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다른 표기 언어 Napoleon I 동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요약 테이블
출생 1769. 8. 15, 코르시카 아작시오
사망 1821. 5. 5, 세인트헬레나 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 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서 존경받았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로 간 뒤 한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9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 18세기 사람이 되었다. 군 입대 후 자코뱅 클럽의 회장이 되었으며,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다. 주변국과의 계속된 전투의 와중에서 쿠데타로 집권하고, 통령정부를 세워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국군과 싸워 승리하면서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다. 이후 종신통령제를 거쳐 제정을 수립하고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하고, 동맹국들에 의해 공격받으면서 퇴위했다. 엘바 섬 귀양 후 잠시 백일천하를 도모했으나 곧 망명했고,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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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코뱅 시대의 나폴레옹 1세
  2. 총재정부시대의 나폴레옹 1세
  3. 통령정부시대의 나폴레옹 1세
    1. 권력강화
    2. 개혁 프로그램
    3. 군사원정과 불안한 평화
  4. 제정시대의 나폴레옹 1세
    1. 개요
    2. 제정수립
    3. 영국과의 전쟁
    4. 대륙봉쇄와 이베리아 반도 원정
    5. 제정의 강화
    6. 러시아 원정 참패와 그 이후
    7. 몰락과 퇴위
  5. 백일천하
  6.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7.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 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서 존경받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코르시카 총독의 비호를 받은 그는 1771년에 아작시오 지방법원의 판사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778년에는 위로 두 아들인 조제프와 나폴레옹을 콜레주 도툉에 입학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간 뒤 한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9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 18세기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툉·브리엔·파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놓은 채 숨을 거두었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그 해 9월,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La Fère) 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연대가 주둔한 발랑스에서 계속 교육을 받으며 특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786년 9월에 코르시카로 돌아갔다가 1788년 6월에 연대에 복귀했는데 그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의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전쟁). 볼테르와 루소를 읽은 나폴레옹은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직업장교로서 급격한 사회개혁에 대한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자코뱅 시대의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1789년 입헌군주정을 세우기 위해 모인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가 파올리의 코르시카 귀환을 허용하자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 가 파올리와 합세했다. 그러나 파올리는 대의명분을 버린 자의 아들에게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고 실망한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1791년 4월에 발랑스 주둔 제4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임명된 뒤 곧바로 자코뱅 클럽(원래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토론 모임이었음)에 들어갔고 곧 회장이 되었다.

1791년 9월 3개월의 휴가를 얻어 다시 코르시카로 돌아가 국민방위군 중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최고 사령관인 파올리와 사이가 틀어졌다. 코르시카에서 정치싸움에 휘말려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1792년 1월 탈영자 목록에 올랐으나 4월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사면되어 파리로 갔다.

나폴레옹은 대위로 진급했으나 연대로 복귀하지 않고 1792년 10월 코르시카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파올리가 독재권력을 쥐고 코르시카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파올리의 정책에 반대하는 코르시카 자코뱅당에 들어갔다. 1793년 4월 내란을 일으킨 파올리가 부오나파르테 가문을 탄압하자 그의 집안은 모두 프랑스로 달아났다.

나폴레옹은 1793년 6월에 니스에 있던 자기 연대로 복귀했다.

이때 그는 〈보케르의 만찬 Souper de Beaucaire〉을 집필하여 자코뱅당과 지난 가을에 왕정을 타도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를 중심으로 모든 공화주의자가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3년 8월말에 국민공회의 군대는 마르세유를 함락했으나 툴롱에서 왕당파가 불러들인 영국군에게 저지당했다.

국민공회의 포병사령관이 부상당하자 나폴레옹은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는 코르시카 대표이자 군사위원 앙투안 살리세티 덕택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빠르게 진급했다. 그는 12월 16일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튿날에는 영국군을 툴롱에서 몰아냈으며 그 공로로 12월 22일 24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툴롱 포위전).

군사위원인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당시 실질적인 정부수반이자 공포정치의 주역이던 자신의 형 막시밀리앙에게 편지를 보내 나폴레옹의 능력을 칭찬했고 1794년 2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파견된 프랑스 포병의 지휘를 맡았다(→ 로베스피에르).

