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7세

비오 7세

다른 표기 언어 피우스 7세 , Pius VII
요약 테이블
출생 1742. 8. 14, 교황령 체세나
사망 1823. 8. 20,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800~23 재위).
본명은 Barnaba Gregorio Chiaramonti.

비오 6세 때 프랑스 혁명 군대에게 교황청을 짓밟힌 상황에서 그는 나폴레옹과 극적인 대결을 벌여 교회를 회복했다. 1758년 체세나에서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했고 1785년 비오 6세에 의해 교황령 이몰라의 추기경 및 주교로 임명되었다. 프랑스의 침공 때 비오 6세가 죽음으로써 교회의 중앙 행정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1800년 3월 14일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14주 동안 열린 교황선거비밀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는 교회의 원칙들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나폴레옹과 평화협정을 맺고 혁명군과 신속히 타협하기를 원했다. 1801년 일부 측근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과감히 결단을 내려 교구들을 완전히 재조직하고 로마 가톨릭을 프랑스의 제1종교로 공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정교협약'을 나폴레옹과 맺었다.

비오는 이미 국유화된 교회재산을 포기했고, 주교들에게 그들의 프랑스 교구를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802년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정교협약에 프랑스 정부의 허락 없이 교황이 프랑스에 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교조령'을 덧붙였다. 비오는 이에 항의하고서 1804년 12월 2일 파리에서 나폴레옹을 공식 축성한 것을 계기로 그 조항들을 수정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그결과 나폴레옹과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 1808년 프랑스 군대는 로마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교황령이 프랑스에 병합된다고 선언했다(1809).

1809년 6월 10일 비오는 용감하게 침략자들을 파문했으며, 7월에 포로로 잡혀 1814년 동맹국들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까지 유배생활을 했다. 황제가 교황 비오를 함부로 괴롭힌 사건은 특히 북유럽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교항에 대한 폭넓은 동정과 존경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은 훗날 나폴레옹을 물리친 동맹국들과 비오가 손을 잡도록 도와주었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비오를 퐁텐불로로 이송했고, 1813년 1월 25일 굴욕적인 내용을 담은 정교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으나, 2개월 뒤 비오는 서명을 거부했다.

1814년 풀려나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빈 회의(1814~15)에 의해 거의 모든 교황령을 복구했고, 1815년 로마를 정식으로 되찾았으며, 그뒤 전통적인 토대 위에 교회를 다시 세워나갔다. 정치면에서는 온건한 노선을 따랐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이 벌인 반혁명운동에 협력했다. 그러나 비오는 스페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라틴아메리카 신생 공화국을 한동안 주저한 끝에 승인했고, 프란츠 1세에 의해 요제프주의(교황권을 극단적으로 제한했음)가 신봉되고 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자유 사상들에 호소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비오는 예수회를 복권시켰고(1814), 수도회에 대해서 스스로 재조직할 것을 권장했다. 18세기의 전임교황들과는 달리 교리에 큰 관심을 보였고, 교회의 적들, 특히 프리메이슨파를 엄격히 단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