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스

바라스

다른 표기 언어 Paul-François-Jean-Nicolas, vicomte de Bar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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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5. 6. 30, 프랑스 폭상푸
사망 1829. 1. 29, 샤요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

바라스(Paul-François-Jean-Nicolas, vicomte de Barras)
바라스(Paul-François-Jean-Nicolas, vicomte de Barras)

프랑스 혁명 당시 총재정부에서 세력을 떨쳤다. 프로방스의 귀족으로 16세에 랑그도크 연대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했고 1776~83년에 인도에서 복무했다. 파리에서 실업자로 지내면서 왕정에 회의를 느껴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환영했다.

자코뱅 클럽이 만들어진 뒤 곧바로 이 클럽에 들어갔고 입법의회 의원 피선자격을 갖추기 위해 1791년 바르 주로 돌아왔다. 의원 선거에 당선되려는 치열한 선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바르 주의 선거인이 되었다. 1792년 9월에는 파리로 돌아와 국민공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 위원으로 그가 처음 맡은 임무는 바르와 니스를 왕당파 세력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이 알프마리팀 주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국왕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뒤 툴롱의 반자코뱅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알프스로 파견되었으며 툴롱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국민공회에서 명성을 얻었고 또 처음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다.

1794년 공포정치 기간에는 특정단체와 연합하기를 거부했으나 테르미도르 9일 쿠데타(1794. 7. 27)에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자코뱅 지도자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하는 데 앞장섰으며, 경찰총장 겸 국내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명성과 세력은 급속히 커졌고 1794년 여름부터 1795년 가을까지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의 많은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이때 파리 민중 봉기를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국민공회에서 반왕당파들의 심한 공격을 불러일으켰고, 한편으로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부인이 된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방데미에르 13일(1795. 10. 5)에 국내군 장군으로 재임명되어 나폴레옹과 함께 왕당파의 반란 음모에 맞서 혁명체제를 지켜냈고 총재정부를 세웠다. 선거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새로운 5인총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그중 가장 인기를 얻었다.

1796년 헌정파(Le Cercle Constitutionnel)에 적극 가담했다. 이 단체는 공화주의보다는 총재정부의 독재적 구조를 더 옹호했던 탈레랑, 조제프 푸셰, 벵자맹 콩스탕, 스탈 부인 등으로 이루어진 반왕당파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의회 내의 왕당파를 몰아낸 프뤽티도르 18일(1797. 9. 4) 쿠데타로 바라스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으나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18일(1799. 11. 9)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는 푸셰가 보낸 첩자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으며 나폴레옹에게서도 반역활동을 한다는 의심을 받아 1801년 브뤼셀로 추방당해, 1805년에야 남프랑스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가 전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몰래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1813년 그를 로마로 보냈다. 그는 브뤼메르 18일 전까지도 루이 18세와 접촉했던 것 같다. 결국 제2차 부르봉 왕정복고(1815)가 이루어진 뒤, 왕은 샤요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평화로이 살도록 허가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