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

메테르니히

다른 표기 언어 Klemens, Fürst von Metternich
요약 테이블
출생 1773. 5. 15, 트리어 대주교구 코블렌츠
사망 1859. 6. 11, 빈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나폴레옹을 격파한 유럽 국가들의 동맹 형성을 도왔고, 1814~15년 빈 회의를 주재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유럽의 주도국으로 복귀시켰다.
1806년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로 일했다. 1809년 10월 8일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는 메테르니히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메테르니히는 회의체제를 통해 강대국들의 행동을 일치시키고 유럽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엑스라샤펠 회의(1818), 트로파우 회의(1820), 라이바흐 회의(1821), 베로나 회의(1822) 등에서 그의 국제적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1821년 5월 25일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총리로 임명되었지만 1826년 콜로브라트 백작 프란츠 안톤이 국무장관 겸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이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제한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나폴레옹 전쟁 동안의 공사시절
  4. 빈 회의에서의 지도력
  5. 독일연방에서의 역할
  6. 몰락의 시기
메테르니히(Klemens, Fürst von Metternich)
메테르니히(Klemens, Fürst von Metternich)

개요

나폴레옹을 격파한 유럽 국가들의 동맹 형성을 도왔고, 1814~15년 빈 회의를 주재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유럽의 주도국으로 복귀시켰다.

초기생애

메테르니히는 라인 강 유역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으로 메테르니히 비네부르크 백작 프란츠 게오르크 카를과 베아트리크스 카게네크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라인 강 유역에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공국(公國)에 파견된 오스트리아 공사였으므로 메테르니히는 어린시절을 라인모젤 지방에서 보냈고 일생 동안 이 시기에 대해 애정을 가졌다. 그는 1788년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 들어가 외교학을 공부했으나 프랑스 혁명이 확산되자 이를 피해 1790년 그곳을 떠나 마인츠대학교에 입학했다. 프랑스 혁명군이 마인츠로 들어오기 전에 아버지가 총리로 일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령(領) 네덜란드의 브뤼셀로 갔다.

1794년 외교 임무를 띠고 영국에 갔으며 거기서 독일 국민의 무장을 호소하는 소책자를 펴냈다. 그해 10월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입하자 잠시 빈으로 피신해 있던 아버지에게로 갔고, 그곳에서 늘 관심을 가졌던 박물학·과학·의학 연구에 몰두해 훗날 이 분야 학문연구를 크게 장려했다.

1795년 9월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총리를 지냈던 카우니츠 백작 벤첼 안톤의 유산을 물려받은 손녀 엘레오노레 카우니츠 여백작과 결혼했다.

이제 오스트리아 고위귀족들과 관계를 맺고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고위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트였다. 프랑스에게 라인 강 왼쪽 유역의 영지(領地)를 잃고 쫓겨난 독일 제후들에 대한 보상을 결정한 라슈타트 회의(1797~99)가 끝날 무렵 그는 베스트팔렌 공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백작을 대표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 1801년 오스트리아 공사로 작센 공국의 드레스덴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독일의 정치평론가이자 외교관인 프리드리히 폰 겐츠와 친분을 맺었다.

1803년부터는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로 일했는데 1805년 프랑스와의 전쟁 때는 오스트리아와 힘을 합해 프랑스에 대항하자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설득했다(나폴레옹 전쟁). 이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프로이센이 내적으로 매우 취약해 급속히 붕괴될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의 공사시절

1806년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로 일했다.

파리에서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뮈라를 비롯한 파리 사교계 부인들과 교제하면서 방탕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이 부인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 러시아 공사 등 많은 사람에게 프랑스 국내사정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얻었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협상해 퐁텐블로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메테르니히가 거둔 성과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이때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성격을 깊이 꿰뚫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체제에 반대한 1808년 스페인 봉기의 여파를 과대평가해 본국에 낙관적인 보고를 올렸고, 이듬해 오스트리아는 그의 보고에 의거, 정세를 판단해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그는 바그람 전투가 끝난 뒤 열린 평화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 했지만 나폴레옹에게 거절당했다.