그러나 파리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熱의 달) 9일(1794. 7. 27)에 권력을 빼앗기자 로베스피에르의 앞잡이로 몰린 나폴레옹은 음모와 반역 혐의로 체포당했다. 그는 9월에 풀려났으나 군지휘권은 돌려받지 못했다. 이듬해 3월 방데에서 반혁명군과 싸우고 있던 서부군의 포병을 지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 직책이 아무 장래성이 없다고 여겨 거절했다.

더 나은 자리를 얻으려고 파리로 갔으나 야심이 지나치고 국민공회의 과격파인 '산악당'(Montagnards)과 가깝다고 의심받아 만족스러운 직책을 맡지 못했다.

총재정부시대의 나폴레옹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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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이 파리에 있던 1795년 5월 해산을 앞둔 국민공회는 공회 의원의 2/3를 새 입법부 의원에 재선하도록 규정한 법령 및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왕당파는 법령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파리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국민공회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폴 드 바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진압 책임을 맡겼고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포도의 달) 13일(1795. 10. 5) 반란군을 무찔러 국민공회와 공화국을 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국내 사령관이 되었고 그때부터 프랑스의 모든 정치 흐름을 잘 알게 되었으며 새 총재정부에서 군사문제 고문직도 맡았다.

또 두 아이를 둔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으로, 숱한 염문을 뿌리던 조제핀 타셰 드 라 파제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프랑수아 바뵈프와 이탈리아 사람 필리포 부오나로티가 이끄는 공산주의 성향을 띤 집단을 해산시켜 총재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1796년 3월에는 그가 원했던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조제핀과 결혼한(1796. 3. 9) 이틀 뒤 군대로 떠나 니스에 있는 지휘본부에 도착한 그는 4만 3,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군대가 실제로는 3만 명의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3월 28일 그는 장병들에게 첫 성명을 발표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벌거벗고 굶주려 있다… 부유한 지방과 커다란 도시들이 제군들의 손에 들어올 것이며, 거기서 제군은 명예와 영광과 부를 얻게 될 것이다. 병사들이여,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 그는 4월 12일에 공격을 시작해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토리노로 진격했다.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요청으로 5월 15일에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고, 1792년부터 프랑스에게 점령당해 있던 니스와 사보이(사부아)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오스트리아와는 계속 싸워 밀라노를 점령했으나 만토바에서 더 나가지 못했고 그의 군대가 만토바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그는 파르마 공(公), 모데나 공, 교황 피우스 6세를 상대로 휴전을 맺었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 정치조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부오나로티가 중심인 이탈리아 '애국자'들은 이탈리아를 '공화국'으로 만들려 했으나 총재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바뵈프의 음모에 가담한 죄로 부오나로티가 체포당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뒤로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 애국자들의 행동의 자유를 제한했고 롬바르디아에 공화국을 세웠으나 그 지도자들을 주의 깊게 감시했다. 1796년 10월에는 모데나·에밀리아 지역과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교황령 볼로냐·페라라를 병합해 치살피나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군이 철수한 코르시카를 되찾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를 구하려고 4차례나 공격해왔으나 나폴레옹은 그때마다 물리쳤고 1797년 1월 결국 만토바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다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진격해 빈에서 100km 되는 곳까지 쳐들어가자 오스트리아는 휴전을 요청했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 남부를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롬바르디아 공화국을 인정한 대신 옛 베네치아 공화국 일부를 넘겨받았다.

이로써 옛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트리아·프랑스·롬바르디아 영토로 나뉘어졌다. 그뒤 보나파르트는 북이탈리아의 공화국들을 통합·재편했으며 베네치아에서 자코뱅파(급진적인 공화주의파) 활동을 부추겼다. 몇몇 이탈리아 애국자들은 이런 과정들이 곧 프랑스와 같은 통일된 '이탈리아 공화국'을 만들어주리라 기대했다.

한편 보나파르트는 1797년 봄 선거에서 왕당파가 거둔 성공에 불안을 느껴, 총재정부에게 무력으로라도 그들을 누르라고 충고했다.

