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루이즈

마리 루이즈

다른 표기 언어 Marie-Lou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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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1. 12. 12, 오스트리아 빈
사망 1847. 12. 17, 이탈리아 파르마
국적 프랑스

요약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의 황녀로 나폴레옹 1세의 2번째 아내가 되었고, 나중에는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의 여공작이 되었다.
나폴레옹과 1810년 4월에 결혼했다. 1811년 3월에 나폴레옹의 후계자 로마 왕을 낳았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떠난 동안 파리에서 섭정을 맡았으나 나폴레옹이 첫 번째로 퇴위한 뒤에 아들을 데리고 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퐁텐블로 조약으로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공국에 대한 통치권을 손에 넣었다. 1821년 9월 나폴레옹이 죽은 뒤 나이페르크 백작과 결혼했다. 그들은 함께 공국을 다스렸으며 이탈리아의 다른 군주들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폈다.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1829) 뒤 파르마 국무장관의 반동적인 정책 추진으로 1831년 봉기가 일어났고, 피아첸차의 오스트리아 수비대로 피신했다. 오스트리아군의 도움으로 권력에 복귀한 뒤에는 오스트리아의 뜻에 따라 통치했다.

나폴레옹 1세의 2번째 아내로서 나중에는 파르마·피아첸차·구아스탈라의 여공작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나폴리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 태어난 맏딸이며,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였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그녀를 나폴레옹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나폴레옹은 조제핀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으므로 이미 관계를 청산하려 결심한 상태였고 왕족 출신의 신부감을 찾고 있었다.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만남은 1810년 2월에 이루어졌으며 4월 1~2일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11년 3월 20일 그녀는 나폴레옹이 오랫동안 바랐던 후계자 로마 왕(나중에는 라이히슈타트 공이 됨)을 낳았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떠난 동안 파리에서 섭정을 맡았으나 나폴레옹이 첫번째로 퇴위(1814년 4월 11일 퐁텐블로에서 조인)한 뒤에는 아들을 데리고 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퐁텐블로 조약으로 파르마·피아첸차·구아스탈라 공국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손에 넣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유배지인 엘바 섬으로 그녀를 납치해오겠다고 위협하자 나폴레옹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1821년 9월 나폴레옹이 죽은 뒤 9월에 마리 루이즈는 나이페르크 백작 아담 아달베르트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이미 2명의 아이가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함께 마리 루이즈의 공국을 다스렸으며 이탈리아의 다른 군주들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나 몇몇 학자는 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라 나약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1829) 뒤 파르마의 국무장관이 된 요제프 폰 베르클라인은 반동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1831년 파르마에서 봉기가 일어나 마리 루이즈는 피아첸차 주둔 오스트리아 수비대로 피신했다. 오스트리아군의 도움으로 권력에 복귀한 뒤에는 오스트리아의 뜻에 따라 통치했다.

1832년 마리 루이즈는 죽어가고 있는 라이히슈타트 공을 만나보기 위해 빈으로 갔다. 1834년 2월 그녀는 봉벨 백작 샤를 르네(1784~1856)와 재혼했으며 파르마에서 죽은 뒤 빈의 카푸힌 교회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