1809년 10월 8일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소멸로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잃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는 메테르니히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6일 뒤 오스트리아로서는 부담이 큰 쇤브룬 조약을 프랑스와 체결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절실히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의 허영심을 교묘하게 이용해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 루이즈 공주와 결혼시킴으로써 이를 달성했다.

이 결혼으로 어느 만큼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을 억제시킬 수 있다고 기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스트리아가 자유로이 행동할 만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관계가 호전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즉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보호 속에 결성된 독일 군주들의 연맹인 라인 연방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나폴레옹 체제의 위성국이 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었고 채무도 많이 진 상태였으므로 나폴레옹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저항할 능력이 없었지만 이제 더이상 나폴레옹의 적이 아니었다.

일찍이 1811년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국내 발전을 위해, 황제 요제프 2세가 만들어놓은 중앙집권체제 대신 연방체제로의 재편을 원했다.

그러나 당시 엄격한 절대주의자인 황제의 반대를 이길 수 없었다. 또한 1809년쯤부터 열의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의 무장과 나폴레옹에 대한 전(全)독일의 투쟁이라는 목표도 모든 형태의 대중운동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성향 때문에 파기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황제와 뜻을 같이한 그는 이제 대중운동을 다국적(多國籍)인 합스부르크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합스부르크 왕가). 그는 처음에는 코흐에게서, 그리고 나중에는 외교관 동료인 겐츠에게서 영향을 받아 유럽의 세력균형 이론을 가장 완고하게 주창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그는 프랑스 군대를 따라간 카를 슈바르첸베르크 공(公)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에게 독립적 분견대의 위치를 확보해주었다.

나폴레옹 군대의 참패는 메테르니히를 놀라게 했다. 1813년 1월 30일 슈바르첸베르크는 러시아와 임시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군비 부족 때문에 그는 나폴레옹과 맞서 있는 러시아 편으로 돌아설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는 알프스에서 프랑스에 대항해 섣부른 반란을 꾸몄다가 가택연금당한 요한 대공의 계획을 비롯해 모든 무분별한 계획에 반대했으며, 중립을 유지하면서 비밀리에 재무장을 추진했다.

심지어 한동안 작센을 중립진영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1813년 작센이 프랑스 편으로 되돌아서고 나폴레옹이 바우첸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나폴레옹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려던 생각은 흔들렸다. 나폴레옹의 태도에 긴장한 그는 프랑스·러시아·프로이센 사이의 강화를 중재했다.

그럼에도 뒤이어 1813년 6월 24일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라이헨바흐 조약을 체결할 때, 그가 제의한 평화조건을 나폴레옹이 거부한다면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1813년 여름 프랑스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오스트리아의 재무장을 위한 많은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때쯤 그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몰락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프란츠 황제 역시 딸 마리 루이즈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나폴레옹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가 몰락하면 유럽이 러시아의 손에 좌우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완고하게 나와 협상이 뜻대로 되지 않았으나 그해 8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기에 이르자 그는 능란한 수완으로 협상을 진행해 오스트리아를 정치·군사면에서 지도적 위치로 끌어올렸다. 1813년 10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세습공작 작위를 받았다.

메테르니히는 프로이센 총리 카를 프라이헤 폼 슈타인과 러시아 황제의 구상을 반대하면서 라인 연방에 속한 남부 독일 국가들에게 반(反)나폴레옹 동맹에 가담한다면 이전에 나폴레옹 밑에서 누렸던 지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만으로 판단하건대 그는 모두의 이해관계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한 동시에 프로이센·러시아의 증강계획에 대처해 남부 독일 국가들을 동맹국으로 만들기를 원한 것 같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고 퇴위한 뒤 슈타인 남작 등은 신성 로마 제국 재건을 제의했으나 그는 비현실적인 계획이라며 거부했다. 1814년 5월 30일에 체결된 제1차 파리 조약은 독일을 단지 여러 국가의 느슨한 연방으로만 명시하고 있었다.