왕당파에 맞서 일으킨 쿠데타(7월)가 실패하자 그는 피에르 오주로 장군을 파리로 보냈고 오주로는 프뤽티도르(열매의 달) 18일(1797. 9. 4)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와 입법부에서 왕당파를 몰아냄으로써 보나파르트의 위신을 크게 높였다. 따라서 보나파르트는 가장 좋은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총재정부는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고도 라인 강 왼쪽 유역을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그 조약에 불만을 품었지만, 5년에 걸친 대륙전쟁 끝에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준 보나파르트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제 전쟁은 영국을 상대로 바다에서만 벌어졌다. 영국을 침략하고자 한 총재정부는 보나파르트에게 영국해협에 집합한 군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가 바다를 장악할 때까지 영국을 공격해서는 안되며 대신 이집트를 점령해 인도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써 영국의 재원(財源)을 고갈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으며 총재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 이 원정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798년 6월 10일 몰타, 7월 1일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원정군 손에 들어왔고 나일 강 삼각주도 곧 함락되었다. 그러나 8월 1일 나일 강 전투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에게 완전히 패배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갇히게 되었고, 더구나 9월에는 명목상 이집트의 종주국인 투르크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투르크의 이집트 침략을 막고 아나톨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으로 보나파르트는 1799년 2월 시리아로 진격했으나 아크레에서 영국군에게 저지당했고, 5월에는 이집트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일 강 전투는 나폴레옹이 질 수도 있음을 유럽에 보여주었으며 영국과 오스트리아·러시아·투르크는 프랑스에 맞서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1799년 봄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군이 패배해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고 패배가 이어지자 프랑스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

프레리알(초원의 달) 30일(1799. 6. 18) 쿠데타로 온건파가 실각, 자코뱅파가 집권했다. 상황은 여전히 혼란했고 새 총재 가운데 한 사람인 에마뉘엘 시에예스는 군사독재만이 왕정복고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보나파르트는 공화국을 구하면서 권력도 잡으려는 생각에서,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1799년 8월 22일 이집트를 떠나 10월 14일 파리에 도착했다.

이때 프랑스는 스위스와 네덜란드에게 승리함으로써 침략당할 위험에서 벗어났고, 나라 안에서 일어난 반혁명 폭동도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따라서 공화국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정당할 수 없었으나 시에예스는 보나파르트와 손잡고 공화력 제8년 브뤼메르(안개의 달) 18~19일(1799. 11. 9~10)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들을 사퇴시키고 입법부를 해산했으며 새로운 통령정부(統領政府)를 수립했다. 통령은 보나파르트를 포함해 사임했던 두 총재 시에예스, 피에르 로제 뒤코 3명이었으나 그뒤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독점했다.

통령정부시대의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권력강화

갓 30세가 된 보나파르트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 그를 믿었으며 그가 질서를 잡아 평화를 되찾고, 혁명이 거둔 정치적·사회적 성과를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리라 기대했다.

참으로 그는 놀라울 만큼 지적이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지칠 줄 모르고 일했지만 야심이 너무 컸다. 혁명 덕분에 그처럼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혁명의 아들로 여겨졌고 그 자신도 이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아들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의 아들이었으며 가장 잘 깨우친 전제군주였다.

그는 국민주권·일반의지·의회토론 같은 것을 믿지 않았고 인간의 이성 자체보다 이성을 발휘하는 것을 더 신뢰했다. 또 무력이 뒷받침되기만 하면 계몽된 확고한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고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했으며 여론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장 '민간인 같은' 장군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군인이기를 그만둔 적은 없었다.

보나파르트는 군사독재를 폈으나 시에예스가 작성한혁명력 제8년 헌법(1799. 12. 25) 때문에 처음에는 그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헌법은 '인권'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우지도 않았지만 국유재산 매각을 무효로 돌릴 수 없음을 선포했고 망명귀족에게 불리한 입법을 지지함으로써 혁명파들을 안심시켰다. 또한 제1통령에게 엄청난 권력을 주었고, 나머지 두 통령은 이름뿐이었다. 제1통령은 민사와 군사 부문의 모든 관직을 임명하고, 심지어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3개의 입법부 의원들을 뽑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 헌법은 1800년 2월 국민투표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개혁 프로그램

통령정부가 이룬 행정개혁들은 그 헌법보다 더 오래 살아 남았고 프랑스에 더 중요한 것이었다.

