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덴베르크

하르덴베르크

다른 표기 언어 Karl August, Fürst von Hardenberg
요약 테이블
출생 1750. 5. 31,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기프호른 근처 에센로데
사망 1822. 11. 26, 이탈리아 제노바
국적 독일

요약 프로이센의 정치가·행정가.
Freiherr von Hardenberg라고도 함(~1814).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프로이센 공무원 시절
  4. 총리 임명
  5. 평가

개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로이센 국가를 완전한 상태로 지켰다.

그는 국내에서는 슈타인 남작 카를이 도입한 개혁을 계속 추진했고, 외교 면에서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맺고 있던 동맹 대신 1813년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으며, 1814~15년에는 프로이센 대표로 파리와 빈에서 열린 평화협상에 참가했다. 헌법 제정을 위해 애쓰다가 실패했지만, 재무·경제·농업 정책의 자유화와 외교 문제에 대한 처리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1813~15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데 필요한 정치적 필수조건을 만들어내는 외교 수완을 보였다.

초기생애

아버지 크리스티안 루트비히는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령 남부에 영지를 갖고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의 장군이었다.

카를 아우구스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근처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에서 일곱 자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정교사에게 언어와 역사 및 지리를 배운 뒤, 1년 동안(1762~63) 하노버의 유명한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국가행정관이 되기 위해, 1766년 가을에 괴팅겐대학교에 들어갔다. 1768년에는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고고학·역사·문학·수학·자연과학·경제학 강의를 들었다. 그림과 음악도 공부했지만, 전공 분야는 법률이었다. 괴팅겐대학교는 그에게 최선의 법률 교육을 베풀어 흔히 신성 로마 제국이나 독일 내 여러 국가 가운데 하나의 공무원으로 임명될 길을 닦아주었다.

1770년에 하르덴베르크는 괴팅겐을 떠나 하노버 선제후령의 법무부에 들어갔다.

그는 출세를 앞당기기 위해 1772년 여름 하노버 선제후 겸 영국의 왕인 조지 3세의 충고에 따라 여행을 떠나 1년 동안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정치적 시야를 넓혔다. 1773년에는 영국으로 가서 조지 3세를 알현했고, 조지 3세는 그를 하노버 고문관으로 임명했다. 1774년 그는 15세의 율리아네 폰 레벤틀로프 여백작과 결혼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지만 1788년에 이혼했다. 출세의 전망이 흐려진데다 아내와 웨일스 공의 간통 사건의 추문에 휘말린 하르덴베르크는 하노버 왕가를 떠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교육장관으로 무능함을 드러냈다. 게다가 아내와 이혼하자마자 유부녀인 조피 폰 렌테(하르덴베르크와 결혼하기 위해 남편과 이혼했음)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사생활도 사람들의 험담거리가 되었다.

프로이센 공무원 시절

이런 상황에서 하르덴베르크는 1790년에 프로이센의 안스바흐-바이로이트 지방장관 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오자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르는 요령과 재능 있는 하급 행정관을 끌어들이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그가 고른 유능한 전문가들 가운데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광산 기술 개선을 책임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업적은 이전의 변경백 영지인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를 프로이센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역으로 만든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신임을 얻은 그는 1798년에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겨, 베를린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직과 외교직(1804~06년 외무장관으로 재직했음)을 맡았다.

한편 그의 재혼생활도 안스바흐에서 파탄을 맞았는데, 그가 정부(情婦)를 집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의 정부는 20년이 넘도록 그와 함께 지내면서 베를린은 물론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그의 영지에까지 따라갔다. 하르덴베르크는 2번째 아내와 이혼한 지 6년 뒤인 1807년에 정부와 결혼했지만, 죽기 직전 이 3번째 아내와도 헤어졌다. 1806년까지 하르덴베르크는 독일에게 유리하도록 프랑스에 대한 중립정책을 옹호했다. 국내 문제에서는 카를 폼 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고문' 제도를 폐지하고, 각 부서의 장관이 왕의 가장 강력한 조언자로서 왕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문 대신 장관의 지위를 확립하려고 애썼으며, 1807년 4월 마침내 이 목적을 이루었다.

총리 임명

프로이센이 1806~07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하르덴베르크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장관직을 내놓고 정치에서 물러나야 했다.