빈 회의에서의 지도력

빈 회의(1814. 9~1815. 6)는 메테르니히의 전후(戰後) 재건작업 가운데 최고의 것이었다.

회의가 빈에서 열렸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새로운 유럽 질서에 대한 정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의 초반부터 이기적인 군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자신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실현시키려면 상당한 수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과 이탈리아, 두 연방을 구성하고 오스트리아가 이 두 연방의 주도세력으로 나섬으로써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굳히려 했다.

독일에는 세습적인 제국을 새로 만들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함께 독일 서부국경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을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프랑스를 러시아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생각한 그는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이 경의 지지를 얻어 프랑스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또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에 대항했고 특히 작센 지역 모두를 차지하려는 프로이센의 의도에 반대했다.

빈 회의는 화려한 사교행사였다.

메테르니히는 끊임없이 연회를 열어 빈을 방문한 군주들이 정치인으로서 진정한 자신의 일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는 연애사업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저명인사이며 정치적 지도자라는 이중 역할을 화려하고 능숙하게 수행해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는 자신의 계획 가운데 일부밖에 이루어내지 못했다. 독일제국 건설계획은 프란츠 황제의 완고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탈리아 연방 조직안도 실현시키지 못했다. 또 1815년 6월에 그 모습을 드러낸 독일연방은 바이에른이 내놓은 절충안에 따라 짤막하고 모호한 연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문제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프랑스가 옛 지위를 되찾도록 했고 작센에 대한 프로이센의 요구를 축소시켰으며 특히 러시아의 요구가 더이상 커지지 않도록 막았다. 사실상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그가 만든 오스트리아·영국·프랑스의 공동전선에 의해 견제되고 있었다.

메테르니히의 중재로 그뒤 오랫동안 지속된 유럽의 질서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정치적 식견에서라기보다는 외교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가 차지하는 위치는 강해졌지만 오스트리아 황제가 독일 제관(帝冠)을 거부한 결과 연방 안에서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지위를 가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연방에서의 역할

메테르니히는 이미 1811년부터 확고하게 정립했던 생각, 즉 절대주의 시대 이전부터 누리던 특권을 되살리고 영토를 회복함으로써 민족주의적 혁명정신을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을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조차 설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가 새로 획득한 이탈리아 영토에 근거를 두고 편성하려 했으나 프란츠 황제에 의해 좌절당했다. 프란츠는 메테르니히의 생각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다른 두 지역을 역사성이 전혀 없는 '롬바르드-베네치아 왕국'으로 통합했고 범(汎)이탈리아 민족주의에 대처하려던 메테르니히의 희망을 무산시켰다.

더구나 그가 우려했던 대로 처음에는 강했던 오스트리아 지지 분위기가 점차 반대방향으로 돌아섰다.

오스트리아의 재건은 완전히 전(前) 황제 요제프 2세의 의도대로 이루어졌다. 요제프는 민족의 특성을 무시한 채 중앙집권·절대주의 노선을 밀고나갔고 메테르니히가 요구했던 분야별 장관직도 설치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건의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결국 메테르니히는 개혁을 싫어하고 권위에 집착하는 황제의 방해공작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티롤과 갈리치아에 예전의 의회(diet)를 다시 설치하는 것은 어느 정도 그의 계획대로 되었다. 그는 전국 의회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지방의회를 되살림으로써 이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경찰장관이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오스트리아 국내문제 또한 181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연방의회에서 메테르니히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원래 이 의회를 이용해 독일 전역에 퍼져 있는 혁명사상을 저지하려 했다. 1817~18년 그는 티롤과 갈리치아의 경우를 지적하면서 독일의 여러 영방(領邦)들에게 이전에 있던 주(province)를 부활시키는 헌법을 만들고, 중앙의회 대신 영방마다 의회를 구성하도록 권장했다. 그러나 1818년 여름 바이에른과 바덴은 메테르니히의 구상과는 다르게 1814년 6월의 프랑스 헌장을 기초로 비슷한 내용의 제한군주제 헌법을 공포했다.