정부의 최고기관으로, 제1통령이 창설해 대부분 그가 직접 이끈 국가위원회는 새로운 법률의 원천이자 행정재판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국참사원). 각 주(州)의 행정책임자인 주지사는 법이 집행되는 것을 감독했고 중앙집중을 도왔다. 사법제도는 크게 바뀌었는데 혁명초부터 선출되던 재판관은 정부가 임명했으나 종신임기(終身任期) 제도로써 독립성을 보장했다. 경찰 조직도 강화했다.

그리고 지방당국이 아닌 전문 세무공무원에게 직접세 징수를 맡겼고, 프랑 화(貨)를 안정시켰으며, 주주(株主)들과 국가가 함께 소유하는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함으로써 재무행정을 크게 개선했다. 군대와 비슷한 조직으로 중등교육을 실시하고 대학도 다시 세워 교육을 중요한 공공사업으로 삼았으나 초등교육은 아직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보나파르트는 개인적으로 종교에 무관심했지만 사람이란 종교를 필요로 하며 프랑스에 종교적 평화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1796년 이탈리아에서 교황 피우스 6세와 휴전조약을 맺을 때, '성직자공민헌장'(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교황이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내렸던 경고서한들을 거두어들이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뒤 새 교황 피우스 7세(1800~23)와 협상해 교회와 혁명을 화해시키는 종교협약을 맺었다(1801). 교황은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했고 모든 주교의 사퇴를 요구했다.

새로운 고위 성직자들은 제1통령이 지명하고 교황이 서임하게 되었으며 교회재산 매각도 교황에게서 공식으로 인정받았다. 이 종교협약은 신앙의 자유와 국가의 세속적 성격을 인정한 것이었다.

민법을 집대성하는 일은 1790년에 시작해 통령정부 시대에 끝냈다. 1804년 3월 21일 공포한 나폴레옹 법전은 혁명이 거둔 수확들, 즉 개인의 자유, 노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국가의 세속적 성격, 법 앞에서의 평등 등을 뚜렷이 규정했으나 토지재산을 보호하고 고용주에게 더 큰 재량을 주었으며 피고용자를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또한 이혼을 인정했지만 여자에게 아주 한정된 법적 권리만을 주었다.

나폴레옹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군대였다. 그는 혁명을 통해 이룬 군대체계(강제징집과 대리징병을 허용하고 징집병과 기존 군인을 함께 편성하며 모든 사람에게 최고 계급으로 승진할 자격을 열어놓은 것)를 그대로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가 만든 보병장교를 키워내는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덕분에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들이 더 쉽게 직업군인이 될 수 있었고 더구나 국민공회가 설립한 에콜 폴리테크니크도 포병장교와 군사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는 아직 군대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것은 '군인의 발' 즉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를 토대로 삼는 그의 전략 때문이었다.

군사원정과 불안한 평화

나폴레옹은 1799~1800년의 겨울과 봄에 군대를 개편하고 러시아가 대(對) 프랑스 동맹에서 떨어져나간 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고 준비했다.

그는 스위스 연방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그곳에서는 본토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이든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이든 마음대로 옆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승리에 비추어 이탈리아를 공격목표로 택했으며 제노바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했다. 6월에 벌어진 마렝고 전투로 프랑스는 아디제 강까지 이르는 포 강 유역을 장악했고 12월에는 또다른 프랑스 부대가 독일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이겼다.

1801년 2월 오스트리아가 뤼네빌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는 자연국경, 곧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 그리고 피레네 산맥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제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영국뿐이었으나 영국도 곧 싸움에 지쳐 평화를 원했다. 1801년 10월 런던에서 예비조약을 맺은 뒤 1802년 3월 27일 아미앵 평화조약을 맺었다(아미앵 조약).

유럽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위신은 더욱 드높아졌고 1802년 8월에는 그를 종신통령으로 삼자는 안건이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지지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국제평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영국과 달랐다. 영국에게는 아미앵 조약이 더 물러설 수 없는 종착점이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프랑스의 새로운 패권을 향한 출발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관세도 낮추지 않고 유럽의 반을 프랑스 시장으로 삼으려 해 영국 상인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다시 해외팽창을 꾀했는데 반란이 일어나 잃었던 산도밍고를 되찾고, 1800년 스페인에게서 받은 루이지애나를 점령하며 지중해와 인도양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는 유럽에서도 피에몬테를 프랑스에 병합시켰을 뿐 아니라 스위스 연방에 더 민주적이고 분권화한 통치체제를 강요하는 등 자연국경 너머로 세력을 넓혀갔다.