1810년에 프로이센이 파산상태에 빠져 나폴레옹에게 전쟁 배상금을 계속 지불할 수 없게 되자, 하르덴베르크는 국가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봉사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신임과 루이제 왕비의 공감을 얻었고, 배상금 지불을 가장 중요시한 나폴레옹은 하르덴베르크의 복직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1810년 하르덴베르크는 전권을 쥔 총리가 되었고, 동시에 내무부와 재무부도 감독하게 되었다.

국내 문제에서 하르덴베르크는 슈타인이 1807~08년에 시작한 개혁의 2번째 단계에 착수했다.

프로이센의 왕은 1807년 여름에 나폴레옹의 강요로 하르덴베르크를 해임한 뒤, 프로이센의 국가 조직개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그결과 그는 포괄적인 '리가 메모란둠'(Riga memorandum)에서 개혁에 대한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그는 절대군주제를 고수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원칙과 나폴레옹 치하에서 완성된 프랑스의 행정 개혁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의 주제는 '군주제 안의 민주적 원칙'이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 원칙을 왕에게 건의했다.

하르덴베르크가 주도한 1810~12년의 개혁 입법은 이런 확신에서 생겨났다. 이 법률은 그때까지 도시에만 부과된 소비세를 통합하여 단순화했으며, 귀족에게 그때까지 면제된 재산세를 부과하려 했다. 이 법률은 또한 통상의 자유와 수익세를 도입했고, 넓은 소유지에서 농민의 소작지를 다시 사들이는 것을 규제했으며, 유대인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주었다.

행정개혁법은 중간 단계의 행정 분야에서 일하는 관리들에게 더 크고 더 신속한 효율성을 부여했다. 하르덴베르크는 프랑스를 본받아 중상류층 시민들의 협조를 요구하고 자문권을 가진 대표자 회의를 창설함으로써, 국민이 국가문제와 더 밀접한 접촉을 갖게 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비상시에는 인기 없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하면 여론도 정부에 호의를 갖고 인기 없는 조치도 지지해 주리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나 지주 귀족의 반대와 왕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때문에, 그는 계획의 범위를 줄여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1815년 이후의 반동은 개혁에 불리했다. 농업 개편은 중지되었고, 하르덴베르크가 죽을 때까지 촉구한 대표자 의회의 창설은 1847년까지 연기되었다.

하르덴베르크가 1812년부터 개혁에 정력을 덜 쏟았다면, 그것은 외교 정책이 더 많은 정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812년초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어야 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비참한 결과로 끝난 뒤, 하르덴베르크는 동맹의 겉모습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계속 군비를 증강하면서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에 유리한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매우 신중한 그는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끊기 전에 우선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왕에게 조언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1813년 2월에 슈타인이 가져온 러시아의 제안을 바탕으로 칼리슈 동맹을 맺었다. 1813~22년 동안 수많은 국제 협상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석한 하르덴베르크는 기꺼이 타협하면서, 유럽 강대국들의 상충하는 이해 관계를 피해 나라를 무사히 이끌었다. 특히 빈 회의에서 '작센-폴란드 문제'를 둘러싸고 강대국들 사이에 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주요한 대립 당사자인 러시아와 영국을 화해시킬 수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다른 데서 보상을 얻는 대신 작센 병합(프로이센은 폴란드를 병합하려는 러시아의 계획에 동의하는 대가로 작센을 요구했음)을 포기했다. 외교 문제에서는 1815년부터 보수주의적인 신성 동맹 정책을 취했다. 1814년 공작작위를 받았다.

평가

하르덴베르크가 늙어갈수록, 정계에서는 그의 사상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줄어들었다.

애국자와 개혁가들은 그가 지나치게 타협적이고 회유적이라고 생각한 반면, 절대주의 통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으로 보였다. 1822년에 이르자, 그가 1810~13년에 이룩한 중요한 국내 개혁과 위대한 외교적 업적은 거의 다 잊혀지고 말았다.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는 하르덴베르크가 정치가로서 이룩한 업적을 강조하면서,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파괴될 위기에 놓였을 때 프로이센 국가를 보전한 사람은 하르덴베르크라고 지적했다.

그때부터 하르덴베르크는 주로 그런 역할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의 개혁 입법이 이룩한 사회 발전은 항상 인정되어왔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은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