1819년에는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암살당하면서 혁명활동이 절정에 이르렀고, 같은 해 바이에른과 바덴에서 열린 의회는 처음부터 앞날이 어두웠다. 메테르니히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자유주의 물결을 완전히 억누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방의회를 되살리기로 한 자신의 방법이 옳다는 것을 프로이센 총리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공(公)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 프로이센이 남부독일의 예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그는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직된 의회가 그의 예상을 실현시키고 독일 군주들의 자유주의 성향에 찬물을 끼얹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따라서 1819~20년 카를스바드와 빈에서 열린 장관회의에서 남부 독일 국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메테르니히는 새로 만든 헌법들을 무효화하려 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불편하게 여겨왔던 연방의회의 활동범위를 축소하는 데 그쳤다. 이제 그는 독일정책의 방향을 바꿔, 의회가 아닌 독일 군주들의 공동 이익에 의지했고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가 보장된 것은 연방법에 따른 오스트리아의 특권 때문이 아니라 메테르니히 개인 덕택이었다.

몰락의 시기

메테르니히는 회의체제를 통해 강대국들의 행동을 일치시키고 유럽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엑스라샤펠 회의(1818), 트로파우 회의(1820), 라이바흐 회의(1821), 베로나 회의(1822) 등에서 그의 국제적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영국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에 개입하는 정책을 포기하자 강대국 회의체제는 뚜렷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캐슬레이 자작이 트로파우 회의에서 이러한 정책 변화의 길을 열었고, 이어서 영국 외무장관이 된 조지 캐닝이 스페인에 대항한 남아메리카 식민지들의 봉기와 투르크에 대한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민족자결권을 내세워 개입을 거부함으로써 메테르니히는 서유럽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잃었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 더이상 러시아에도 메테르니히의 영향력이 미칠 것 같지 않았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잇달아 벨기에·폴란드·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의 불길한 예언이 다시금 현실로 나타나는 듯했다. 동유럽 강대국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는 그의 원칙에 따라 힘을 합쳐 혁명의 물결에 맞서야만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우위에 대한 프로이센의 경계심이 더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1821년 5월 25일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총리로 임명되었지만 1826년 콜로브라트 백작 프란츠 안톤이 국무장관 겸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의 영향력은 크게 제한되었다. 콜로브라트는 정부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데 반대했으며 프란츠 황제보다 훨씬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자 메테르니히는 상대를 짜증나게 할 만큼 자만심이 늘어났고, 이론을 세우는 데 더욱 열중함으로써 말투가 점차 장황해져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란츠에게 왕가의 정통성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에서 황제의 맏아들이며 심약한 페르디난트 대공을 왕위계승자로 결정하라고 조언해 파멸을 초래했다. 1835년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처음에는 메테르니히와 루트비히 대공과 함께 국무회의 의장을 맡아 섭정 역할을 했다.

1836년 마침내 메테르니히의 구상대로 훌륭한 체계를 갖춘 정부가 실현될 듯이 보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콜로브라트가 자신의 이론으로 요한 대공과 루트비히 대공을 설득해 무산시켜버렸다. 이때부터 메테르니히는 외교문제에만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허영심 때문에 자신이 제안하지도,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지도 않는 여러 법령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사실을 감추려 했다. 이 결과 그는 억압과 반동의 상징으로 미움받았으며, 결국 1848년 3월 13일, 혁명의 첫번째 희생자로 사임해야 했다.

그뒤 어렵게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1851년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로부터 8년 뒤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