프랑스의 팽창을 경계한 영국은 프랑스가 제노바에서 안트웨르펜에 이르는 해안을 독차지한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평화가 깨진 직접 계기는 몰타 문제였다. 아미앵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가 물러간 뒤 몰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아미앵 조약에 따라 원래 주인인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s)에게 그 섬을 돌려주어야 했지만 프랑스가 나폴리의 몇몇 항구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영국은 몰타를 떠나지 않았다.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긴장되었고 마침내 1803년 5월 영국이 전쟁을 선포했다.

제정시대의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개요

전쟁은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만들었다.

영국이 뒷돈을 댄 왕당파의 암살음모가 1804년에 밝혀지자 보나파르트는 다시는 그런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 부르봉 가문 출신으로 독일에 살고 있던 앙기앵 공작이 음모의 주범이라고 믿은 경찰은 탈레랑과 경찰총수인 조제프 푸셰의 동의를 얻어 그를 납치하여 총살했다(3. 21).

제정수립

푸셰는 보나파르트에게 종신통령제를 세습제정으로 바꾸어 암살로 체제를 뒤엎으려는 희망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보나파르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804년 5월 28일에 제정을 선포했다. 통치조직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앙시앵 레짐 때의 것과 비슷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우선 그는 위신을 높이기 위해 1804년 12월 2일 교황 피우스 7세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마지막 순간에 황제는 교황에게서 황제관을 건네받아 손수 자기 머리에 썼다.

1804년 나폴레옹 집안 사람들에게 황족(皇族) 칭호를 내렸고 1808년에는 제국의 작위(爵位) 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반발이 있었으므로 선전을 강화하고 언론을 엄격히 검열했다. 그러한 독재체제 덕분에 나폴레옹은 여론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영국과의 전쟁

1803~05년 프랑스와 전쟁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프랑스로서는 육군이 영국에 상륙해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고 영국은 대륙에 있는 나라들과 동맹을 결성해야만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영국 침략을 준비했다. 그는 브레스트와 안트웨르펜 사이에 군함을 2,000척 가량 끌어모았고 불로뉴에 군대를 집결시켰다(1803). 그러나 1798년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협을 건너려면 바다를 장악해야만 했다.

영국 해군보다 훨씬 약한 프랑스 해군은 스페인 해군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두 나라 해군이 힘을 합쳐도 영국 해군이 거느린 함대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까말까 정도였다.

스페인은 1804년 12월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는 앤틸리스 제도(諸島)에서 만나 영국 함대 하나를 유인해 쳐부숨으로써 두 진영의 해군력을 비슷하게 만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해협 입구에서 싸운다면 승리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 작전은 실패했다. 빌뇌브가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에서 앤틸리스 제도로 갔을 때 스페인 함대는 오지 못했다.

프랑스 함대는 넬슨에게 쫓겨 공격 한번 못한 채 1805년 7월 유럽으로 되돌아가 카디스로 피했고 그곳에서 영국 함대에게 봉쇄당했다. 빌뇌브는 스페인 함대의 도움을 얻어 봉쇄를 뚫으려 했으나 1805년 10월 21일에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넬슨의 공격을 받았다. 그 전투에서 넬슨은 목숨을 잃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영국은 침략당할 위험에서 벗어나 마음껏 바다를 누빌 수 있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스웨덴·나폴리로 이루어진 새로운 대(對) 프랑스 동맹 결성에도 성공했다.

트라팔가르 전투가 벌어지기 3개월 전인 1805년 7월 24일에 나폴레옹은 군대를 불로뉴에서 도나우 강으로 옮겼다(따라서 프랑스가 트라팔가르에서 승리했더라도 영국 침략은 이루어질 수 없었음). 트라팔가르 전투 1주일 전 프랑스군이 울름에서 오스트리아를 크게 이겨, 나폴레옹은 11월 13일 빈에 입성했고 12월 2일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무찔러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 베네치아와 달마티아를 나폴레옹에게 넘겨주었으며 독일에 있는 광대한 영토를 나폴레옹의 속국인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에게 넘겨주었다. 그다음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의 부르봉 왕가를 내쫓고 그 왕관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에게 씌웠다.

