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름 전투

울름 전투

다른 표기 언어 Battle of Ulm

요약 나폴레옹이 약 21만 대군을 이끌고 카를 마크 폰 라이버리히 남작 휘하 7만 2,000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이긴 전투(1805. 9. 25~10. 20).

오스트리아는 1805년 8월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한 영국-러시아 동맹(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한 뒤 이탈리아를 주요전장으로 삼기 위해 병력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 집중 배치했다. 9월 11일 마크 남작은 소규모의 오스트리아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으로 진격해 나폴레옹의 예상 진군로인 슈바르츠발트의 동쪽 끝에서 약 130㎞ 떨어진 도나우 강 상류 귄츠부르크와 울름 사이에 병력을 집중시킨 뒤, 느리게 이동해오는 M. I. 쿠투조프의 러시아 동맹군과 합류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군 병력이 기껏해야 7만 명 정도라고 생각했으나 나폴레옹은 독일을 주요전장으로 선정하여, 러시아군이 도달하기 전에 오스트리아군을 격멸하려고 대군을 몰고왔다. 9월 25일 프랑스군 제1진이 슈바르츠발트 북쪽으로 라인 강을 건넌 뒤 남쪽으로 선회하여 하루에 약 29㎞씩 이동하며 2주 뒤에는 마크가 눈치채기 전에 도나우 강을 건넜다(→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의 대군은 기병대의 훌륭한 엄호를 받으며 잉골슈타트와 도나우뵈르트 사이의 도나우 강을 따라 오스트리아군 배후로 이동하여 동쪽 퇴각로를 차단했다. 10월 둘째 주에 몇 차례 전투가 벌어져 많은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패주하거나, 울름 주위로 좁혀오는 포위망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군의 공세에 몰려 오스트리아 주력부대는 15일에 울름 시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음날 프랑스 포병대가 이 도시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마크는 자기 군대가 러시아 지원군이 올 때까지 그 포위 공격을 버티어낼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협상을 벌인 뒤, 20일에 항복했다. 그때 러시아 군대는 그곳에서 160㎞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전투로 오스트리아군은 5만~6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나 프랑스군의 피해는 아주 적었다.