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8세

루이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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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5. 11. 17, 프랑스 베르사유
사망 1824. 9. 16,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루이18세는 1795년에 왕이 되었으나 이름뿐이었고 실권을 잡은 것은 1814~24년이다. 또 나폴레옹이 다시 정권을 잡은 백일천하 기간에 잠시 지위를 잃었다.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프랑스를 떠났다. 1793년 왕과 왕비가 처형당하자 스스로를 조카 루이 17세 왕세자의 섭정으로 선포했으며 1795년 루이 17세가 죽은 뒤에는 자신을 루이 18세로 선언했다. 1814년 3월 유럽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 왕정복고를 둘러싼 협상에 성공했다. 5월 2일 루이 18세는 양원제 의회, 종교의 자유, 모든 시민들의 헌법상의 권리들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입헌군주제를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복귀하면서 쫓겨났다가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8일에 돌아왔다. 루이 18세의 통치기간은 프랑스 혁명 뒤 처음으로 의회정치가 시도된 시기였다.

루이 18세(Louis XVIII)
루이 18세(Louis XVIII)

1795년에 왕이 되었으나 이름뿐이었고 실권을 잡은 것은 1814~24년이다. 또 나폴레옹이 다시 정권을 잡은 백일천하 기간에 잠시 지위를 잃었다.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왕세자의 넷째아들로, 프로방스 백작 작위를 받았다.

2명의 형이 죽고 남은 한 형이 1774년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후계자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두 아들을 낳자 왕권을 향한 야망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왕의 후계자로서 파리에 남아 그 상황을 이용하여 왕위 계승자가 되려 한 듯하나 1791년 6월 프랑스에서 도망쳤다. 그는 파리에 잡혀 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변에는 별로 관심을 쓰지 않은 채 단호한 반혁명 성명서를 발표하고 망명귀족연합을 조직했으며 프랑스 혁명에 대항한 싸움에 다른 나라 군주들의 지원을 얻으려 애썼다.

1793년 왕과 왕비가 처형당하자 스스로를 조카 루이 17세 왕세자의 섭정으로 선포했으며 1795년 루이 17세가 죽은 뒤에는 자신을 루이 18세로 선언했다. 1795~1814년에는 프로이센·영국·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왕당파의 명분을 선전하며 뜻을 이루려 애썼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재정적으로 매우 시달리고 있었지만 왕위를 포기하지도 않았고 보나파르트가 주는 연금도 거부했다.

1813년 나폴레옹이 패배를 거듭한 뒤 성명서를 발표해 부르봉 왕정복고 뒤에도 혁명의 결과들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814년 3월 유럽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뛰어난 외교관 탈레랑은 왕정복고를 둘러싼 협상에 성공했고 루이 18세는 전쟁에 지친 파리 시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5월 2일 루이 18세는 양원제 의회, 종교의 자유, 모든 시민들의 헌법상의 권리들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입헌군주제를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1814년 6월 4일 '헌법헌장'(Charte Constitutionnelle)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루이 18세의 이러한 제도상의 실험은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돌아옴에 따라 곧 중단되었다. 미셸 네 원수가 1815년 3월 17일 마음을 바꿔 나폴레옹에게로 돌아서자 루이 18세는 강(Ghent)으로 도망쳤고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8일에야 돌아왔다.

루이 18세의 통치기간은 프랑스 혁명 뒤 처음으로 의회정치가 시도된 시기였다. 왕이 '법안발의권'과 행정권을 가졌고 주로 자문 역할을 하는 의회는 왕이 발의한 법안에 찬반 투표를 하여 예산을 승인했다. 물론 이 시기 입법부는 강경 우파인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이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엘리 드카즈(1819년 총리가 됨)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극우파의 극단주의에 반대했으며 결국 1816년 9월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1820년부터 극우파의 지배력이 커져갔으며 프랑스 혁명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루이 18세의 노력을 위협했다. 그가 죽자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그의 뒤를 이어 샤를 10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