1806년 7월에는 라인 연방(聯邦)을 만들었고 얼마 안가 서부 독일 전체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연방 속으로 들어왔다(울름 전투).

1806년 9월에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패배했다. 러시아군은 1807년 2월 아일라우에서는 힘겹게 버텼으나 6월 프리틀란트에서 크게 패배했다. 바르샤바에서 나폴레옹은 그가 폴란드를 되살려주리라 기대하던 폴란드 애국자 마리에 발레프스카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하나 얻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 싸움을 계속할 수도 있었으나 영국과 맺은 동맹에 지쳤다.

그는 프로이센 북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틸지트에서 나폴레옹과 만나 프로이센에서 떨어져 나온 폴란드 지방에 바르샤바 대공국(Grand Duchy of Warsaw)을 세운다는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동유럽은 러시아가, 서유럽은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대륙봉쇄와 이베리아 반도 원정

나폴레옹은 이제 영국 침략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영국의 경제를 질식시켜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반도전쟁). 그는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을 몰수하도록 명령했으며 영국 국적인 선박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그 식민지의 해안에 들르는 모든 배를 나포(拿捕)하겠다고 선언했다.

봉쇄에 성공하려면 유럽 전역에서 엄격히 이루어져야 했으나 영국의 오랜 동맹자인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상업을 파멸시킬 봉쇄에 처음부터 협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쳐부수기로 마음먹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지나가도록 허용했고 프랑스군은 리스본을 점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북부 스페인에 너무 오래 주둔하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카를로스 4세는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부르봉 가문 출신의 마지막 군주를 유럽에서 몰아낼 기회로 삼아, 1808년 4월 카를로스와 페르난도 둘 모두 퇴위를 강요하면서 탈레랑의 성(城)에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가 잔혹하게 진압된 뒤에 스페인 전지역으로 반란이 퍼졌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리 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 국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패배한 것은 그의 위신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무기를 들고 일어선 이베리아 반도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영국에게 교두보(橋頭堡)가 되었고 정력적인 아서 웨슬리(뒷날의 웰링턴 공작)가 지휘하는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결정적인 승리들을 거두었다. 에어푸르트 회합(1808. 9~10) 때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서 지원 약속을 받아내려 애썼으나 그는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1세의 이런 태도는 무엇보다 나폴레옹의 정책에 실망한 탈레랑이 남몰래 그와 협상하고 있었던 데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1809년초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반란을 거의 진압했으며, 그뒤 4월에는 바이에른을 공격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를 또다시 패배시켰고(7. 6), 쇤브룬 조약(1809. 10. 14)으로 일리리아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대륙봉쇄 체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다.

제정의 강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의 운세는 1810년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샤를마뉴의 후계자로 생각했으며 아이를 낳지 못한 조제핀을 버리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1811년 3월 그녀가 아들을 낳자 제국의 미래가 보장된 듯했다. 제국의 영역은 어느 때보다 넓었고 황제 친척이 지배하는 속국들로 에워싸여 있었으며 스위스 연방과 라인 연방, 바르샤바 대공국 같은 여러 나라가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는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으로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매인 것처럼 보였다.

1796년 이전에 복잡했던 유럽의 지도는 이제 아주 단순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경들은 지리적·민족적인 구분선과 맞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통일에 아무 관심도 없었으나, 나라수를 줄이고 국경을 옮기며 여러 종족을 뒤섞고, 혁명과 민족주의를 통해 이룩한 프랑스 제도들을 퍼뜨림으로써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에 기초를 놓았다. 한편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 일깨운 민족감정은 거꾸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809년부터 줄곧 스페인 게릴라들이 프랑스군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반란지도자들이 1812년 카디스에서 소집한 국민의회(Cortes)는 프랑스 혁명 이념과 영국 제도들에서 영향받은 헌법을 선포했다.

