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전쟁

반도전쟁

다른 표기 언어 Peninsular War , 半島戰爭

요약 나폴레옹 전쟁 가운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졌던 전쟁(1808~14).
(스). Guerra de la Independencia.

프랑스군과 이에 맞선 영국·스페인·포르투갈 동맹군이 싸움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크게 부채질하게 되었지만 1813년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벌인 전투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중부·동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영국은 1793~1814년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반도전쟁에 참가했고, 아서 웰즐리 영국군 사령관은 이 전쟁의 승리로 행운을 잡았으며 나중에 웰링턴 공작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7년 7월 7일 러시아와 맺은 틸지트 조약으로 인해 안심하고 영국에, 그리고 영국과 동맹 또는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스웨덴과 포르투갈에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러시아는 스웨덴을 맡기로 했던 반면, 1796년부터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있던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맡아 '영국에게 항구를 봉쇄할 것과 전쟁을 선포할 것을 요구'(7. 19)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종결시키는 방법으로서는 영국의 무역을 봉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기 때문에, 영국에 대해 경제전쟁을 치르도록 계획한 대륙봉쇄를 완성하자는 의도였다. 포르투갈이 계속 머뭇거리자 나폴레옹은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스페인을 지나 포르투갈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1807. 10~11).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도피했고, 쥐노는 11월 30일 리스본에 도착했다(대륙봉쇄체제).

포르투갈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북부의 일부 지역도 함께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자신의 속셈을 분명히 드러내 포르투갈의 전지역과 스페인 북부지방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정부 차원으로 저항군을 조직할 수 없었던 스페인 총리 고도이는 국왕 카를로스 4세에게 포르투갈 왕실처럼 남아메리카로 피신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마드리드를 떠난 이들은 아란후에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란후에스 반란(1808. 3. 17)을 조직한 페르난도파(派)는 고도이를 해임시키고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켜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조아생 뮈라 장군을 보내어 마드리드를 점령하도록 했고, 위협 반 약속 반의 제안을 하며 카를로스와 페르난도에게 바욘에서 회담하자고 유인했다.

나폴레옹은 1808년 5월 5일 바욘에서 페르난도에게 카를로스를 위해 퇴위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카를로스에게도 자신을 위해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 그 대가로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임명한 통치자 밑에서도 가톨릭 국가이자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택했다(나폴레옹 전쟁).

그러나 5월 2일 이미 마드리드 시민들은 침략자에 맞서 봉기했으며 스페인 독립전쟁은 시작되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세력을 멸망하게 한 운동의 시작이었다. 비록 이 봉기는 프랑스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스페인 전역에서 지역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스페인 사람들은 게릴라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프랑스군은 발렌시아에서 퇴각했으며 안달루시아로 진군했던 피에르 뒤퐁 장군도 퇴각하여 마침내 바일렌에서 전(全)부대와 함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7. 23). 수도 마드리드로 진군한 스페인군은 8월에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몰아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다시 공격해들어와 1808년 12월, 마드리드를 탈환했고 스페인 임시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해 세비야까지 갔다.

1810년 1월 프랑스의 니콜라 드 디외 술트 장군은 안달루시아 점령작전을 시작했고, 같은 달 세비야가 함락되자 임시정부는 다시 카디스로 도망했다. 포르투갈에서 웰링턴 장군의 끈질긴 저항, 끊임없는 게릴라 활동, 프랑스군 내부의 갈등 등이 있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는 겨우 최후의 굴복을 모면하고 있었다. 실제로 1808년 8월 1일 처음으로 포르투갈에 상륙한 영국군은 곧바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리스본을 점령하고 프랑스군에게 포르투갈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1808. 8. 30, 신트라 회담). 1809년 포르투갈로 재진군한 프랑스군은 잠시 포르투와 리스본을 점령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많은 어려움을 뚫고 프랑스군의 측면을 지나 마드리드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탈라베라 전투(1809. 7. 27~28)에서 승리했으나 그것도 잠시뿐, 포르투갈 중부로 후퇴해야 했으며 이곳에서 다시 영국의 수중에 들어와 있던 리스본 주변의 시골에서 전열을 강화했다. 웰링턴의 유명한 '토레스 베드라스 전선'은 나폴레옹의 어떤 군대도 막을 수 있도록 설계한 방어요새였다.

그뒤 2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러 지방에서 여러 번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가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병력(이때까지 20만 명 이상)과 물자가 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1811~12년에 온 전력을 러시아에 쏟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고갈된 반도군대는 보충받기는 커녕 러시아로 진군하는 대군대(Grand Armée)를 강화하기 위해 3만 명 정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을 훌륭하게 방어하고 있던 웰링턴은 1812년 스페인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는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주르당 원수를 패배시킴으로써 결국 반도전쟁을 종결시켰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스페인에서 철수했고, 웰링턴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본토까지 쳐들어갔다(1813. 8). 한편 라이프치히 전투(1813. 10. 16~19)에서 완패한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계속 지킨다는 사실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808년 퇴위시킨 뒤 발랑세에 유폐했던 페르난도를 풀어주었다.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3월 스페인으로 돌아와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