 있는 나폴레옹의 해군 기지를 공격하도록 보낸 영국군 원정대는 왈헤렌 섬에서 질병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이 재난은 결코 캐슬레이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내각 내부의 해묵은 불화와 음모를 막바지에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1809년 3월부터 외무장관 조지 캐닝은 정책 변화를 역설하고 있었고, 왈헤렌 원정 이전에 이미 캐슬레이를 웰즐리 후작으로 교체하자는 은밀한 합의를 얻어놓은 상태였다. 캐슬레이는 캐닝이 그를 얼마나 수치스러운 입장에 몰아넣었는가를 알고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는 9월 21일에 치러졌다. 캐닝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결투가 끝난 뒤 두 사람 다 공직을 사임했다. 캐슬레이는 그후 2년 반 동안 공직을 갖지 못했다(나폴레옹 전쟁).

1812년에 그는 외무장관으로 다시 입각했고, 5월에 퍼시벌 총리가 암살된 뒤 하원의장이 되었다. 그후 10년 동안 영국의 대외정책은 캐슬레이의 통제로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불안정하고 회의적인 요소들을 통합하여 유럽 대륙 전체의 단결된 힘으로 나폴레옹과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종말이 다가오자, 그는 동맹국들 사이에 유럽 재편에 대한 사전 합의를 이루도록 애썼다. 1814년에 프랑스 샤티용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강대국들의 주도로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그의 계획의 원칙을 확고히 했다. 쇼몽 조약(1814. 3)에는 그가 요구한 대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20년 동안 동맹국들이 서로 협력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맺어진 파리 조약(1814. 5)은 영국의 당면 요구(부르봉 왕조의 복귀와 북해 연안의 베넬룩스 3국을 하나의 독립왕국으로 분리하자는 요구)를 수용했고, 덕분에 캐슬레이는 빈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당당하게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었다(빈 회의). 유럽 대륙에 대한 그의 주요목표는 러시아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고, 독일의 허약한 중부 유럽 지역과 이탈리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캐슬레이는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와 함께 내부 협상을 지휘했지만,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영토 요구에 반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캐슬레이였다. 약간의 타협을 거쳐 이루어진 최종 합의는 '공정한 균형'이라는 그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강대국들이 정기적으로 회담을 갖고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화조약에는 관계당사국들의 정례 회담에 관한 특별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런 회담을 여는 관행은 '회의 체제'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캐슬레이의 목적은 다른 나라의 국내 문제를 간섭하거나 규제하는 국제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협의를 통한 외교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차이점은 그가 외무장관 자리를 떠날 때까지 7년 동안 해를 거듭할수록 뚜렷해졌다. 1818년에 열린 엑스라샤펠 회의에서 프랑스는 다시 강대국들과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캐슬레이는 군사력을 이용한 제재 조치로 기존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 유럽 강대국 동맹을 결성하려는 러시아의 노력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1818년부터 독일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운동과 1820년에 스페인 및 양(兩)시칠리아 왕국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자, 캐슬레이는 1820년 10월에 트로파우(지금의 오파바)에서 열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의 회담을 유럽 전체회의로 간주하기를 거부했고, 라이바흐 회의(1821)가 끝난 뒤에는 트로파우에서 합의된 군사 개입과 강압의 원칙을 공공연히 부인했다(트로파우 회의). 1820년 5월에 그가 작성한 고전적인 공문서는 동유럽의 독재국가와 영국 및 프랑스의 입헌체제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고, 영국정부는 의회제도의 한계 안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1821년에 그리스 독립 문제와 스페인 식민지의 운명에 관한 문제가 등장해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가 직접 영향을 받게 되자 캐슬레이는 1822년의 베로나 회의에 직접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지침은 그리스나 스페인에 대한 무력개입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은 혁명이 성공한 결과 세워진 사실상의 정부를 궁극적으로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유럽 대륙 열강의 반동 정책에서 영국을 분리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일은 그가 죽은 뒤에 이루어졌다.

캐슬레이의 외교는 개인적인 성격을 띠었고 그는 원래 여론에 초연했기 때문에, 영국 대중은 이런 사태 발전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동유럽의 독재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여 국내에서 큰 반감을 샀다. 게다가 전후 국내 정치가 혼란할 때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한 결과, 인기 없는 저명인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원의장으로서 1815~19년의 억압 정치와 결부되었고, 1820년 내각이 조지 4세캐롤라인 왕비의 결혼 취소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 한 일도 그가 관여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이런 경, 토머스 무어, 셸리 같은 자유주의적 낭만파 작가들은 그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1820년에 각료들을 암살하려던 시슬우드 음모 이후 그는 항상 자기 방어를 위해 권총을 갖고 다녔고, 캐롤라인 왕비에 대한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신변 안전을 위해 외무부 안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외무부와 하원에서 맡은 임무 이외에 1820년의 국왕 이혼 추진 사건에 대한 부담이 그의 결정적인 몰락을 촉진했을 것이다. 1821년에 그는 비정상적으로 의심이 많아지는 징후를 보였고, 1822년에 이르자 이 증상은 완전한 과대망상증으로 발전했다. 그는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협박당하고 있었거나 스스로 협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베로나 회의에 참석하러 떠나기 직전인 1822년 8월 12일에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