러시아 원정 참패와 그 이후

에어푸르트 회합 뒤부터 러시아 황제는 나폴레옹에게 점점 더 믿지 못할 태도를 보였고 나폴레옹은 그를 위협하기 위해 1812년 봄 폴란드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마지막 협상이 실패한 뒤 6월말에 그의 대군(Grande Armée), 즉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에서 빼내온 부대를 포함해 총 45만 3,000명 가량의 병력은 니멘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초토전술(焦土戰術)을 펼치면서 퇴각했고 나폴레옹 군대는 9월초에야 모스크바 근처에 다다랐다.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는 9월 7일에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전투는 격렬했으나 뚜렷한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1주일 뒤 나폴레옹은 텅빈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같은 날 엄청난 화재로 인해 모스크바의 대부분이 타버렸다. 더구나 알렉산드르가 뜻밖에도 나폴레옹과 협상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퇴각해야 했는데, 때 이르게 찾아온 겨울 한파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에게 커다란 재앙을 안겨주었다. 베레지나 강을 건너 살아돌아온 나폴레옹 군대는 1만 명도 채 못되었다.

이 재앙으로 유럽의 모든 나라는 나폴레옹에게 도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소식이 독일에 퍼지자 반(反)프랑스 시위가 일어났고 프로이센이 파견한 부대들은 12월에 프랑스군을 이탈해 거꾸로 그들에게 총구를 돌렸다. 오스트리아도 파견대를 철수시키고 점점 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사람들도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불만스런 움직임이 잦았는데 파리에서는 한 비판적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거의 성공할 뻔했다. 이 사건으로 나폴레옹은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다(12.18). 그는 독재를 강화하고 온갖 수단을 다해 자금을 끌어모으며 새로이 군대를 소집했다.

이처럼 1813년 나폴레옹에 맞선 군대는 더이상 용병대가 아니라 1792년과 1793년에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국민군이 되었으며 프랑스인은 예전의 열정을 잃고 있었다.

황제가 꿈꾸는 정복은 이제 더이상 국민의 이상(理想)이 아니었다. 1813년 5월 나폴레옹은 뤼첸과 바우첸에서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에게 승리했으나, 많은 병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는 무력을 앞세우고 중재에 나서 나폴레옹에게 프라하에서 회의가 열리는 동안 휴전하도록 요구했다. 그 회의에서 오스트리아는 알맞은 조건을 제안했다.

프랑스 제국은 자연국경으로 되돌아가고 바르샤바 대공국과 라인 연방을 해체하며 프로이센은 1805년의 국경으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너무 오래 망설이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의 답변이 도착하기 전인 8월 10일 회의는 막을 내렸고 오스트리아는 즉각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이제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프랑스군에 파견되었던 독일 부대들이 동맹군으로 넘어감에 따라 동맹군 병력이 날로 늘어났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1813. 10. 16~19)에서 크게 패배했고, 그 패배는 곧바로 몰락을 가져왔다.

러시아에서의 철군
러시아에서의 철군
몰락과 퇴위

1814년 1월 프랑스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동맹국들은 그 과녁이 프랑스 국민이 아니라 나폴레옹 하나뿐이라 공언했고 나폴레옹은 3월까지 신참병을 이끌고 버텼으나 동맹군을 무찌르지도, 대다수 프랑스인의 무관심을 깨뜨리지도 못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은 1814년 3월 쇼몽 조약을 맺어 나폴레옹이 무너질 때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 동맹군이 3월 30일 파리 근처에 다다르자 나폴레옹은 동맹군의 옆을 공격하려고 동쪽으로 옮겨갔으며 파리 시 당국은 곧바로 동맹군과 교섭에 들어갔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탈레랑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했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파리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4월 6일에 퇴위했다. 퐁텐블로 조약으로 동맹국들은 그에게 엘바 섬을 영지로 주면서 해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200만 프랑을 받고 400명의 자원 호위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나폴레옹은 5월 4일 엘바에 도착했다.

백일천하

나폴레옹 백일천하
나폴레옹 백일천하

퇴위한 45세의 나폴레옹은 그냥 뒤로 물러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복고왕정이 곧 비판을 받았다. 1814년 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황제에게 넌더리가 나 있었지만 부르봉 가문의 복귀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거둔 성과에 강한 애착을 가졌고 돌아온 루이 18세와 망명귀족들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국민들은 의혹을 갖게 되었고 쫓겨났던 사람들의 저항과 음모가 되살아났다.

