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셰

푸셰

다른 표기 언어 Joseph Fouché, duc d'Otrante
요약 테이블
출생 1758(?). 5. 21, 프랑스 낭트 근처 르펠르랭
사망 1820. 12. 25, 트리에스테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경찰의 조직가.

자신의 능력과 기회주의로 1792~1815년 격동기에 정부가 여러 차례 바뀌는 와중에서도 계속 공직에 있었다.

낭트와 파리의 오라토리오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사제서품을 받지는 않았다. 1791년 오라토리오회가 해체되자 그는 낭트에 있는 오라토리오회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낭트의 자코뱅 클럽에 들어가 조직의 회장을 맡았다. 1792년 9월 16일 낭트 대표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처음에는 지롱드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이 16세를 재판할 때 왕을 처형하자는 의견에 찬성표를 던진 이후 점차 산악당과 가까워졌다. 1793년 2월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가 내려진 뒤 각 주의 충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10월에는 국민공회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리옹 시를 응징하기 위해 리옹으로 파견되었다. 반란군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거나 집단사살당했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푸셰의 활약은 부정할 수 없었으나 로베스피에르의 압력을 받은 공안위원회의 다수 의원이 그의 대학살 및 '비그리스도교화' 조치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푸셰는 과격함을 누그러뜨렸다. 에베르파 일당이 처형되고 난 뒤에야 그는 다시 국민공회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1794. 4). 6월에는 자코뱅 클럽의 회장이 되었으나 로베스피에르의 공격을 받자 직책에서 물러났고 그의 반대편에 가담했다.

이 연합은 7월에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총재정부(1795~99) 시절에는 자코뱅 당원으로서 활동했다. 1797년 9월 4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입법의회에서 왕당파가 축출된 뒤 그는 밀라노 공사 및 헤이그 공사직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799년 7월 20일에는 경찰장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1799. 11. 9) 쿠데타를 열렬히 지지했다.

이후 그는 비밀경찰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1802년 8월 나폴레옹을 종신 통령으로 하려는 원로원을 저지하려고 하자 경찰장관직이 폐지되었다. 푸셰가 공직을 떠나자 경찰은 무질서해졌고 경찰장관직은 부활되었지만 그는 원로원의 제정선포를 지지한 뒤에야 장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1808년 제국의 백작작위를, 1809년에는 오트랑트 공작작위를 받았다. 1809년 6월에는 경찰장관직 외에도 내무장관직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고 특히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란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자 푸셰는 제국의 굳건함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1807년부터 주로 왕당파를 비롯해 영국과도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809년 7월에는 자신의 권력을 독단적으로 사용해 전국에 걸쳐 국민방위군의 징집을 명령했다. 나폴레옹은 이 일로 크게 화를 내었는데, 특히 파리 수비대가 자신의 적들을 지도자로 선택한 것에는 더욱 분개했다. 푸셰가 비난을 받자 나폴레옹은 10월에 그를 해임했다. 그대신 푸셰는 로마 국가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프랑스를 떠나기 전 영국과 협상을 벌였던 일이 발각되어 다시 해임당했다.

이후 그는 3년 동안 엑상프로방스에서 살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밖으로 그를 내보내기 위해 1812년 그를 일리리아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에 점령당한 뒤에는 나폴리에 사절로 파견했다. 나폴리에서 푸셰는 나폴레옹과 나폴리의 왕 조아생 뮈라 사이에서 이중술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인 1814년 4월 푸셰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루이 18세에게 무시당하자 국왕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경찰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고,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 직을 받아들였다.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에게 자유주의 정책을 권했고 이로써 루이 18세와 오스트리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을 설득해 2번째로 퇴위하는 데 동의하도록 했으며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루이 18세는 그를 경찰장관에 임명했으나 초왕당파의 압력으로 곧 해임당하고 드레스덴에 전권대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국왕에 대한 대역죄로 1816년 1월 5일 추방당한 후 프라하·린츠·트리에스테에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