나폴레옹은 대륙의 상황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빈에서는 유럽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고 엘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몇몇 외교관들이 그를 대서양의 먼 섬으로 쫓아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빈 회의). 또 오스트리아가 아내와 아들이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하지만 그의 아내는 애인이 있어 남편과 함께 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칸에 상륙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르노블 근처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이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3월 20일 그는 파리로 들어갔으며 이제 한해 전에 몰락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혁명정신의 화신으로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100일 천하).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코뱅파와 동맹을 맺어야 했으나 1793년과 1794년처럼 사회주의적인 실험이 되풀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믿은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와 거의 똑같은 정치체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열정이 썰물처럼 급속히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모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듯했다.

동맹군에 맞서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찔렀다. 이틀 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영웅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 앞에 두었을 때, 게프하르트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도착해 전세가 역전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했다. 7월 3일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를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 상륙해 원래 부총독 관저로 지어진 롱우드(Longwood)에 자리잡았다. 그는 영국군 장교가 수행하는 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스스로 롱우드에 틀어박혔다.

그의 첫번째 비서였던 라스 카즈는 이때의 생활을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의 회상 Mémorial de Sainte-Hélène〉으로 엮어냈다(1823). 나폴레옹은 단조로운 은둔생활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아내인 마리 루이즈에게서는 소식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경호원인 오스트리아 장교와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빈에 살고 있던 아들의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허드슨 로와도 사이가 매우 나빴다.

1817년말에 처음으로 위궤양이나 위암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났고 1821년초부터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4월에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달라…… 나는 영국의 과두정치(寡頭政治)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못다 살고 가노라."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그는 52세도 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해에는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루퍼트 밸리에서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Ci-Gît)라는 말만 새겼다.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

나폴레옹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많은 책이 나왔으나 이 흐름은 곧 나폴레옹을 옹호하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밀려났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뜨기 전에 이미 영국의 바이런과 독일의 하인리히 하이네, 프랑스의 스탕달이 그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 또한 황제의 충실한 추종자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의 삶을 이상화해 나폴레옹 신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죽자마자 그 신화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프랑스 경찰의 사찰이나 처벌로도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책자 또는 그림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의 부르주아 왕정이 탄생한 뒤, 창문에는 수많은 3색기가 내걸렸다. 정부는 나폴레옹 신화가 커져가는 것을 용인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1840년 나폴레옹의 아들 프랑수아는 세인트헬레나로 가서 나폴레옹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센 강변으로 옮겨왔고, 그해 12월 파리에서 웅장한 장례식을 치른 뒤 앵발리드 기념관에 그를 묻었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은 그 신화에 힘입어 1848년 압도적인 표차로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852년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

1870년 제2제정의 몰락과 함께 나폴레옹 신화는 무너졌고 나폴레옹을 비판하는 글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러나 제1, 2차 세계대전과 20세기의 독재정치를 겪고 나서 나폴레옹을 좀더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스탈린이나 히틀러와 견주어 볼 때 나폴레옹은 관대했고 유대인의 거주제한을 철폐했으며 인간의 생명을 존중했다.

그는 18세기 사람이자 마지막 '계몽군주'였다. 그가 받은 가장 심한 비난은 야망을 위해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는 인구의 1/6쯤 되는 50만 명의 생명을 잃었고, 청년층이 많이 죽어 출생률도 크게 낮아졌다.

제1제정 때 프랑스의 사회구조는 혁명이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인구의 3/4이 농민이었는데 그 가운데 반은 자영농(自營農)이나 분익소작농(分益小作農)이었고 나머지 반은 가진 땅이 너무 적어 임금노동자로 벌어먹었다. 전쟁과 영국상품의 봉쇄는 공업을 촉진시켰는데, 중앙 유럽으로의 수출이 가능했던 프랑스 북부와 동부에서는 공업이 발전했으나 지중해와 대서양을 봉쇄당한 남부와 서부에서는 쇠퇴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공업인구가 대규모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1815년이 지나서였다. 귀족계급은 나폴레옹이 다시 만들지 않았다면 더 빨리 내리막길을 걸었겠지만 결코 예전에 지녔던 특권들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폴레옹은 중앙집중의 행정제도, 나폴레옹 법전, 프랑스은행과 금융조직, 대학과 육군사관학교 등 오늘날 프랑스의 주춧돌이 된 영속적인 제도들을 남김으로써 프랑스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